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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비과학적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한의학은 그리스적이지 않아!!!!!!
이 책은 중국과 그리스라는 두 문화를 통해 인류가 어떻게 사고하고 발전해왔는지를 천착한다. 그 발단은 '펑카이핑'이라는 어느 당돌한 중국출신 대학원생이 니스벳에 반항하면서(?)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세상을 직선이라고 생각하시는 반면, 저는 세상을 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한마디로 이 책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 말은 한국의 모든 양방의사들도 뼈에 새겨야한다.
그리스는 사물의 본질을 중요시 했고, 중국은 개인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그리스는 개인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논쟁을 중시했다. 인간으로부터 자연계를 분리하여 '자연계'라는 개념을 발견한 것은 오직 그리스 문화 뿐이었다.
그리스는 추상화에 관심이 있었으며 우주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중국은 우주가 사물들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물질로 보았다. 조화. 부분보다는 전체, 사물들의 상호관련성을 중시하는 종합주의! 홀리즘! 현악기의 공명처럼 인간, 하늘, 땅은 서로에게 공명을 울린다는 사고.
그리스는 직선적인 사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능했다. 사물의 '본질과 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속성에 근거하여 범주화하고, 그 범주를 사용해서 규칙을 만들어서 사물들의 움직임을 그 규칙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혈액은 액체이다. 액체의 움직임은 압력과 마찰, 와류 등의 유체역학의 지배를 받고 혈액 역시 유체역할을 통해 그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적인 사고다.
중국은 조화를 중시하여 음양과 오행, 기 등으로 설명한다. 유교에선 중용이 중요한 행동 규범이다. 끊임없는 순환. 서로의 존재 때문에 서로를 더 완전하게 만든다는 원리. 무언가를 약화시키려면 무언가를 강화시켜야하고 무언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풍성하게 해야한다. 음이 극하면 양이 시생하고 양이 극하면 음이 동한다.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道'
중국에서 몸의 건강은 몸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운과 장부들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다. 귀는 신장까지 연결되고 간이 울체하면 비위의 소화장애를 유발시킨다. 우주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場으로 보았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든 그 장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힘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눈이 충혈되었다고 눈의 혈관만 들여다보는 그리스적인 의료행위에 대해 중국인들은 너무 초보적이며 단순하다고 평가한다. 중국식 사고는 사물을 파악할때 부분보다는 전체 맥락을 중시한다.
이는 챠트를 쓰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서양의사는 우선 '룰 아웃'이라는 방식을 선호한다. 배제해 나가는 것이다. 흠, 이건 염증이 아니고, 마비도 아니고, 신경계 문제는 아니군. 이것도 아니고...이것도 아니고...이것도 아니고... 여러개의 질환명을 적어놓고 지워나가면서 마지막 단 하나의 질환명을 추구한다.
그에 반면 한의사는 통합의 과정을 해나간다. 머리카락, 소화기, 소변, 수면 등등 온갖 증상을 다 적어놓고 흠... 최대한 종합적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검사법이나 증상구분을 통해 특정질환을 배제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증상들을 취합해서 '이미지'를 만들어 '맥락'을 파악하려고 한다.
여자가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물을때 그리스청년은 '신라면으로 주세요'라고 말하지만 중국청년은 콘돔을 챙긴다.
그리스청년이 중국청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방새. 넌 너무 비과학적이야. 라면 먹는다잖아! 멍충아!'
결국 그리스청년은 과학적으로 라면만 쳐먹고 집에 가고, 중국청년은 오르가즘을 나눈다. 비과학적이긴 하다 ㅋㅋㅋ
그리스는 모순이라는 개념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간염이면서 동시에 심장마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형식논리에서 기본이다. 논쟁의 문화.
중국은 모순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논쟁과 반박에 취약하여 특정이론을 뒤엎어버리는 것에 취약하다. 의서를 보라. 온갖 이야기들이 짬뽕돼있다. 엎어버리고 새판을 짜는게 아니라. 푸세식 화장실의 똥탑처럼 그 위에 계속 쌓아간다. 한중일 동양3국은 개인의 성공보다 집단 전체의 목적이나 화목한 관계를 중요시한다. 동양인들은 본질적으로 선배와의 '관계'를 박살내는 논쟁을 회피한다. 그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이론을 하나 더 추가하여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허준은 중국적인 인물이지만 이제마는 꽤 그리스적인 인물이다.
에드워드 홀이 주장한 저맥락 사회. 고맥락 사회.
한국은 고맥락 사회다. 사람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 주변 맥락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이건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우리가 남을 만나면 그 사람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포함하는 호칭으로 바뀐다. 김과장님. 용규형. 수용오빠. 박원장님(그는 나의 상사요, 형제요, 동문인 관계임을 재확인한다. 각 개인간의 관계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그에 반해 서양은 그냥 '너'다. '너'라는 말에는 관계가 없다. 개인만 있다. 한국에서는 나는 김원장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병성오빠, 병성이형, 때론 동생이 되기도 한다. 서양에는 그냥 '병성' 뿐이다.
