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7월 9일 아침 11시 반에 버스를 나누어 타고 대구로 출발했다. 그날 있을 모든 집회판은 경산대 한의대 쪽에서 맡기로 하고 우린 개략적인 내용만 전달받고 출발했다. (불행히도 당시에 우리학년에서 단대 비대위에서 일하던 학우는 나 혼자여서 몹시 외롭던 시절이었다. -_-;;;)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중간에 휴게소에 잠시 쉬었고, 2시 쯤 되어 대구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경산대 학우들이 이미 집회준비를 모두 완료해두었다.

'대구경북 범한의계 공동투쟁본부 출정식'
(당시 상황은 한의대 학생 뿐 아니라, 교수, 한의사, 학부모 할것없이 모든 이들이 한의계 공동투쟁조직을 만들어 정부에 대항하고 있던 시기이다. 이미 교수들까지 투쟁의 대열에 합류해서 그야말로 사상최초의 한의대 총력투쟁의 시기.)

이날 집회는 교수님, 한의사, 학부모, 한의대생이 모두 참가하기로 하여,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은 많이 참가했지만, 한의사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본식이 시작되고 연설, 노래, 구호, 문선이 이어졌다.

식을 모두 마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3개 차선 이용하여 시내로 나갔다.

우리의 목적지는 '대구지방검찰청'이었다. 그날 집회의 최대 목적은 약사의 한약조제시험을 졸속시행한 보건복지부 장관을 전국의 모든 한의사와 한의대생들, 학부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고발장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나는 플래카드를 들고 대열 옆에서 경찰들이랑 같이 뛰었는데,(집회에서 플래카드는 집회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도 있지만, 경찰이나 차량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는 역할이 더 크다. 교차로가 나타나면 제일먼저 플래카드 든 학생들이 뛰어 나가서 길을 막아야 교통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대열 중에 학부모님들이 뒤로 많이 쳐지셨다. 대열을 따라 한참 뛰어가는데, 누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세상에! 조카였다. 이름은 김정열.

(이 녀석은 촌수로 따지면 7촌조카인데, 나이는 동갑이라 친구처럼 지낸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같은 반에 있었고, 이 녀석은 경대 의대에 들어가고 나는 한의대를 갔는데 그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이게 무슨 왕자와 거지람...)

어떻게 알고 왔냐니까 그 근처에 자기 학교(경북의대)가 있어서 지나가는데 멀리서 우리 학교 깃발을 보고 혹시나 하면서 날 찾으러 왔단다. (참 기특하기도 하지? -_-;; 이런게 혈연의 정일까..)

조카랑 같이 대열 따라 뛰어 가면서 간단히 얘기를 하고 헤어졌는데 마지막에 작별인사로 모자를 살짝 들어 삭발한 내 머리를 보여줬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3년 만에 잘나가는 왕자와 빡빡머리 거지가 되어 거리에서 만나다니! 정말 기분이 묘했다. 망할 놈의 시상이로세.

어느덧 마지막 집결지에 거의 도착했다. 동인로타리인가 뭔가하는 사거리가 멀리 보였다. 집회는 사거리 모퉁이까지만 신고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의 대열이 사거리를 지나면 그 때부터 불법집회가 되는 것이었다. 사거리를 바라보며 한참 걸어가는데 갑자기 사거리 앞 내리막 30미터 지점에서 앞서가던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뛰어, 뛰어!"
"야, 사거리 지나서 바로 오른쪽으로 돌진!!!"
"빨리 뛰어. 빨리."

우리는 선두에 뛰는 학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헉헉대며 뛰었다. 앞에 뛰던 애들은 정말 빨리 뛰어갔다. 사거리에 다다른 후 우리는 멈추지 않고 우회전해서 계속 내달았다.
모퉁이를 획 돌아서 달려 가니 20미터 앞에 전경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갑작스런 돌진에 모두 당황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냥 전경들을 향해 돌격했다!
학생들 중에 누군가 외쳤다.

스크럼!!

꿍! 두타탁! (전경들이 곤봉으로 학생 때리는 소리)
으샤! 으샤! 으샤! (학생들이 스크럼으로 전경들을 미는 소리)

순간 전경들의 대열이 뒤로 밀리고, 학부모님들이 뛰어오셔서 다시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하셨다.

그 사거리의 길은 모두 8차선이라 엄청나게 넓었는데, 전경들은 아주 엉성한 대열로 8차선 전체를 가로질러 막고 있었다. 인도쪽은 막지 않고 차도만 어정쩡하게 막고 있었다.

