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5월 8일.
그날은 전국 한의대 집회가 서울시내에서 있었고 몇명의 선발된 한의대생들이 청와대에 시위하러 간 날이다. 물론 청와대에 갔던 학생들은 청와대에 가보지도 못하고 모두 경찰서로 잡혀 갔다. 그날 낮집회를 마치고 해질녘 즈음 우리는 우리학교 학생이 잡혀 있는 강서경찰서 앞에 모였다.

강서경찰서 바로 앞 보도에 동국대 한의대생과 동의대 한의대생 200여명이 앉아서 연좌농성을 했다. 곧이어 학생들의 대열 앞엔 무장한 전경, 백골단들이 무리지어 대치했다. 도로엔 경광등을 번쩍이는 경찰차가 와서 '5분 안에 해산하라!'는 경고를 외쳐대고 있었다.(밤에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 이런 시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그때는 잘 몰랐었다. -_-;;;; )

당시 문민경찰은 이런 류의 시위가 있으면 해산시키기 보다는 최루탄 쏘고 진압해서 체포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 날도 역시.

우리는 몇분 동안 노래와 구호를 한 후, 집회를 끝내고 해산하기 시작했다. 먼저 앞에 있던 동의대 한의대생들이 모두 일어서서 뒤로 빠져나왔다. 그들에게 잘가라고 인사하고 뒤이어 동국대생들이 막 일 어서서 해산하려는 순간, 앞 전경들의 방패사이가 쫙 벌어지면서 칙칙이가 푸파팍!! 터지고, 백골단이 뒤이어 학생들 쪽으로 뛰어들면서 앉아 있던 학생들을 마구 때리고 밟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의 문민경찰은 체포하는 것도 문민스러웠다.)

그들은 대한민국 경찰임에 틀림없다. 우리보고 해산하라고 해놓고 막상 우리가 해산하려하자, 그들은 우리를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전경들이 뛰어들어옴과 동시에 앞에서 학생 누군가 "튀엇!"라는 소리를 질렀고, 우리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모두들 일어 나서 정신없이 뒤로 뛰었다. 한참 두 블럭 정도 뛰고나서 뒤돌아보니 멀리 하얀 칙칙이 가루가 뽀얗게 날리고 몇몇 학우가 전경에 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애들이 뛰어오고 있는 경찰서 쪽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누군가가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자세히 보니 재홍이였는데 눈에 칙칙이를 정통으로 맞아서 앞을 못 보고 비틀거렸다. 재홍이를 부축해서 골목쪽으로 조금 걸어가다보니 저 쪽 도로에서 다시 고함소리가 들리고 전경들이 다시 남은 학생들을 덮치는 듯 보였다. 전경들의 발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쪽에서 애들이 다시 우르르 뛰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렸다.

얼른 재홍이와 여학생 몇명을 데리고 옆 건물로 뛰어들어갔다.(도망갈 데가 거기 밖에 없었다.-_-;;;) 일단 무작정 계단을 올라가서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어떤 사무실이었다.

"한의대생들인데요, 지금 쫓겨왔거든요. 잠시만 여기 있다가 나가면 안 될까요?"

거기 있던 사람들도 우리의 갑작스런 침입에 놀라, 아무말도 못 하고 얼떨떨해 있었다. 같이간 누나가 창밖을 조심조심 보더니 우리보고 "애들아, 머리 숙여!"라고 말했다. 밖을 보니 도로에 전경들이 쫙 깔렸다. (말그대로 정말 개미들처럼 검은색 하이바가 도로에 쫘악~ 깔렸다.)

우린 위험한 사무실을 나와서 옆 창고로 옮겼다. 내가 옥상에 살피러 갔는데, 그 순간 아래층 식당 아저씨랑 마주쳤다. 아저씨가 누구냐고 묻길래, 사실대로 말하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했다. 나같이 데모하다가 피신한 애들 숨겨주면 자기가 곤란해진다나 어떻다나, (우리가 시국사범이냐???-_-;;;)아무튼 기분이 좋진 않았다. 몇 분이 지난 후 그 건물을 나왔고 다시 우리 학생들이 집결해있는 곳으로 갔다.

다시 모인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우린 그 때 집으로 돌아가려고 전세버스까지 대절해놓고 경희대로 돌아가려고 해산하고 있었는데 해산하는 그 순간에 칙칙이를 쏘고 진압을 하다니! 무엇보다도 우리가 대항한번 못해보고 그냥 앉아서 당한 게 너무 분했다.

