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정의 기원

Essays 2021. 8. 12.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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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칠정은 플랜B에서 온다.

금메달을 따고 통곡하는 선수, 금메달을 못 따고 통곡하는 선수는 있지만 세계랭킹 78위의 마라토너가 80위로 골인한뒤 통곡하는 것을 본적은 없을 것이다.

리우올림픽 육상 200m 결승, 우사인볼트는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다. 앙드레 드 그라스가 따라붙자 마치 초등학생 아들을 약올리듯 속도조절하다가 끝내 이겨버리는 아빠의 모습으로 금메달을 가져갔다. 플랜A.

트랙을 어슬렁거리던 볼트는 마치 동네헬스장을 나서다가 팬무리를 발견한것처럼 관중석을 향해 씩 웃어보이며 손을 흔들어줬다. 울지도 않았다. 플랜A는 당연한것. 월급 300만원 받기로 했는데 말일에 300만원 찍혀있는 것!. 볼트는 월급을 받아가는 사람처럼 금메달을 '수거'해갔다.

 

"할머니 왜 밥을 못 잡숫니껴?"

"아, 그게.... 세달전에 우리 며늘아가 죽었는데"

"와요?"

"암으로 죽었지."

"몇살인데요?"

"인자 오십 넘었지."

"아"

"근데 통장에 돈이 30만원 들어와갖고 보이,그게 우리 메늘이 죽기 직전에 보낸거더라고. 어버이날... "

 

확률이 낮아지는 플랜C,D,E,F로 내려가면 갈수록 칠정은 크게 올라온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때 아버지가 다이너스티를 타셨어요. 우리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대형차였죠. 새차 산지 1년만에 아버지가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남은 다이너스티를 운전할 사람이 없어서 1년동안 모셔놓다가 어머니가 결국 파셨어요. 한 2년 뒤에 고속도로에서 우연히 그 차를 봤는데 보자마자 눈물이 나더라구요. 멀리서도 아버지 차라는 게 느낌이 왔어요."

고속도로에서 아버지가 타던 차를 발견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플랜 F 쯤?

 

 

누구나 머릿속에는 늘 플랜A로 가득하다.

삼성전자 8만원에 사면서 5만원갈거라고 매수하는 사람 없고, 아파트살 때 이제부터 내려간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 없다.  펜션 수영장에서 "아, 난 10초 뒤에 머리박고 경추 부러져서 사지마비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다이빙하는 사람은 없다. 플랜B는 서프라이즈하게 찾아온다.

 

사람들 머리속엔 -특히 젊을수록- 장미빛 플랜A로 가득하지만.... 실제 인생의 현실은 너덜너덜한 플랜B로 가득하다.

GT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차가 있다. 왜 자식들에게 이태리 GT를 시켰을까? 그 당시에는 이태리는 아직 국가로서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변방의 폐허더미였는데. 쓸데없이 큰 산맥을 오르며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건 뭘까? 춥고 배고픈데 산은 또 왜 기어오르냐.

좌절의 역사, 실패의 역사. 폐허에서 느끼는 플랜B의 역사를 보며 '좌절의 학습'을 하는 것이다. 특히 태어나서 한번도 좌절을 겪어본 적이 없는 도련님들. 집 떠나면 그 순간부터 고생이다. 여행은 플랜B의 결정체다. 배낭여행가는 것, 군대가서 철들어서 돌아오는 것도 다 그랜드 투어의 현대판 변형이다. 좌절의 학습. "아,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세상이라는게 내 머릿속 생각과 다른 곳이구나."

자식이 스무살이 되기전에 꼭 -작게나마- 좌절을 겪게 하고 플랜B의 상황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를 스스로 익히게 해서 연습문제를 몇번 풀고난 뒤에 둥지를 내보내야 실제로 플랜B로 가득한 인생의 쓰레기 더미를 헤쳐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플랜B를 만나면 칠정이 올라온다. 갑작스러울수록 강하게 올라온다.

인생은 비행기를 몰고 가다가 엔진이 하나 갑자기 꺼져서 회항하려는데 랜딩기어까지 고장나는 일(내가 해결하기 힘든 일)로 가득하다. 부딪치고 수정하고 반복이다. 칠정은 불가피하다.

