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나 한의대에는 학생들 사이에 오티O.T.(Oientation의 약자)라는 것이 있다.
다음 학년에 배울 것을 아래학년 방학때 선배들로부터 약간 맛뵈기로 배우는 행위를 총칭해서 오티라고 하는데 그 실효성에는 의문이 많다.

한의대일 경우, 주로 해부학이나 본초학, 경혈학같은 과목을 갖고 오티를 하는데, 이들 과목들은 워낙 분량이 많고, 농땡이 부렸다가는 1년 유급당하는 수가 있고 워낙 기초라 미리 한번 봐두는 게 좋기 때문에 많이들 하는 과목이다.

해부학(골학만 배운다)은 뼈다귀를 갖다놓고 책보고 죽어라 암기를 한다. 먼놈의 뼈는 이렇게 많고 무슨 뼈다구에 이렇게 많은 이름들이 붙어 있냐!!

본초학 같은 경우는 실제 한의원에서 쓰는 약물과 사진 등을 응용하여 교과서를 한번 쭉 훑는다.
경혈학은 온몸에 직접 매직으로 혈자리를 찍찍 그어가면서 경혈을 외운다. 세과목 중에 제일 지저분하고 몸이 혹사당한다. -_-;;;

아직도 이런 짧은 O.T.가 실제로 학습에 도움이 되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선배들 말로는 나중에 다시 배우면 되살아난다고 한다. (필자가 경험해본 바로 오티라는 것이 그 육체적 정신적 투자에 비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별로 크지 않는듯하지만..."내가 한번 읽었다!!"라는 심리적 안정감 역시 무시할 수 없으므로 나름대로 의미는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1995년 겨울, 불국사 앞 모여관에서 2박4일(박이 하나 모자람에 주목!)동안 실시된 본초학 오티를 대상으로 작성되었다.

본초학 오티는 여관에서 이루어졌는데, 참으로 인상깊은 경험이었다.

오티받는 동안 날짜감각이 사라져버렸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겠고 오직 식당과 여관방만을 오가며 외우고 또 외우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잠은 보통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잤다.

O.T.를 받는데는 딱 두가지 쾌락만이 있다. 하나는 식사시간이고 또 하나는 잠자리에 누울 때다. 먹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필요없고, 늦은 새벽에 몸을 이불에 잠시 누이면 세상에 그보다 더한 편안함이 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단순암기로 인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보다는 하루종일 앉아있음으로해써 생기는 허리통증의 육체적인 고통이 더 힘들었다.(허리가 깁니다..-_-)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허리가 정말 뻐근했고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임산부처럼 뒤뚱뒤뚱 걸어야 했다. 거기다가 선배들로 부터 받은 벌칙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온 몸에 알이 배겨버렸다. 스트레스와 긴장 때문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비에 걸려버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짓을 왜 했나싶다.

수면욕구가 식욕보다 우선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실제로 아침에 밥먹으라고 깨우면 무슨핑계를 대서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으니까.

O.T.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우리보다 한 학년이나 두학년 위의 선배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강사'라는 호칭으로 불리운다. 쥐뿔도 모르는 그들에게는 과분한 호칭이다!

하지만 강사의 권력은 학생보다 막강하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자.

O.T.마다 빠지지 않는 메뉴가 있는데 '맞고도리'라는 것이 있다. 보통 고스톱처럼 보이지만 한가지 다른 특징이 있다. 후배는 선배쪽으로 자기패를 까보이게 들고 쳐야하는 것이다. 후배는 자기패를 볼 수도 없다. 선배는 지가 할 수 있는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며 친다.(심지어는 미리 쌍피만 다 빼서 자기패로 넣는 악랄한 경우도 있다.)

학생은 강사를 상대로 맞고도리를 쳐서 이기면 잠잘수 있지만 못 이기면 벌칙을 또 받아야한다. 그나마 이기면 재워준다는 건 사기에 가깝다. 어쩌다 몇년에 한번씩 후배가 이기는 기적도 생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잠을 잘 순 없다.

