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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11월 26일 칠곡군 기산면보건지소 한방진료실에서 장난으로 시작됐던 bk툰이 마침내 2013년 3월 1일 종지부를 찍었다. 그동안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bk툰을 제작해오던 김씨는 대화재 당시 모금이 협회 통신망에서 거론되는 것을 보고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씨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돌이켜보면 한의사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며 웃음을 주던 bk툰의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한의계 정화운동의 선봉에 서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대화재사건 모금 이후 bk툰은 더욱 공익적인 매체로 변모했고, 그동안 한의계에 해악을 끼치는 원장들과 돌팔이 추종자들을 공격하면서 많은 이름없는 원장들로부터 격려와 성원을 받게 된다. 2010년 즈음부터 bk툰은 기존의 웹툰이 아니라 많은 한의사들의 지지와 기대를 받고 한의계에서 바른 목소리를 내는 대안언론으로 자리잡았고, 영향력이 커짐과 동시에 견제와 공격도 받기 시작했다. 공격이 가장 극점에 다다랐던 시기는 김여사칼럼 논란이었다. 돌팔이추종자들을 공격하던 bk툰이 칼럼 역공으로 무너진 것. 원래 일처리가 깔끔한 bk박사님은 모든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 당시 bk박사는 "참실련 같은 외부운동이나 제도혁신도 중요하지만, 한의계 내면의 학술적 역량을 다지는 일도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 전자는 할 사람이 많지만, 후자는 할 사람이 드물다. 나는 후자가 되겠다"며 일체 외부활동을 하지 않고 학술분야에만 매진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bk박사가 박차를 가하던 테마는 동의보감과 동의수세보원을 연결하는 작업이었다.(현재 후세방과 사상방은 남한 북한처럼 전혀 다른 개념처럼 비쳐지고 있다.)

 

그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2012년 초여름 당시 참실련 회장을 맡고 있던 이진욱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바로 그 전화 한 통으로 bk툰은 다시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다. 참실련으로부터 천연물신약 카툰을 그려달라는 제의를 받은 것. 당시만해도 한의사 사회에서 천연물신약에 대한 인식이 크지 않앗다. 너무 문제가 복잡했고, 온통 알아볼 수 없는 자료들로 가득했다.

천연물신약 사안의 급박성과 화재모금 건으로 부채의식이 남아있던 bk박사는 다시 펜을 든다.(bk툰이 참실련 소식지에 실리면서 bk박사가 참실련 소속이라는 루머가 퍼졌으나 전혀 사실무근이다. bk와 참실련은 전혀 상관없다.) 그 이후 그려진 천연물신약 관련 시리즈카툰은 2012년 여름 전 한의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bk툰은 기성 종이신문들을 모두 제치고 한의계 내 여론을 주도하는 핵심 언론으로 급부상하게 됐다. bk툰이 매일매일 올라올 때마다 회원들의 지지와 환호는 커져갔고, 카툰에서 다룬 아이템과 주제는 급속히 전파되어 모든 한의사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bk툰이 주로 비판했던 협회 집행부는 천연물신약 투쟁에 소극적이었으며, 그들의 입지는 bk툰이 밑바닥 회원들의 지지층을 넓혀가고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것에 반비례하여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제 bk툰은 개인의 웹툰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권력에 대항하는 한의계의 대표 언론으로서의 위치를 다져나가던 시기였다.(bk툰에 실린 내용은 직접 조사하고 취재한 것 외에도 각계각층의 한의사 회원들이 보내준 쪽지, 사진, 제보메일 등으로 제작되었다.)

 

마침내 10월 26일, 협회 집행부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건정심에서 첩약의보를 받아들고 나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직접 건정심 서류를 읽어본 bk박사는 '한조시 약사들의 참여'를 간파하고 카툰으로 보도했다. 훗날 협회장도 인정했듯이 약사의 참여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최단시일 내에 간파하여 한의계 내에 전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우발적이었지만 거스를 수 없는 큰 파도. 바로 평회원들의 쟈스민 혁명. 2012년 11월 1일, 기념일로 삼아도 될만큼 강렬했던 사상 초유의 한의계 혁신운동. 그 한가운데 bk툰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고, 이후 비대위의 광고작업까지 참여하면서부터 bk박사의 한의계를 향한 기여와 헌신은 점점 커져갔다. 그와 동시에 수세에 몰린 기득권층을 지지하는 무리들의 역공도 다시 시작됐다. 그들은 모원장이 빼내준 비대위 관련 정보를 잘못 해석하여 bk툰을 점거사태의 배후로 지목하고 음해론을 올렸고, 훗날 거짓으로 밝혀졌다. 음해한 것을 사과하라는 bk와 잘못은 알지만 사과하지 못하겠다는 측의 지리한 논쟁으로 이어지다 결국 화재 모금이야기까지 번진다.

