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의사에게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물론 의료비에 계산되지는 않는다.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다. 우리가 병상에 누워있다고 상상해보고 나를 돌봐줄 주치의가 어떤 종류의 '섬세함'을 소유했으면 좋을지 상상해보자. 의료의 본질은 치료가 아니라 보살핌일지니. 의료는 곧 어버이다움이다. (나는 전동배드를 최대한 낮추고 내가 환자의 정수리 부근에서 내려다보는 포지션을 선호한다. 적어도 환자가 눈을 내리깔고 발밑에서 나를 보는 자세보다는 훨씬 나을테니깐)

피바디가 말했다
"과학의 원리를 병의 진단과 치료에 적용하는 것은 의료행위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의사의 가장 핵심적인 자질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야. 왜냐면 환자를 가장 잘 치료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환자를 염려하는 데 있기 때문이지."
이미 과학이라는 괴물은 17세기에 종교의 권위를 박살내고 19세기에는 의학의 권위마저 박살냈(다기보다는 환자들이 가진 주도권을 의사에게 줘버렸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튼...인간에 대한 관심. 과학이 간과했던 바로 그것!
(아아, 인간에 대한 관심. 이것은 내가 대화재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선배들에게 동냥을 다닐때 배웠던 가장 강력한 화두 아니었던가! 이미 피바디 박사께서 일갈하셨었구나.)

환자들이 의사에 대해 기대하는 점은 양면적이다. 과학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단지 전문기술인이 아닌 인도적인 의사이기를 바란다. 곤경에 빠진 환자들에게 의사는 과학의 중재자나 전달자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상적인 의사는 객관적인 데이타를 넘어 개인적인 사항들(사적인)까지 포괄해서 판단을 내린다.
 
(내가 성남에서 일할때 매춘부들을 자주 진료한 적이 있는데 그녀들은 체중이 1kg씩 늘때마다 포주에게 벌금을 내야했고, 강력한 이뇨제로 벌금을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었지. 내가 해줄수 있는건 이뇨제를 대신할만한 순한 한약재들로 그들의 벌금을 틀어막는 거였지. 하루 한끼의 중국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는 그녀들의 에피더미스에서 지방세포만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거의 신의 영역에 손을 대는 거랑 같았지만, 난 비교적 훌륭하게 그 소명을 해냈다고 자부해. 내가 그 동네를 떠날때 그녀들이 꽤 아쉬워했으니깐,

내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매춘부들의 의사에 대한 순응도는 일반 환자들에 비해 10배 더 높고 성격도 훨씬 더 착했던 것 같아. 그들이 왜 사회악 내지는 빗취로 욕을 먹어야하는지 모르겠어. 난 그들의 노동력이 평가절하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매춘부노조가 만들어져서 그들도 4대보험을 받으며 떳떳하게 일했으면 해. 그리고 더욱 큰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봐. 적어도 초등학교 선생보다 매춘부 일이 훨씬 더 힘들거든. 힘든 일 하면 페이가 높아야해. 그래야 공정한 사회지.)

인도주의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 73페이지에 보면 저자의 아버지가 1950-60년대에 얼마나 환자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공감하고 관심을 기울였는지 서술되어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존경받는 의사의 표상. 아버지의 소명에는 환자의 고통을 이용하여 부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단지 환자를 보살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보상이었다. 그는 흰옷을 입은 동료 사업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환자의 말을 댕강댕강 잘라먹었다. 환자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고, 그저 치료만이 그의 관심사였으니깐. 하지만 과거의 추억이다. 이제.

어느날 저자가 인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잘못된 대답을 하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너 이 색히 그렇게 해서 넌 아마 그 환자를 죽여버렸을꺼야. 못난놈"

저자가 레지던트를 하고 있을때, 천식으로 호흡곤란에 이른 환자에게 삽관하려고 마취과 친구를 불렀는데, 이 색히가 한다는 짓이 그 환자 옆에 앉아서 '곧 나아질테니 안심하세요'라는 말만 반복하더라는거지. 어처구니 없잖아. 의사면 당연히 삽관이나 할 것이지. 약물을 집어넣든가. 위안이라니!
그런데 그 환자가 아주 좋아졌어. 저자가 당황할수밖에.
도대체 의사라는 직업은 뭐냐.

