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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동할배에게는 아들이 셋 있다. 그 중 큰 아들이 양주를 한병 사왔다.

"나는 이거 안 묵는다. 옆집 갖다 줘라. 나는 소주만 묵는다."

"아이고 이 좋은거를 와 안 묵능교? 소주 말고 이거 잡수소."

"어허이. 어디. 빨랑 소주 안 받아오나?"

할배와 할매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권력투쟁을 하고 있다. 왜 할배는 할매를 상대로 권력투쟁을 하고 있는가? 그가 결투를 신청할 사람이 이 세상에 할매 한명밖에 안 남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할배는 방앗간을 오래했다. 직원도 여럿 두었고, 돈도 쏠쏠하게 만졌다. 시골에서 방앗간은 기간산업이면서 독점기업이기 때문에 돈을 벌고싶지 않아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방앗간으로 벌어들은 재산을 무지개송어양식장에 투자했다가 홀랑 날려먹었다. 할배 나이 73세. 이제 재기할 수도 없다. 애들은 겨우 출가시켰고, 이제 남은거라고는 20평짜리 농가주택과 병든 할매, 그리고 10년된 늙은 개 한마리 뿐이다.

개와 투쟁해서 권력을 쟁취한다한들(확률은 100%이지만)_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래도 할매라도 링에 올려서 때려눕혀야지. 가뭄에 말라죽어 버석버석 소리가 나는, 바람만 불어도 부서질 것 같은 나무를 상대로 강펀치를 날리는 사람은 없잖나. 그게 무슨 재민겨.

"엄마 나 그거 아니면 안 입는다니까."

옆집 기훈이는 아디다스 롱패딩을 기어이 사입겠다고 한다. 너무 커서 패딩 끝자락이 발등까지 내려온다.

"니 그거 입고 우째 걸어댕길래? 엄마가 골라주는거 입어."

이 집도 권력투쟁 중이다.

기훈이. 이 친구도 역시 자기가 링에 올릴만한 상대는 이 세상에 엄마와 동생 뿐이다. 아빠는 한판 붙자고 했다가는 바로 나가떨어질 거 같아서 결투신청을 할 수가 없다. 키 작고 못 생겼는데 체구도 작고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선 존재감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다. 아마 이대로 쭉 자란다면 대학도 못 가고 직업도 제대로 못 찾고 스스로 무능을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춘기란 나이만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자존감을 채우려는 욕구는 높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때, (학술용어로 이런 상태의 인간형을 '쩌리'라고 부른다.) 나이가 15세이건 85세이건간에 상관없다. 쩌리들은 늘 만만한 상대를 찾아 '권력투쟁'에 나선다. 그들은 절대로 경찰서장이나 국회의원, 삼성그룹 회장님을 상대로 시비를 걸지 않는다. 심지어 시골 군의원에게 조차도 움찔한다. 쩌리일수록 (경험적으로) 그런 계산에 능하다. 슬픈 일이다. 누군가로부터 결투신청이 들어오면 일단 그 상대가 '쩌리'인지 아닌지부터 파악해보고 특급A급 쩌리라면 적당히 싸움을 받아주고 적당한 타이밍에 져주어라. 상대도 숨통이 트여야지. 오죽 스파링 상대가 없으면 그러겠는가.

할매는 오늘도 소주를 사러 간다. 엄마는 아디다스 매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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