동양인들은 자신을 특별하다. 남보다 탁월하다고 믿는 문화가 없다. 그들은 오직 화목과 집단의 목표가 중요하기때문이다. 일본에는 자존감이라는 고유단어가 없다. 중국에서 개인주의는 곧 이기주의와 같은 말이다. 한국에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로 말한다.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우리'라는 단어는 한국의 집단문화를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아이콘이다. 한국에서는 내가 빚내서 개설한 병원도 '내 한의원'이 아니라 '우리 한의원'이라고 말해야 한다.
평균적으로 볼때...
동양은 더불어 살고 서양은 홀로 산다.
서양은 논쟁하고 동양은 타협한다
미국인은 어릴때부터 말로 싸우는 걸 배운다.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훈련을 받는다. 동양인들은 서양의 논리적인 표현법에 서툴다. 그래서 대개 유학온 동양학생들의 첫 논문은 실망감을 안겨준다. 논리가 부족하다.
서양인은 '개별적인' 사물을 보고 동양인은 '연속적인' 물질을 본다.
여기 4가지 물건이 있다 치자
찰흙으로 만든 개
찰흙으로 만든 집
나무로 만든 집
나무로 만든 개
이것을 분류하라고 하면 서양인들은 같은 모양인 '집'을 묶어서 분류하고 동양인들은 재질로 분류한다. 나무조각은 나무조각대로 찰흙상은 찰흙상대로...모은다
자연과 하나되는 메세지는 동양인에게만 통한다. 서양인에게 자연과 하나되라고 하면 절대 이해 못한다.
세상을 통제하려는 서양과 세상에 적응하려는 동양
동양의 순환론과 서양의 직선론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구분하면 이거다.
직선과 원.
서양의학은 블로킹의 의학이다. 직선형 케스케이드 과정의 블로킹.
그에 반해 동양의학은 선순환. 원의 선순환 구조를 지향하는 의학이다.
단기적으로는 블로킹의 의학이 빤짝 효과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백전백패한다. 아니면 죽을때까지 블로킹만 하든가. 수액과 영양액과 진통제만으로 생명이 연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블로킹만으로는 장기를 포함한 인체 기능상의 부전을 액티베이션시킬 수 없다.
동양의 상환론과 서양의 본성론 : 미국에서 총기난사가 일어나면 미국언론은 개인적인 특성에 주목하는데, 동양의 신문들은 범인 주위의 상황적 요인(해고당했다.. 어릴때 이민와서 적응을 못했고, 교수가 나쁜사람. 총기구입이 쉬운 문화 등등)을 더 고려한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때도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미국에 미안하다는 느낌을 가졌다니!!!!!! 와우!! 미국은 그냥 '개인 조승희'라고 보는데 한국사람들은 그가 한국계 미국인인 조씨성을 가진 승희라고 생각하는 거다.
노무현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서양인은 '노'의 개인적인 자살로 보지만, 한국인들은 그 상황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노무현은 그 특정한 상황 하에서 타살당했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단순성 추구경향과 동양의 복잡성 추구경향
사물의 속성에 집착하는 서양과 맥락만을 중요시하는 동양
한의학에서 변증을 보라. 머리카락이 푸석거리고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멍하고 피부트러블이 생기고, 눈이 건조해지며, 잠이 잘 안오고, 변비가 생기고, 손발이 차고 생리통이 있고 가슴이 답답하다면? 어떤 한의사라도 보혈해야 한다는 '맥락'을 떠올린다.
그에 반해 서양에서는 머리카락은 머리카락대로 변비는 대장문제로, 생리통은 자궁문제로, 피부는 피부대로 이걸 다 조각으로 나눠서 접근한다. 내과 피부과 안과 정신과 신경과 .....온 과를 다 돌아다녀야 한다.
같은 여드름이라도 양방에서는 그냥 모공에 염증이 생겨서 부풀어오르고 발적된 상태지만, 한의학에서는 맥락부터 살핀다. 음허열이 오른 것인지, 습열인지, 실열인지... 잠이 잘 오는지? 소화는 잘되는지? 소변은 어떤지 이런 걸 물어본다. 양방의는 아니 대체 여드름만 보면 되지, 소염제 주고 염증을 가라앉히고 고름을 짜주면 되지 대체 소화, 소변은 왜 물어보냐고 의아해한다.