임상의학의 핵심은 죽음이고 의사의 첫 임무는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치과나 한의과는 레알 의사는 아니다. 기술자일지는 모르지만. 물론 그대가 죽음을 컨트롤하는 영역을 손대는 한의사라면 이런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난 불행히도 본 적이 없다.
죽음이라는 물체에서 손 뗐다는 것이 축복일까. 치명적 핸디캡일까.

미국에 군산복합체와 더불어 의-산복합체가 있는데, 아마 한국이 곧 그 뒤를 졸졸 따를 것 같군. 경제적인 파워가 정부와 보험회사에게 집중되면 의사들은 결국 주도권을 잃게 되고, 단지 톱니바퀴처럼 치료해주는 부속품으로 전락해가겠지. 물론 페이는 두둑히 받아낼거야.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시장우선주의와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의료윤리가 불꽃을 튀기다가 결국엔 실용주의가 승리할 것. 명약관화!
의산복합체. 잘 기억해두라구. 앞으로 당신 지갑을 털어갈 놈들의 멋진 성함이야.

중세이후 옷입고 진료하는 몇 안되는 직업군 중에는 성직자,법관, 의사가 있다. 대게 이런 직업군들은 사회적인 혜택을 입는 경우가 많으므로 시민들에게 그만한 응답을 해야한다.

성직자, 법관, 의사는 모두 제복을 입는다.
의사에게 가운이란 건 단순히 혈액이나 세균으로부터 막기 위한 보호막이 아니다. 가운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그 무엇이다. 옷벗는다. 판사가 옷벗는다. 검사가 옷 벗는다. 사제가 옷벗는다. 의사가 가운을 벗는다 이런 말들은 단순히 탈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제단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半神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어때? 가끔 의사나 법관이 반신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지 않나? 암선고를 내린다든지, 징역 몇년이라고 두들긴다든지...물론 변호사나 한의사는 반신의 영역에 오를 수가 없지. ㅋㅋㅋㅋ 반신은 A급들만 오를 수 있어. 난 c급이지.

의사와 환자를 설명하는 세단어
관심
책임.
관계


의사는 환자를 책임질줄 알아야한다. 클리어해주어야 한다. 첫판 끝내주고 다음판 들어가야지. 1942같은거 안 해보았나. 클리어해주는 습성이 안 들면 의사들도 피곤하다. 사명감도 안 생기고.
그리고 관계는 사적인 관계를 말함이다. 우리는 환자와 매우 사적인 관계의 존재들이다. 우리가 간혹 공적인, 마치 동사무소 직원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의료의 본질을 착각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사적인 관계가 정답이다.

존경받는 의사. 2010년 한국이랑 너무 안 어울리지 않나.
어디에 개업하면 하루에 환자를 50명이상 안정적으로 볼까. 어떻게 한약을 먹으라고 멘트쳐야 환자들로부터 내상을 입지 않고 통장잔고를 늘일까....그런데 느닷없이 존경받는 의사라니! 미친!

이미 환자들도 1970년대처럼 의사를 존경하지 않는데, 존경을 구걸하다니.

과학적인 의사 vs 인도적인 의사
훗, 그런데 대부분 이 두가지를 추구하려는 의사도 없고, 완벽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의사도 없다. 그냥 적당한 의사. ㅋㅋㅋ 환자한테 소송 안당하고 그렇다고 뭐 굶어죽지도 않는....

이 책 속지에 루크 필데스의 <의사>라는 작품인데 런던에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은 고통받는 환자들로부터 멀어진 의사들인가하는 책의 표지로도 쓰였다. 환자의 옆에 묵묵히 앉아서 지켜보는 의사. 이 그림이 바로 저자의 의료철학이라고 말한다. 환자에 대한 염려.


나도 가끔 내원하지 않으면 염려가 되는 환자가 있다. 늘 오는 시간대에 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오늘은 잘 넘겼는지 걱정이 되는 환자가 있다. 상황이 힘들어지면 하루에 두번 침맞으러 오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나라에서 이런 나에게 2번 침놔주는건 의학적으로 '과잉진료'이므로 돈을 줄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좆까라고 말하고 난뒤에 시발 한번은 그냥 내가 무료로 침을 놔주고 말지라고 말한다.
환자에게 두번째 침맞은 것은 무료라고 이야기하면 놀란다. 국가에서 그렇게 시켰다고 말하면 두번 놀란다. 과잉진료라서 환자로부터도 진료비를 10원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면 세번 놀란다. 진짜로 안 받으면 4번 놀라고 퇴원한다.

