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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지적도다. 해당번지의 땅이 누구의 소유물인지 알 수 있는 표식이다.

위의 번호들을 각 상병의 환자라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A56.0클라미디어 방광염 환자라고 할 때 이 환자는 누구꺼냐? 당연히 비뇨기과의 것이다. 물론 산부인과에서도 가져갈 수 있다. 그런데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비뇨기과의 '것'이다.

내환자라는 개념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불러온다. 내가 처치하지 못하면 얘는 그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내가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상급병원으로 갈수록 심화된다.

양방은 비교적 지적도가 매우 정리가 잘 돼있다. A라는 환자가 응급실로 내원하면 응급실 인턴이 속전속결로 각 과의 당직 레지던트들을 호출한다. '이 환자를 어느 과에서 진료해야하느냐'를 명확하게 분류하는 기준을 갖고 있다. 별 고민거리도 없다. 그냥 기계적으로 분류하면 된다. 애매하면 두 과 정도 호출해보고 둘이 쇼부보면 된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만약 응급실에 팔이 빠진 소아과 내원했다고 하자, 응급실 당직의가 팔을 끼워넣을 줄 알아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건 나와바리를 침범하는 매우 '공격적인 행위'가 된다. 잠시후 나타난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이렇게 말 할것이다.

"야이 새꺄, 니가 뭔데 팔을 넣냐? 그거 내가 하는건데 이 자식아. 니가 뭘 알아!"

 

한의대 본과 1학년에 양방진단학이라는 과목이 있다. 의대 교수님들이 과별로 2시간씩 들어와서 이런 환자가 '우리 과의 것'이라고 선포하고 나간다. 그냥 상병분류표를 한의대생들에게 쭉 나눠주고, 이런 상병으로 내원하면 이건 다 우리과에서 본다는 것. 그리고 각 상병을 어떤 식으로 분류하는지 짤막하게 브리핑하는 것이 수업의 전부였다. 영토선언. 우리과의 영토는 이렇다.

물론 어쩌다가 두통 같은 경우 신경과로 가야지 이걸 왜 신경외과에서 보냐고 서로 토스하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상병은 어디까지나 예외이다. 몇번의 토스를 거치고나면 '담당과'가 거의 정해진다.

한방병원으로 가보자.

가장 곤혹스러운 자리는 초진접수실 직원이다. 두통 환자가 오면 침구과로 보내냐? 내과로 보내나? 사상체질과로 보내나? 재활과로 보내나? 물론 각 병원마다 카테고리는 있을테지만, 양방보다 훨씬 러프하다. 나도 사상체질과에 어떤 초진 환자를 보내야하는지 아리송하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한의과를 종합병원 아래 분과로 넣는다고 했을 경우에 한의과가 받을 수 있는 지적도 상의 상병은 어떤 것이 있는가? 아토피? 비염? 염좌? 감기? 이런 상병들은 이미 다 양방에서 자기 것이라고 깃발을 꽂은 뒤다. 치과와 한의과의 가장 극명한 차이점이 이 부분이다. 치과는 명확한 '자기 땅'을 갖고 있다. 한의사는 명확한 땅이 없다. 실체는 있으되 소유권이 명확한 영토가 불명확하다. 쿠르드족과 같다. 한의학이 쓸데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의학이 강점을 갖는 상병군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한의과대학도 한의학이 어느 상병에서 경쟁력을 가져야하고 가지는지에 대해 논의한 바가 없다. 한의사가 모든 상병을 다 치료할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 약점을 인정하라. 인정하자. 그리고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영토. 그 영토를 빨리 찾아내고 갈고 닦고 어필해야 지적도에서 '내 땅'을 갖게 된다.

한의사인 나에게 '내 환자'는 어디에 있나? 나는 지적도의 어디에 깃발을 꽂아야하나?<bk>

 

현대의 한의학. 이게 사실 가정의학과와 포지션이 비슷하거든. 내 생각에 양방과 한방을 통폐합한다면, 전면적인 면허통폐합보다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우선 가정의학과와 한의학과 간에 상호 교육과 수련을 통해 일정 수준의 의료인들을 배출해서 경쟁력있는 상병과 질환군을 도출해낸 다음에 가정의학과와 한의학과를 믹스한 새로운 과의 형태로 진료를 하게 한 다음에 결과가 양호하면(당연히 양호할 것으로 사료됨) 차후 종합병원, 병원 순으로 확대하고 이 제도가 자리 잡으면 로컬 단계의 면허통합, 교육과정의 통폐합으로 나아가야할 것으로 보인다. 201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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