양방에서는 염증이 두피에 나건, 뺨에 나건 턱에 나건 모든 '염증'으로 범주화해서 접근한다. 그런데 한의학에서는 염증의 부위가 어디냐가 또 '맥락'을 살피는 단서가 된다. 주름살도 팔자주름이면 신이 안 좋고, 이마 주름은 폐가 맛 갔고 등등...(이것이 입증여부는 이 글에서는 차치한다)
서양의학은 인체를 '통제'하려고 한다. 머리카락이 푸석거리면 외부에서 케라틴과 콜라겐을 발라 주입시키면 된다고 본다. 한의학은 인체 내부에서 선순환 구조를 액티베이션시켜서 내부에서부터 자체적인 콜라겐이 머리카락까지 올라와 윤기를 초래해야 한다고 본다.
서양인은 쥐의 '간'과 사람의 '간'의 유사성을 통해 개체와 집합이라는 구도를 형성시켜 사물을 범주화시키고 규칙을 찾아내려고 접근하지만, 동양인은 그렇지 못하다.
동양인은 규칙이나 범주를 사용하여 세상을 이해하는데 덜 익숙하다. 동양인은 부분과 전체라는 각도에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한국말은 동사가 중요하다. 맨 뒤나 맨 앞에 온다. 동사는 유동적이다.
명사는 서양에서 중요하다. 영어에서 동사는 문장 중간에 오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다.
서양 부모들은 명사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논리를 중시하는 서양과 경험을 중시하는 동양
모순되는 두 명제를 보면 서양인은 하나의 명제만이 옳다고 선택하는 반면 동양인들은 두 명제 모두에서 나름의 진리를 도출해내서 중용을 추구하고자하는 변증법적 방식을 선호한다. (대표적으로 '일리가 있네요'라는 문장으로 나타난다)
'외향적이지만 내성적이다'
이 문장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럴듯한가? 이 모순이 받아들여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양인!! ㅋㅋ
그렇다고 동양인이 형식논리에 약한 것이 아니다. 수학과 과학에 뛰어나다. 다만 경험과 논리가 충돌하는 상황하에서는 형식논리를 덜 사용한다는 점이다. 논리적 사고능력이 떨어지는 덜떨어지는 집단이 아니라는...
쌀농사.는 공동작업이 필수다. 관개공사가 절실한데 이는 협동을 바탕으로 한다. 집단의 화목을 중시하고 중앙집권적 문화가 발전한다.
반면 그리스는 농업보다 수렵, 무역에 적합한 지형이었다. 구지 안정적인 공동체가 필요 없는 지역이었다. 주 생산품도 포도주와 올리브라서 남들과 구지 화목하게 지낼 필요가 없었고 자율권이 더 풍부했다. 시장이나 거리에서 서로 말다툼하고 논쟁하는 것이 자유로웠다.
생태환경이 경제적 차이를 가져오고 다시 사회적 차이를 초래했다.
과학은 수사학의 일종이다. 그리스에서만 발달했는데 유독 그리스의 공회가 논쟁의 기술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하학 증명은 궁극적으로 수사학적 형태를 띄고 있다. 논쟁이 장려되는 사회에서는 비모순율이나 형식논리가 개발된다. 논리학이 발달하면 자연스럽게 과학의 발달로 이어진다.
분석적 사고와 종합적 사고.
수술같은 적극적 개입은 서양의학 특징이다. 동양의학은 종합적이기 때문에 적극적 개입을 꺼린다. 건강은 균형으로 유지된다는 쪽이다.
동양인들은 어떤 사건에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특히 자신이 초래하지 않은 잘못. 예를 들면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그런 사건이 생기면 총리가 사임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든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힌 경우 인과관계가 애매하기 때문에 일단 무조건 사과하는게 맞다고 본다. 반면 서양인은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으면 절대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경희대 패륜녀에 대해서 그 부모가 사과하는 일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종교에서도 서양의 종교는 옳고 그름의 구조로 되어 있다. 불신은 곧 죄다.
동양의 종교는 둘 모두 함께를 지향한다. 동양 종교들은 타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하고 서로의 교리를 흡수한다. 한국에서는 어떤 이가 불교도이면서도 유교도이기도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종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양은 서양의 사고로부터 배울 점이 있고, 서양은 동양의 사고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
특히 최근 의학분야에서 동양의학의 서양 진출은 괄목할만하다.
서양의학의 장점을 획득하여 세계로 나아가라!
최인철의 번역 후기처럼, 이 책은 동서양의 사고방식에 관한한 독보적인 존재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의학을 포함해서)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
우리는 이런 책을 양서라고 부르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 특히 한의예과 1학년 필독서는 우주변화의 원리가 아니라 '생각의 지도'가 되어야 하지않을까?
(총균쇠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문명의 종말도 읽어볼 것.)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한의학은 그리스적이지 않아!!!!!!