 

"bk 어려울 때 돈 모아줬는데 bk가 우리한테 이럴 수 있냐?"

 

이에 대해 bk는 돈 돌려줄테니깐 계좌번호 불러라는 응답을 보냈다. 개인 bk에게 보낸 사적인 성의와 격려였던 화재사건 모금을 다시 들추어내어, 공적인 bk툰을 비판하고 제어하려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것. (다시 화재 당시로 돌아가 먼훗날 bk툰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담겨 있었다면, 그 어떤 돈도 그때 받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어찌됐건 내가 그들의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앞으로도 계속 말이 나올 수 있고 그 일이 입에 오르내릴 수 있으므로, 여기서 접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결국 돌이켜보자면 화재사건 당시 한의사들 수백여명이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그 돈은 bk툰을 더욱 공익적으로 변모시킨 중요 변곡점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bk툰이 마감하게 된 가장 큰 방아쇠도 된 셈이다.

 

 

 

어쩌다가 이 똥밭에 들어와서 이런 고생을 하는지...후후.  세상 만물은(사람까지 포함해서) 다 쓰임이 있는 때가 있다. 그 때가 지나면 삼베바지 방귀 빠지듯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순리다. 지금 bk툰에게 바로 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작년 이진욱의 카툰부탁을 거절했더라면 bk박사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행복한 2012년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20대부터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bk박사는 한의대에 입학한 이후 늘 마이너의 삶, 헝그리정신으로 살아왔다. 그 흔한 민중의료 동아리, 의료봉사 동아리, 학보사 동아리, 학생회에 일체 가입하지 않았다. 그런 곳에 가입하지 않고도 혼자서 얼마든지 훌륭한 성취를 이뤘다. bk박사님은 늘 독고다이였다. (bk박사가 참실련에 가입할거라고 생각하나? ㅎㅎㅎㅎ 박사님 모토는 늘 독고다이다. 그것은 스무살때부터의 곤조였다. 그는 늘 혼자 조용히 움직이며 혼자서도 일사불란한 비밀조직처럼 엄청난 일을 해냈다. 박사님을 참실련이나 비대위 같은 단체와 연결지어 엮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가소로운지 그가 지나온 발자취를 보면 알 수 있다.)

 

 

1. 97년도에 연재하기 시작한 사시미하루소식은 전국한의대 최초의 웹진학보였다. 한국에 인터넷이 소개된 것이 94년도였다.

 

2. 96년 한약분쟁이 종료되고 친구들이 귀향하여 과외로 돈을 벌때 박사님은 학생회 문서창고에 두달간 틀어박혀서 '민족의학바로읽기'라는 책을 만들어냈다. 당시 전한련에서 만든 자료집이라고는 '참의료새날열기'인가? 약칭으로 참새라고 있었다. 온갖 비문으로 가득하고 내용도 엉망인(마치 아랍어도 쓰여진듯한) 3권짜리 두꺼운 책자로 이걸로 투쟁교육자료로 쓰고 있었다. 그 책을 접하고 박사님은 본인이 직접 구한말부터 한약분쟁까지 역사책을 새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나온 민족의학바로읽기는 90년대 후반 한의대 신입생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3. 한의대를 졸업하면서 만든 hanidae.com이라는 사이트 역시 충격이 대단했다. 당시 오르비나 입시관련 사이트가 전무하던 시절에, 최초로 한의대 재학생이 수험생에게 직접 정보를 전달하는 사이트를 개설한 것이다. 아울러 각 한의대의 교육환경에 대한 평가로 같이 이루어졌다. 이 사이트는 전국에서 한의대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엄청난 정보를 제공했다.

 

4. 공보의 시절 만든 '개원가이드북'은 지금까지 나온 개원관련 책자 중에 가장 독보적이다. (공보의 시절 만든 책자 중에 한의사가 알아야할 진료의 모든 테크닉, 술기, 임상치료 지침 등에 대해 정리한 책자도 있었다. 워싱턴메뉴얼 같은 책을 만들어보자는 각오로 '한의사를 위한 임상가이드북'을 최종편집까지 마쳤으나 끝내 공개하지는 않았다. 임상연차가 짧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5. 아직 미완이지만 임상가를 위한 학술적 연구 역시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다. 세계최초로 사상의학과 동의보감을 연결해서 정리하는 작업은 이제마 사후 100년간 한치도 전진하지 못했던 체질의학 연구에서 주목할만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6. 최근 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강의도 한의대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면 bk박사는 얼마든지 어디든지 간다. 최근 그가 보여준 동의보감 입문강좌는 기존의 한의대 강의풍토에 큰 쇼크를 안겼다.(bk박사의 동의보감 강의를 듣고난 이후 학교 수업을 듣기 싫어졌다는 부작용을 호소하는 학생도 있다.) 알다시피 bk박사는 복잡한 이론에서 핵심만 추출해서 통찰력 있게 강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앞으로 50세, 60세가 된 bk박사가 어떤 강의를 선보일 지 기대해도 좋다.