흩어져 있는 애들을 다시 모았다. 여학생들은 일단 경희대로 보내고 나서 인원을 확인해보니 많은 애들이 연행당한 것 같았다. 같이 남은 동의대 친구들이랑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잡혀간 친구들을 버려두고 우리끼리만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우리 모두 똑같이 연행당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학생 대표를 경찰 쪽에 보내서 이야기를 해보니, 자진연행은 안되고 자진 해산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오호~ 망할놈의 경찰이로다! 해산하려는데 덮친 놈이 누군데..

협상하던 중 어느새 벌써 전경들과 백골단, 사복입은 짭새(민간인 차림의 경찰 : 촌티나는 잠바와 운동화를 착용하는 것이 특징임.)들이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옆에 정렬해서 워커발을 구르며 위압적인 모습으로 주욱 서 있었다.

경찰이 연행해주질 않아서 우린 결국 연행당하는 걸 포기하고 자진해산하기로 하고 일단 동국대 학생들이 먼저 일어나서 큰 길 쪽으로 걸어나왔다.
큰 길로 나와서 경희대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야, 동의대 애들 지금 연행당하고 있어! 전경들이 애들 지금 좌악 둘러쌌어."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오늘 이 놈의 경찰들이 정말 쌩쑈를 하는구먼...
몇 초 후 전경들이 우리가 모여있는 쪽으로 달려와서 우리를 3겹으로 포위했다. 짜식들 해산하라고 할때는 언제고, 이건 또 뭔 쌩쑈냐?!! !!!

졸지에 포위당한 우리들은 너무 황당했다. 자진해산하라고 해서 해산했더니 또 포위를 해? 이 자식들이 도대체 우리한테 뭘 바라는거야? 오늘 벌써 두번째네. -_-;;


닭차 3대가 이쪽으로 왔다. 우린 곱게 연행당하기로 하고 고분고분 전경들이 시키는대로 했다. 친구들 몇명이랑 같이 닭차에 올랐다. 일반 버스를 개조해서 그런지 내부가 너무 답답했다. 식판이 있고, 방패가 주욱 꽂혀 있고, 의자에는 곤봉들이 주루룩 꽂혀있고, 너무 텁텁하고 갑갑했다. 정권이 바뀌면 닭차부터 좀 바꾸어야겠다. 이래서야 전경애들 여름에 더워서 타고 다니겠냐.

피곤해서 그냥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잤다. 닭차는 계속 서울시내 경찰서를 순회하면서 우리를 몇명씩 내렸다. 결국 재수없게도 난 맨 마지막으로 내렸고, 새벽 2시 반에 동대문경찰서가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전경들이 시키는대로 경찰서 내부로 들어갔다. (그때가 태어나서 경찰서에 처음 들어가보는 것이었다.)

형사들이 우리를 대뜸 보더니 이미 다 알고 있다는듯이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아무 자리나 대충 앉아서 조사를 받았다. 나를 취조하는 형사는 인사 대신 불평부터 했다.

"어제도 밤샘야근했는데, 오늘 또 너희들 때문에 비상걸려서 집에도 못 들어갔잖아! 야! 빨랑 여기다가 사실대로 다 적어."

형사가 진술서를 하나 던져주었다. 주소, 이름, 직업, 가족관계, 전재산까지!
연행된 경위를 쓰라고 하길래 여기에 '빵먹다가 해산하려는데 연행되었음.' 이라고 적었다. 실제로 우리는 초코파이와 빵을 좀 나눠먹은후 해산하는데 연행되었으니까.

형사는 나의 진술서를 바탕으로 조서를 꾸며나갔다. 형사의 질문에 나는 예/아니오 대답만 대충 했는데, 나중에 조서를 읽어보니 내가 공손하게 주관식으로 대답한 것처럼 작성되어있었다.

이를테면, 형사가 "이번 집회는 정부의 한의학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참가하게 된 거지?"라고 물으면 난 그냥 "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나중에 조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질문: 이번 집회는 왜 참가하게 되었는가?
대답: 정부의 한의약 정책에 불만을 품고 상경하여 집회에 참가하였습니다.

내 참 기가 막혀서.

형사가 다시 묻는다.
"이번에 복지부 앞에도 갔지? 가서 정부규탄하고 노래부르고 구호하고 했지? 그리고 노래는 뭐 불렀지?"

"예, 동지가, 전한련찬가 같은 거 불렀는데요."

그러면 이렇게 기록된다.

질문: "이번 집회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대답: "복지부 앞에서 정부규탄을 하였으며 동지가, 전한련찬가 등등 의 노래를 불렀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런 식이다. 나중에 확인해보라고 주는 조서를 읽어보면 정말 황당하다.

