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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허샘이 김씨 곁을 떠났다. 전군과 정성엽씨도 이날 제대함으로써 칠곡군의 공공보건의료를 빛내던 용사들을 더이상 집담회에서 볼 수 없게 됐다.

마침 블랙데이!
우울한 김씨가 병성산악연맹에 도움을 청했다. 연맹 측에서는 작오산에 갔다오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를 김씨가 흔쾌히 수락했다.

작오산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과 혈전이 벌어진 호국의 303고지를 말한다. 지금도 당시 참호들이 남아 있고 정상에는 당시 303고지를 지키다 사망한 장병들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도 이 낙동강 전선에서 네이팜탄이 융단폭격될 때(약목면과 북삼면일대) 국군 모대위가 "야, 낙동강에 오리알 떨어진다”고 소리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작오산능선을 따라가면 유학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곳이 바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이다. 50년 8월 대구에서는 매일 수백명씩 길거리에서 청년들이 징집당했고 이들은 며칠간의 군사훈련만을 받고 바로 다부동으로 투입됐다. 두달간 고지를 뺏고뺏기는 격전 속에서 인민군 만7천명과 국군 만명이 전사했다.(다른 전선과 달리 이 전투에는 16세-20세 사이의 학생들이 전투에 많이 참가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군번도 없었다.)  몇년전 이 유학산에서 유해 한구가 발굴되었는데 유해 옆에 같이 발굴된 삼각자에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를 근거로 유족을 찾게 됐는데 그 기사를 감독이 우연히 보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후문이다.
(한국전 당시 왜관-다부동-팔공산-영천-영덕 방어선은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이곳이 무너지면 유엔군과 피난민들을 모두 괌으로 철수시킨다는 작전이 세워져있었다. 1사단 참전용사들에게 왜관 다부동 지역은 그들의 목숨과 바꾼 곳으로 안강전투와 함께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의 반격의 시점이 되는 의미있는 곳이다. 넓게 보면 남한이 공산화되느냐 마느냐를 결정지은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최전선에서 "내가 후퇴하면 나를 총으로 쏘라"는 말을 남기고 직접 부하들을 이끌었던 백선엽 사단장(지금 대부분의 국민들은 백선엽이 누군지도 모른다.)과 이름없는 학도병, 유학산에서 죽어간 수많은 군인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셀파를 자처해 지게에 군수품을 지고 고지를 오르내렸던 무지렁이 농부들. 군인 뿐 아니라 그런 농부들도 많이 죽었다. 좌우이념을 떠나 목숨을 바친 그들의 "용기"는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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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호국의 고장 왜관읍이다. 전쟁기념관이 두개 있다. 왜관에 하나. 다부동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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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오산에서 바라본 기산면 방향...우측 세번째 다리가 철교다. 당시 낙동강을 건너던 유일한 다리였는데,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폭파시켰다. 지금은 사람만 건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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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장에서 바라본 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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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오산에도 봄이 와버렸다. 산 전체가 아카시아다. 추측컨대 6.25 때 민둥산이 되었다가 이후에 심은 아카시아가 번성한 것 같다. 칠곡군은 아카시아 축제를 하는데 원래 아카시아가 많았던 곳이 아니라 한국전쟁때 워낙 격전지였기 때문에 모든 나무가 소실되고 이후에 녹화사업으로 심은 나무가 전부 아카시아이기 때문인듯.

30분만에 헬기장까지 오른 김씨는 하산하여 지소로 무사히 귀환했다고 한다. 김씨 소속사에 따르면 앞으로 꾸준히 작오산에 오를 계획이라고 한다.

<스포츠부/왜관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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