칠정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다. 나의 플랜A와 현실의 B 사이에서 갭이 생기면서 태풍처럼 생겨나서 나를 훑고 지나가는 것이다. 잠시 내 몸에 경유했다가 사라진다. 태풍이다. 여자친구와 호텔에서 놀면서 좋았던 기분, 선배한테 혼나서 나쁜 기분, 직원이 말 안들었을때의 화나는 기분, 지나고나면 다 태풍처럼 지나가고 사라진다. 감정이 몸뚱이에 휘몰아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휘둘리지만 결국에는 내 몸의 주인은 나지. 칠정이 아니다. 내 몸뚱이의 주도권을 칠정에 휘둘려선 안된다. 격분해서 칼로 사람 찔러 죽이면 안된다.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오면 "어, 왔니?"하고 반겨주고 어이구 왔구나. 태풍인가? 작은 바람인가? 느껴보고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배설해줘라. 감정은 배설해야할 똥찌거기 같은 거다. 언젠가는 내 몸에서 내보내야하고 하등 쓸모가 없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의 고요함. 칠정의 부존재.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건강의 모습이다.

 

현실은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 뭐든지 벌어진 일은 받아들여라. 인간에게 그런걸 거역할 능력은 없다. 그런건 주어지는 거지. 군대에서 받는 급식판처럼 나에게 선택권이란 없다. 안 받아들이고 버틸수록 나만 손해다. 급식이 나왔으면 먹어라. 억울하고 못 받아들이겟더라도 그냥 먹어라. 그게 네 밥이야.

 

칠정, 즉 스트레스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밖에서 어떤 원인이나 사건 이벤트로 생겨서 나에게 들어오는게 아니다. 나의 내부 기준이 외부 사건과 갭이 생길때 나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자생적 감정태풍이 칠정이다. 내가 만들고 내가 고통받는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고 판단을 그르치기도 하고 일을 망치기도 한다.

자신의 실수와 약점, 실패를 마주하는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패배를 인정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받아들이는데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 실수, 현재 나의 신세를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용서를 구하라. 스스로의 변호인이 되어 내가 잘못한만큼의 죄값만 치르고 변명할 것은 변명하고 잘못한 점은 인정하라. 인생에는 후진기어가 없다. 그래서 백미러를 볼 필요도 시간도 없다.

 

불필요한 것에 에너지를 쓰지마라. 칠정 따위에 에너지를 투입하지말라. 힘들어하지도 마라.

어? 왔니? 적당히 머물다가 빨리 나가라.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고 좌절감이 드는 일이 있어도 그런 감정이 내 몸에 10년을 머물러 있겟냐? 5년을 머물러 있겠냐?

생각보다 빨리 사라지고 없다.

 

극복.

학교다닐때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고 역경을 극복해내는 것을 주로 배운다. 하지만 어디 그렇냐? 태풍에 떠내려가는 돛단배처럼 여기저기 떠밀려다니다가 어느새 나이 먹고 늙어죽는다.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네가 감독이 아니야. 작가도 아니야. 거기는 신의 영역이니까. 어떤 환경에서 어떤 가정에서 어떻게 태어나서 누구에게 교육받고 자랄지 이미 이 인생이라는 영화의 전반부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쓰여진다. 중반부부터 내가 연기자로 투입되지만 실제로 나의 주도권은 미미하다. 현장에서 약간의 연출만 가능할뿐 메인스토리는 이미 정해져있다. 하루하루 주어진 씬에서 연기를 충실히 하면 된다. 내일 대본? 그런거 없다. 내일 죽는 씬이 있으면 죽는거고. 오늘 하루 쪽대본에 충실하게 연기하면 된다.

우리는 인생의 연기자일뿐,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다. 나의 주어진 역할에 연기자로서 얼마나 충실한가.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나의 배역은 무엇인가?

본인 배역이 맘에 안 드나? 거기에서 칠정이 꿈틀거린다. 맘에 안 드는 배역이라도 주어진 역은 받아들여야한다. 그것이 쪽대본 연기자의 숙명.

인간의 힘은 유한하며 인간의 능력으로 안되는 일은 너무도 많다.

사건을 해석하려하지마라. 지금 아주 안 좋은 이벤트가 나의 인생에서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게 나중에 얼마나 큰 호재의 모티브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복선일지도 모른다. 새옹지마. 우리는 감독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 스토리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이 고통스러운 사건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다. 송영호의 뇌물사건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키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한 씬에 충실한 연기자일뿐.

너는 네 인생의 감독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니다. 해석하려고 하지마라. 인과관계를 분석하지마라. 그건 제작자 감독의 영역이다. 신의 영역이다. 인간이 컨트롤할 수 없는 수 없는 인연과 우연이 겹쳐서 사건이 일어나고 플롯이 진행된다. 연기자는 그런거 관심 갖지마라. 네 영화 스토리가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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