가혹행위라는 비판이 있지만 이런 벌칙들이 지루하고 딱딱한 O.T.를 부드럽게 하고 선후배간의 정을 쌓기위한 수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맞고도리라는 게 해보면 정말 재밌긴 재밌다.

본초 오티 사흘째되던 날, 서울에서 본과 3학년 선배가 내려왔다. 일년만에 보는 지라 매우 반가웠다. 그 선배가 말했다. 자기는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라 같이 공부하려고 왔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말이 맞다. 도대체 누가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O.T.는 어쩌면 짬밥의 전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여튼 선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은 있다.

O.T.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날 밤의 총오랄 테스트Oral Test(말로 때우는 시험)이다.

물론 밤을 꼴딱 지샌다. 강사선배들은 방 하나를 잡아서 진을 치고 온갖 모략으로 기발한 벌칙들을 만들어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한다.

후배들이 선배방에 한명씩 들어가서 시험을 보고 벌칙을 받는 것이다. 물론 테스트를 어떤식으로 몇번 통과하면 잠 재워준다고 하지만 그건 모두 새빨간 공갈일 뿐!!

그러니 미리 잠잔다는 생각 자체를 갖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하다. 필자 역시 들어가서 온갖 재롱을 떨어야만 했다.ㅠ.ㅠ 내가 이렇게 망가지다니...자신의 다른 면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나쁜 경험만은 아니다.

필자가 받은 총오랄 테스트 벌칙결과, 내 다리의 털을 20여개 뽑혔고, 노래를 불렀고, 야리꾸리한 P.T.체조도 했다. 또 아까 언급한 그 '맞고도리'를 했고(물론 졌다.), 머리에 상당량의 무스가 발라지기도 했다.(-_-;;; 무스 바르는 거 열라 싫어함.)

벌칙 중의 압권. 만화책 연기도 했다. 만화책연기란 선배가 빌려다 본 무협 순정만화책의 어느 부분을 던져주고 그부분을 실감나게 연기하라는 것인데, 대부분의 장면이 연기하기에 상당한 수준이 요구되는 부분들이다. 무협은 그나마 낫지만 순정은 정말 죽음이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같은 벌칙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새벽에 파출소가서 순경아저씨 사인 받아오기.

오티를 짜증으로 받아들이든지, 스스로 즐기든지 그것은 스스로에게 달렸다. 인간은 적절한 수준의 고통까지는 스스로 즐길수 있다.


벌칙으로 고통받던 마지막날 밤이 지나고 새벽 여섯시가 되자, 선배들과 여관을 나와 토함산에 올랐다. 밤샘으로 몸은 이미 늘어졌고 정신은 몽롱했지만 오로지 석굴암에서 일출을 한번 보고 싶다는 충동 하나에 의지하여 산을 올랐다.

여관주인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시간에 맞춰서 모두 세명이 떠났다.(나머지는 포기) 조금 빨리 걸었는데, 중간쯤 오르자 숨이 헐떡헐떡.... 파카를 입었는데 땀이 이마에 쪼르르..... 머리에 흐르던 땀은 얼어버리고, 다리는 후들후들 휘청거리고 귀는 멍멍하지...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나 고민하면서 30분쯤 걷고 난 후 석굴암입구에 다다랐다.

기껏 올라갔더니 거기까지 차 타고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_-;;;; 우리는 해뜨는 경을 지켜보려고 바람이 윙윙 올라오는 석굴암 앞에 서서 오들오들 떨며 몇십분을 기다렸다.

날이 서서히 밝고 얼마 안 있어 해가 구름사이로 뽀록~ 올라왔다. 그 뒤로 불그스름하게 염색되는 구름.........아름다웠고 일출과 함께 그해 겨울 O.T.도 그렇게 끝났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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