길의 폭이 너무 넓어서 전경 숫자가 모자랐다. 우리 역시 숫자가 부족해서 오른쪽 차선에만 대열을 지어 있었다. 일단 학생들이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는 쪽에 차가 못 들어가게 준비해간 플래카드로 막았다.

그 도로는 8차선이었다! 학생수도 부족했지만, 전경들 수는 더 부족했다. 전경들은 어쩔줄 모르면서 우리 앞에 엉거주춤 대열을 만들어서 섰는데, 그냥 보기에도 너무 엉성했다.

우리가 스크럼을 짜고 밀어 대자, 곤봉과 군화발이 날아들었지만, 우리는 오른쪽 차선에서만 계속 밀었다. 왼쪽차선에 있는 전경들은 어정쩡하게 서서 그냥 구경만 하고, 오른쪽 도로에선 계속 학생과 전경들 간에 으샤으샤를 하고 있었다.

몇번의 밀고 밀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 학생들이 대열을 재정비해서 밀었다. (이번에는 뒤줄 학생들은 안 밀고 앞쪽 대열의 네 줄만 밀었다. 작전상.)

앞 줄의 학생들이 서너번 으샤으샤를 했을까. 뒤에 서 있던 대열의 학생들이 갑자기 "뛰어!"라는 소리와 동시에 대열 오른쪽으로 달려나가 인도를 통해 전경들의 대열을 지나 앞쪽으로 뛰었다. 함성소리와 함께. 학생들은 휙휙 달려나갔다.

당황한 전경들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차도에서 으샤으샤를 하고 있었고,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은 옆의 인도를 통해 앞으로 뛰어 나가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이 이미 전경들의 대열을 지나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사태를 파악한 전경들은 으샤으샤!를 그만두고 방패를 추스리고 학생들을 추격하였는데, 구령에 맞춰 장비를 들고 힘겹게 뛰었다. 헛둘! 헛둘!

우리 역시 잡히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 대구 지방검찰청에 고발장을 넣기 위해!!!

몇 백미터를 미친듯이 달려서 우리는 드디어 대구지방검찰청 앞 도로를 점거하는데 성공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빨리 뛰는 인간들은 처음 봤다.) 우리는 질주 후에 검찰청 정문 앞에 대열을 지었고, 전경들도 뒤늦게 달려와서 검찰청 정문 앞에 대치했다. 검찰청 앞이라 여느 집회 때와 달리 약간 긴박했다.

대열을 정비하고 나서 전경들은 모두 방독면을 꺼내썼다. 전경들이 방독면을 꺼낸다는 것은 진압 하겠다는 표시였다.(방독면을 본 순간, 지난 번 강서경찰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으, 저 자식들 또 최루탄 쓰려나. 아..씨...또....)

경찰의 방독면으로 보여주는 진압표시에 우리는 구호와 노래로서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최루탄이 터질 사태를 대비했다. 최루탄이나 칙칙이가 터질 경우, 플래카드를 이용해서 재빨리 차도를 막고 학생들 대열을 뒤로 빼라고 연락이 왔다. 그냥 최루탄 맞고 널부러져 있다가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큰일난다. 방심하다가 집회에서 교통사고 나면 난리난다.

앞 쪽에선 경찰 측과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의 요구사항은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이 고발장을 한장씩 접수시키는 것이었다.

얼마 후 협상이 타결되고 전경들은 방독면을 벗었고 우리는 대열을 뒤로 이동시켰다. 고발장은 개인별이 아닌 일괄적으로 접수하고 접수할 동안만 맞은편 도로 3개 차선에서 집회를 허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우리는 가지고 간 고발장들을 모아 검찰청에 접수시켰고 길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 전경들이 심심해 할까봐 구호와 노래를 불러주었다. 한시간 반 정도 지난 후에 고발장 접수와 면담을 완료하고 집회를 해산하였고, 우리는 무사히 대구를 떴다.

그 날... 검찰청 앞 도로에서 전경들과 신나게, 죽을힘을 다해 뛰던 나의 친구들. 그들의 헐떡거리던 숨소리, 그들의 발구르는 소리. 그들의 내지르던 함성.

그리고 우리와 함께 헛둘헛둘 힘겹게 달리기했던 그 전경들, 이제 다 제대해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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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52283 2012.03.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의 듣고 있는 학생회 후배입니다 ㅎ
    예전 선배님들 정말 고생이 많으셨네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