조서를 다 쓰고 나서. 형사가 배고프냐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 서랍에서 박카스를 하나 꺼내서 줬다. 나보고 소파 있는 저 쪽에 가서 좀 쉬라고 했다.

역시 사회에서는 줄을 잘 서야하는가보다! 내 옆에 어느 늙은 형사에게 걸린 동의대 친구는 형사가 얼마나 꼬치꼬치 물어보는데, 옆에서 듣고 있는 내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점심은 몇시 몇분에 먹기 시작했지? 그리고 가격은? 뭐? 1000원? 그래, 몇명이 먹었어?" 대충 이런 식이었다.

난 박카스를 하나 꿀꺽꿀꺽 마시고 소파로 가서 잠을 청했다. 한시간 쯤 지나서 깨우길래 같이 잡혀온 애들이랑 같이 유치장으로 따라갔다.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유치장.)

때묻은 노란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쇠창살 너머로 차가운 마루방이 보였다. 어릴때 반공영화에서 보던 그런 유치장이었다.

먼지가 뽀얗고, 퀴퀴한 냄새나는 곳. 유치장 안에는 전등이 없었다. 너무 추워서 유치장 안에 널린 박스를 주워모아 그 위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아서 잤다.(그때 처음 인간은 앉아서도 잘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

아직 조사를 덜 마친 애들이 있었다. 한참 후에 조사를 다 마친 애들이 유치장으로 왔을 때, 형사 대신 그 애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고 다시 스스로 안에서 문을 잠구었다. 그 순간에 영화 투캅스가 갑자기 생각났다. 그 장면이 좀 웃겼다.

유치장에 가 보신 분 (?)은 아시겠지만, 세상에 별의별 놈의 다 경찰서에 잡혀 온다. 자기가 왜 잡혀 온지도 모르는 술취한 사람, 머리 아프다고 형사에게 사리돈!!! 사리돈 한알만!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밤새도록 "형사 아저씨! 사리돈~~~ 사리돈 한 알만 주세요! 제발! 사리돈~~~"을 외쳐댔다. 그소리를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두통이 생길 지경이다.)

유치장에 앉아서 얼마쯤 졸았을까. 모두 옆방으로 옮겨서 담요를 깔고 잤다. (그 더러운 담요가 어찌나 반갑던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되었다. 겨우 두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다. 어제 나를 취조했던 형사가 와서 모두 일어나서 한명씩 각서를 쓰고, 나오라고 했다.(그 각서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자세하게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다시는 집회나 시위 같은 거 안 하겠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각서에 손도장을 찍고, 나갔더니 이름표를 들고 내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앉아 있던 형사가 우리를 치켜보면서 말했다. "니네들 자꾸 그렇게 데모하면 나중에 졸업해도 면허증 못 딸 수가 있어. 컴퓨터로 조회만 하면 무슨 짓 했는지 다 나와. 앞으로 조심 해!"(하지만 나는 무사히 한의사 종이를 취득했다.)

같이 붙잡혀간 친구들과 함께 동대문 경찰서를 나왔다.
아침햇살이 정말 눈이 부셨다.

일단 경희대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같이 가던 학생이랑 조서 쓰던 이야기랑 유치장에서 자던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경희대 한의학관에 도착해보니, 선배와 후배들이 우리를 반겼다. 어찌나 반갑던지. 악수하는 손이 저절로 불끈...유치장에 들어가서 형사들 귀찮게 하고 밥 축내고 온 외에는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_- "고생했다"는 그 한마디가 왜 그리 찡하던지...그땐 어렸나보다..

강의실로 들어가서 반가운 얼굴들을 찾고, 차가운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내서 먹었다. 모두 옹기종기 모여서 간밤에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들을 서로 토의했다.

예과 1학년만 따로 밤샘조사한 지독한 형사이야기, 어느 경찰서에서는 빵도 주고 대접도 잘해주더라는 둥, 어디선 꽁보리밥에 단무지 3 개랑 멸치 3마리를 주었는데 도저히 못 먹겠더라는 둥...

그때 그 친구들 지금 다 잘 있을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던 이야기는, 어느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참 조서를 작성하다가 형사가
"야, 너희들 무슨 노래 불렀어?"
라고 묻자, 취조받은 학생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형사가 자기 혼자 막 타이핑하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오는 거센 파도에도~~~~ 이 노래 아냐? 맞지? 사실대로 말해. 다 알고 있어."라고 물었다고 한다.

내가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그 이튿날 우리 전국 한의대생들은 수업거부 찬반 투표를 실시했고, 압도적 지지로 우리는 수업거부를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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