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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지난번보다 감동은 덜하지만, 생각은 깊어졌다.

 

사람의 인생사 어떤 것이든 그 과정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미안한 것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에피소드들은 모두 입김처럼 사라지고, 아름다운 추억만 남는다.

열살 때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도동 젯만다를 넘어서 걸어서 할배집까지 돌아갔을 때, 발가락은 동상걸릴 정도로 추웠지만,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즐거웠던 기억, 설경이 아름다웠던 기억 뿐이다. 과거는 모두 아름답게 변한다. 인간의 뇌에 이런 장치가 없다면 모두 미쳐버렸을 것이다.

 

나는 먼 훗날 누구에게 어떤 점을 미안해할까? 그리고 그걸 왜 지금은 느낄 수 없을까? 미래의 미안함을 지금 가져올 수 있다면....

 

 

줄타기

 

필례로 나오는 아줌마. 권혜영은 탁월하다. 대학로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여배우. 이 분의 대사 중에도 결국 마지막에는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정작 더 미안해야할 사람은 봉식인데도 불구하고! 지난번에 보이지 않던 권혜영의 절제가 보였다. 아, 연기라는게 오열하고 절규하는 게 잘하는 게 아니구나. 이는 딸 역할로 나온 배우를 보면서도 느껴졌다.

병원도 마찬가지거든. 친절과 카리스마 사이에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자상함과 비굴함은 한끗 차이다.

너무 빨리 나은 환자는 자신의 병을 우습게 여기고, 너무 오래 안 낫는 환자는 그 병원을 불신한다.

이 세상만사 모든 게 줄타기다.

원장이 너무 잘 생기면 부담스럽고 실력이 떨어져보이고, 너무 너무 못생기면 보기가 싫다.

키가 너무 커도 안돼. 작아도 안돼.

침이 전혀 안 아프면 치료받는 기분이 안 들고, 너무 아프면 그 한의원에 가기가 공포스러워진다.

약값이 너무 싸면 중국산이 아닐까 의심이 들고, 너무 비싸면 돈독 오른 원장처럼 보인다.

연극도 너무 가벼우면 개콘이 돼버리고, 너무 감동만 쥐어짜면 신파가 돼버린다.

적절한 선을 잘 유지하는 게 참 어렵다.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로 착각한다는 것도 이런 이야기.

 

 

 

 

거슬림이 없어야 한다.

 

이 연극에서 중요한 것 하나.

나는 돈을 내고 소극장에 들어가고, 배우는 어찌됐건 돈을 받고 공연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매카니즘이 작용한다. 이건 연극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행위에 전부 적용된다.

 

거슬림...

 

딸로 나온 경미님은 탁월한 배우였다. 하지만 나는 30대중반처럼 보이는 사려깊게 보이는 여자가 자폐아를 선택하는 것보다 20대로 보이는 조영임이 철없을 때 자폐아를 선택하는 정황이 더 '거슬림'이 없었다.

눈에 걸리면 이미 망하기 시작한거다.

딸로 나왔는데 엄마와 나란히 앉았을 때 자매처럼 보이면 이미 관객 눈에 걸린 거다.

 

환자도 마찬가지다. 박사님의 인테리어 철학이 마이너스 인테리어이다. 빼야한다. 진료에 연관되는 것 외의 모든 소품, 장치를 모두 병원 밖으로 내다버려야한다. 그게 인테리어다. 그게 돈받고 진료하는 자의 사명이다.

 

특히 신환들은 병원을 스크린한다. 그리고 눈에 걸리면 호감도는 급감한다. 대기실 바닥에 먼지가 덩어리로 굴러다닌다고 치면, 대부분의 신환의 눈에 걸릴 것이고, 약 달이는 조제실에는 더 지저분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원장이 할 일은 뭐냐면...

 

고객환자의 눈을 이식받아서 스스로 병원을 돌아보고 눈에 걸리는 게 없는지 살피는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원의 오너들은 이미 환자보다는 원장의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이는 개원연차가 오래되면 될수록 더 심해짐) 봐도 안 보인다. 눈뜬 장님이란 이런 경우를 말함이다.

 

예전에 순호가 우리 한의원 놀러왔을 때 계단에 불이 꺼져있고 어둡더라는 조언을 했었다. 그때 나는 왜 조명을 바꿀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미 내 눈은 원장의 눈까리로 돼 있었던 것.

 

그리고 정확히 2년 후 우리 한의원에 불이나고 그 비슷한 시기에 순호가 치과를 오픈했을 때, 나는 순호네 치과에 방문했었다. 그리고 현무암으로 도배되어있는 내부를 보고 천정 라인을 따라 할로겐으로 도배하라는 조언을 했다. 다시 낸 눈까리가 고객의 눈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무튼...당신만이 라는 연극은 권혜영이라는 탁월한 배우가 있어 더욱 훌륭했고, 적절한 감동과 적당한 상업성이 귀에 익은 가요에 잘 버무려짐으로써 롱런할 수 밖에 없는 요소를 갖고 있다. 강추!

 

내가 느낀 점은. 세가지...

 

1. 미래에 닥칠 미안함을 미리 생각해보자.

2. 줄타기를 잘하자

3. 고객의 눈을 낑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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