좋은 의사.
내가 9살 먹었을때, 나는 꽤 잘나가는 친구였다. 아버지는 수협 출장소장이셨고, 매일 저녁 파출소장, 분교장, 농협조합장등과 어울리는 소위 말하는 그동네 힘쓰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아버지의 큰 아들이면서 명석하고 온순하며 잘 크면 한몫할 것 같은 포스가 풍겨져 나오는 거대아였다. ㅋㅋㅋ

2학년 1반, 어느 수업시간이 끝나고 황춘길(당시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병성아, 너는 꼭 의사가 되어라. 좋은 의사."

"네?"

"네가 만약 대구로 나와서 중학교를 다닌다면 우리집에서 숙식을 다 제공할테니깐, 나중에 혹 대구로 전학오면 꼭 연락하도록 해."


그 이후로 우리 집은 몰락했다. 아버지는 감옥도 갔다 오시고 엄마는 공장에 나가야했고, 나는 그 전과 다른 어린시절을 보냈다.(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의 다양성을 말하자면 -09년도 대화재 사건포함- 한의사 집단 중에 상위 5% 내에 든다고 자신한다 ㅋㅋㅋㅋ슈발!)

그리고 세월이 20년이 지나 경북 칠곡군 모 보건지소에 배치가 되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근무하던 바로 옆 면의 모 국민학교 교장으로 바로 황춘길 선생님이 일하셨다는 사실. 내가 부임했을때는 황선생님은 퇴직하시고 대구로 가버린 이후였지만, 그 명성이 남아 우리 지소 여사들의 대화 중에 언급되는 것을 내가 우연히 들은 것이다.

"아니, 여사님. 방금 누구요? 황춘길요? 저 담임샘인데... 그분이 여기 계셨어요?"

인간의 인연이란 참 묘하지?



나의 어릴때 희망직업은 늘 의사였다. 뭐 어렵풋했지만, 국민학교 문집같은 걸 낼때면 늘 여자애들이 간호사라고 적어넣듯이, '의사'라고 적어넣곤 했었다. 알프레드 토버가 이 책에서 말하는 그 '사라져버린 의사'.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바로 그 '의사'

7살때 산부인과 의사에게 귀수술을 받느라 너무 고생을 했거든. ㅋㅋㅋ 3번째 수술에 실패했을때, 내가 조금만 더 성숙한 어린이였다면 그 의사에게 원펀치 쓰리강냉이를 날렸을꺼야.

병자에게 사랑과 자비, 선하고 친절하며 학식있고 능력도 있으며 위트와 유머로 환자의 마음까지 가볍게 해주는 인도주의 의사가 되기에는 좀 미흡한 언사. 쓰리강냉이!!


이 책의 후반부는 철학적인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의사이면서 철학교수거든.
철학자들은 아주 쉬운 내용을 가장 어렵게 표현하는 특기가 있는데, 이를테면.

"나는 배가 고프다"를

"나의 수동적인 자의식이 조속한 시간내에 음식물을 섭취하여 정서적 육체적 호메오스타시스와 안정을 도모할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기전을 멈추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정한 자아가 능동적으로 잘 발현될 수 있는 인체 내외 분위기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보편타당하다고 사료된다"

200페이지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나는 이 책을 발로 읽었다. ㅋㅋㅋ

아마 150페이지 쯤 넘어가면서 니체, 자율성 뭐 이런 단어들이 아마 번역자의 목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갔을꺼야. 번역자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내가보기엔 좀 측은하기도 하다) 번역해야 했는지...

첨언하자면 환자의 권리와 자율성이라는 부분(이 책의 후반부)에 있어서 나는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다. 환자는 의사에게 복종해야 하며, 의사는 그 복종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그 댓가는 대부분 치유로 표현된다.

자, 나의 환자라면 다음 단계를 따르시오

1.닥쳐.
2.누워.
3.소매 걷어.
4.아픈데 말해봐.
5.참아.
6.내려와.

"근데 물리치료 왜 안 해주세요?"

"나가!"<2010.5.8>


훗, 환자의 자율성? 권리? 그런건 이발사나 미장원 가서 이야기하도록 해. 여긴 병원이라구.
글쎄, 환자복을 핑크로 할지, 블루로 할지 정도라면 모를까...
반응형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