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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실습 첫날 의국장의 발언:

"오늘이 학기 첫 실습날이죠? 뭐 저번 학기에 대충 다 보셨으니까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실테고,
오늘은 몇가지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교수님들이 복장상태를 아주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러니까 남자는 꼭 기지바지를 입도록 하고 면바지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구두도 랜드로바는 안되고요. 여자는 특히 치마를 꼭 입어야합니다. 바지입는 여학생들이 있는데 상당히 거슬립니다. 또 양말은 흰양말 신지 말고, 와이셔츠도 흰색으로 좀 입어주십시오."

어휴, 이거야 원.

본과 3학년이 되면 병원실습을 해야한다. 당시엔 실습이 3학점으로 매우 비중이 높았다.(다른 과목들은 거의 1학점. 우리는 학점당 2시간 수업을 들어야한다. 모두 17과목 정도를 배우므로 일주일에 약 34시간의 수업을 들어야만 한다. 월화수목금 꼬박 아침9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하루 7시간씩 들어야한다. 어떤 날은 저녁 6시가 넘어서까지 수업이 안 끝날때도 흔했다. 결론 : 한의대는 곧 고등학교였던 것이다.-_-;; 그럼, 난 고등학교만 10년 다닌거네...)

병원실습은 세가지로 나눌 수있다.

1.외래
외래는 교수님이 진료하시는 외래진료실에 내려가서 다소곳이 앉아서 구경하는 것.

2.병실
병실실습은 인턴을 한명 정해서 인턴 뒤를 졸졸졸 따라 다니면서 이것저것 해보는 것

3.의국강의
의국 강의실에 앉아서 레지던트들이 들어와서 하는 간단한 질환이나 액팅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이다.

외래, 의국, 병실 중에서 가장 점수를 많이 까먹는 곳이 외래실습이며, 가장 안락한 곳이 의국강의였던 것 같다.

실습생은 커피도 뽑아먹어서는 안되고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성거려도 눈총 받는다. 느긋하게 걸어서도 안되고, 잡담을 해서도 안된다. 특히 기다리는 시간이 많은데 벽에 기대면 정말 안된다.

또 동료나 선후배들끼리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한다. 아, 얼마나 어색한 호칭인가. 어제까지 야!하던 놈에게 '저, 김선생'이라고 해야하다니. -_-;;;; (나는 왠만하면 호칭을 아예 부르질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저기요...저...이거...)

힘들었던 점은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처음 실습을 나간 날은 유난히 더운 날이었는데, 첫날 외래에 걸렸었다..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외래냐고...재활의학과에 배정되었는데 결과적으로 3시간 반 동안 서 있어야만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재활의학과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간호사가 사무적으로 맞아주었다.
'저기 구석에 서 계세요' --;;;;

구석에 보니 처음 보는 웬 아리따운 여학생이 서 있다. 오잉? 오늘 재활 외래는 나 뿐인데. 누구지? 게다가 명찰까지 달고 있었다. 영어로 된 명찰. --;;;
목례만 하고 옆에 서 있는데, 교수님이 들어왔다. 공손하게 인사~! (점수 깍이면 안된다)

알고보니 내 옆에 있는 여학생은 보스턴 의대 본과 1학년 학생이었다. 재미교포였던 그녀가 한국 한방병원 실습을 받고 싶다고 하여 우리학교 병원장님 빽을 통해 실습에 들어오신 것이었다. 첫날 우연히 나랑 같은 과에 배정되었을 뿐이고.

그녀는 주머니에 청진기를 갖고 있었다. 아마 그 청진기는 실습 끝날때까지 한번도 써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날 외래진료실에서 한 것은 침서빙이었다. 침서빙이란 전문학술용어로서 침을 까서 넙죽 건네는 행위를 말함. 주로 인턴이나 실습생들이 하는 잡무에 속함.

교수님이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교수님이 환자에게 침을 놓으러 가면 따라 가서, 침봉다리 까서 침관 꺼내드리고, 침을 뽑기 좋도록 일렬로 꺼내드리는 것이다.
항상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교수님이 손 내밀면 잽싸게 침을 뽑기 좋게 대령하는 마당쇠. 그게 나의 모습이었지. 옆에서 보스턴의대 아가씨는 구경만 하고 우리학교 마당쇠는 열심히 침을 대령해 올렸다.

3시간의 반의 지루한 실습이 끝나고 우리는 무사히 외래를 탈출하였다.
보스턴의대 아가씨와 걸어가면서 미국의대와 한국한의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정보를 나누었다. 대체적으로 그녀는 한국의 한방병원에 대해 조금 실망하는 듯 보였다.

실습생은 집에 가기 전에 종례를 한다.(고등학교에서 하는 거랑 비슷한거다.) 우리도 종례를 하러가기 위해 6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순간 으악!!!!!!
그녀는 태연하게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내려오길 기다렸다.

(우리나라 병원처럼 권위주의가 판치는 원시시대 병원에서 실습생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인턴도 처음몇달동안은 타면 안되는 엘리베이터를 보스턴의대 아가씨가 지금 막 타려고 하는 것이다. 이걸 말려야하나...-_-;;)

띵 소리와 함께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나는 약 3초 정도 고민했다. 그냥 걸어서 6층 올라갈까? 아니면 같이 타고 갈까? 으, 타다가 걸리면 죽는데. 그렇다고 쪽팔리게시리 '저 걸어갈께요...'라고 할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6층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는데 맙소사 의국장이 서 있는 것이다.
정말 재수도 없지. ㅠ.ㅠ

의국장은 나를 쏘아보며
"엘리베이터 타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죄송합니다."(아, 쪽팔린다. 보스턴의대 앞에서 이게 뭔 망신이냐.)

근데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니까 화났다. 왜 같은 실습생인 보스턴의대도 같이 탔는데 왜 나만 욕먹어야 하냐.
답은 간단하다.
보스턴의대는 병원장 빽으로 들어오신 몸이라 아무리 의국장이라해도 건드릴 수 없다. (역시 가방은 좋은 걸 가져야한다. 우울하다.)


실습에서 느낀 점은 좀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이었고, 아, 이제 정말 졸업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팍팍 들었다.
그리고 가방은 좋은 걸 가져야 인간대접받고 살수 있다는 것도 느꼈고, 병원이라는 조직은 군대와 흡사하다는 것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추억이 돼버린 병원실습...보스턴의대도 지금쯤은 졸업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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