 

6. bk툰이 지난 9년간 한의계에 남긴 업적과 성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2012년 천연물신약을 이슈화시키고, 첩약바우처를 분석하고, 11월 1일 대규모 집회, 직선제 쟁취에 이르기까지 모래알같은 평회원들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었고, 나치하 레지스탕스 라디오방송처럼 매일매일 한의사들은 bk툰을 기다렸다. bk툰은 랜턴이 되어 평한의사들의 눈을 밝혀주었고, 확성기가 되어 그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 모든 일을 단 한 사람이 이루어냈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가 한의대를 입학하고, 졸업하고 공보의를 다니면서, 또 개원하면서.... 대부분의 한의사들이 밟아가는 그 단계마다 그는 낭중지추라는 말이 절로 나올만큼 남달랐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한의계에 큰 발자국들을 남겼다. 후배들은 그의 어깨를 밟고 올라섰다.

그는 창조적인면서도 성실한 삶의 궤적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는 명예욕심이 없었다. 책 몇권 읽고 폼잡는 같잖은 선민의식을 조롱하며 패거리문화를 경멸했다. 그는 늘 일이 되도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완수되었을 때, 절정의 순간마다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화재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bk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고, 하니대닷컴을 만든 사람인것조차 몰랐다. 하니대닷컴이 가장 절정기를 구가할 때는 그는 미련없이 후배에게 넘겨주고 숨었다. 그는 모든 감투와 영입제안을 거절했다. 영원한 독고다이. 그게 bk의 철학이다.

 

사실 bk툰은 그가 남긴 업적 중의 극히 일부일 뿐이며, 최근에 일어난 김여사칼럼 논란이나 전략팀음해글 소동 역시 가소로운 것이다. 박사님 개인적으로 훨씬 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정리해야할 것도 많은데, 아까운 시간을 들여 수많았던 "절필 소동"에도 불구하고 매번 다시 돌아와 bk툰을 꾸역꾸역 이어간 것은 그나마 얼마남지 않은 동료의식,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한의사 집단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이제 그것마저도 모두 사라졌다. 그래, 고작 이정도 수준의 인간들이 한의사랍시고 영업하고 있구나. 민족의 기념일 뜻깊은 3.1절날 bk툰을 중단하게 돼서 가장 기쁜 사람은 바로 박사님이다.

 

(사람이 잘못할 수 있다. 그냥 잘못했으면 사과하면 된다. 그래, 사과하기 싫으면 안하면 된다. 니 선택이니깐. 구지 "나는 사과하기 싫어요"라는 말을 장황하게 수십줄의 글로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충분히 알아 들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 김모원장이 그 음해글을 하루일과에 퍼오기 전까지 의와 **라는 그 동아리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난 오로지 한의계를 위한 광고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내가 인과의 송**원장에게 전화해서 물어봤었다. 의와 **이 뭐하는데냐고. 그 정도로 관심없던 단체였는데 9월에 의와** 명단이 유출된 것을 들어 bk박사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누가보면 bk박사님이 9월달 의와 ** 명단을 빼낸 줄 알겠네. 박사님은 늘 독고다이였다. 잊지마라. 사건의 선후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바란다. 아무튼 모두 지난 일이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겨주어서 감사하다. 몸도 가볍고 홀가분하다. 권,김,이원장에게 감사드린다.)

 

이제 구질구질했던 bk툰 제작자가 아니라 wizzy라는 아이디를 쓰던 한의사 개인으로 돌아가, 대의와 명분을 위해 외부로 돌렸던 시선을 거두고, 2012년 봄 이진욱의 전화를 받기 전 시점으로 돌아가, 내면을 다지는 영역에 에너지를 쓰려고 한다. 그동안 못했던 내 앞가림 잘 하고 산타고 책이나 읽고 돈도 잘 벌고, 개인과 가족의 행복에 집중하는 삶, 한의사 개인의 삶에 충실하겠다.

 

두번 다시는 그 어떤 단체나 한의사 그 누구도 천연물신약카툰 같은 거 bk툰에 부탁하지 마시길... 한의계에 이만큼 해드렸으면 bk툰이 할 수 있는 능력의 몇배 더 해드린 거니깐요. 웹툰으로서는 지나치고도 남을 오버페이스였다고 평가합니다. 아무튼 지난 9년간 빈의협에서 bk툰과 함께 울고 웃고, 성원하고 지지해주신 원장님들 감사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재밌고 뜻깊었던 시절로 기억될 것입니다."

 

 

<사진: 그동안 9년간의 카툰 제작 과정에서 가장 많이 고생한 xp-pen 타블렛. 표면에 묻은 검은 것은 때가 아니라 대화재 당시 그을음이다. 타블렛이 마치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지쳐있는 병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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