이 책은 중국과 그리스라는 두 문화를 통해 인류가 어떻게 사고하고 발전해왔는지를 천착한다. 그 발단은 '펑카이핑'이라는 어느 당돌한 중국출신 대학원생이 니스벳에 반항하면서(?)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세상을 직선이라고 생각하시는 반면, 저는 세상을 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한마디로 이 책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 말은 한국의 모든 양방의사들도 뼈에 새겨야한다.
그리스는 사물의 본질을 중요시 했고, 중국은 개인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그리스는 개인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논쟁을 중시했다. 인간으로부터 자연계를 분리하여 '자연계'라는 개념을 발견한 것은 오직 그리스 문화 뿐이었다.
그리스는 추상화에 관심이 있었으며 우주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중국은 우주가 사물들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물질로 보았다. 조화. 부분보다는 전체, 사물들의 상호관련성을 중시하는 종합주의! 홀리즘! 현악기의 공명처럼 인간, 하늘, 땅은 서로에게 공명을 울린다는 사고.
그리스는 직선적인 사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능했다. 사물의 '본질과 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속성에 근거하여 범주화하고, 그 범주를 사용해서 규칙을 만들어서 사물들의 움직임을 그 규칙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혈액은 액체이다. 액체의 움직임은 압력과 마찰, 와류 등의 유체역학의 지배를 받고 혈액 역시 유체역할을 통해 그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적인 사고다.
중국은 조화를 중시하여 음양과 오행, 기 등으로 설명한다. 유교에선 중용이 중요한 행동 규범이다. 끊임없는 순환. 서로의 존재 때문에 서로를 더 완전하게 만든다는 원리. 무언가를 약화시키려면 무언가를 강화시켜야하고 무언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풍성하게 해야한다. 음이 극하면 양이 시생하고 양이 극하면 음이 동한다.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道'
중국에서 몸의 건강은 몸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운과 장부들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다. 귀는 신장까지 연결되고 간이 울체하면 비위의 소화장애를 유발시킨다. 우주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場으로 보았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든 그 장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힘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눈이 충혈되었다고 눈의 혈관만 들여다보는 그리스적인 의료행위에 대해 중국인들은 너무 초보적이며 단순하다고 평가한다. 중국식 사고는 사물을 파악할때 부분보다는 전체 맥락을 중시한다.
이는 챠트를 쓰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서양의사는 우선 '룰 아웃'이라는 방식을 선호한다. 배제해 나가는 것이다. 흠, 이건 염증이 아니고, 마비도 아니고, 신경계 문제는 아니군. 이것도 아니고...이것도 아니고...이것도 아니고... 여러개의 질환명을 적어놓고 지워나가면서 마지막 단 하나의 질환명을 추구한다.
그에 반면 한의사는 통합의 과정을 해나간다. 머리카락, 소화기, 소변, 수면 등등 온갖 증상을 다 적어놓고 흠... 최대한 종합적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검사법이나 증상구분을 통해 특정질환을 배제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증상들을 취합해서 '이미지'를 만들어 '맥락'을 파악하려고 한다.
여자가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물을때 그리스청년은 '신라면으로 주세요'라고 말하지만 중국청년은 콘돔을 챙긴다.
그리스청년이 중국청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방새. 넌 너무 비과학적이야. 라면 먹는다잖아! 멍충아!'
결국 그리스청년은 과학적으로 라면만 쳐먹고 집에 가고, 중국청년은 오르가즘을 나눈다. 비과학적이긴 하다 ㅋㅋㅋ
그리스는 모순이라는 개념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간염이면서 동시에 심장마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형식논리에서 기본이다. 논쟁의 문화.
중국은 모순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논쟁과 반박에 취약하여 특정이론을 뒤엎어버리는 것에 취약하다. 의서를 보라. 온갖 이야기들이 짬뽕돼있다. 엎어버리고 새판을 짜는게 아니라. 푸세식 화장실의 똥탑처럼 그 위에 계속 쌓아간다. 한중일 동양3국은 개인의 성공보다 집단 전체의 목적이나 화목한 관계를 중요시한다. 동양인들은 본질적으로 선배와의 '관계'를 박살내는 논쟁을 회피한다. 그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이론을 하나 더 추가하여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허준은 중국적인 인물이지만 이제마는 꽤 그리스적인 인물이다.
에드워드 홀이 주장한 저맥락 사회. 고맥락 사회.
한국은 고맥락 사회다. 사람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 주변 맥락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이건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우리가 남을 만나면 그 사람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포함하는 호칭으로 바뀐다. 김과장님. 용규형. 수용오빠. 박원장님(그는 나의 상사요, 형제요, 동문인 관계임을 재확인한다. 각 개인간의 관계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그에 반해 서양은 그냥 '너'다. '너'라는 말에는 관계가 없다. 개인만 있다. 한국에서는 나는 김원장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병성오빠, 병성이형, 때론 동생이 되기도 한다. 서양에는 그냥 '병성' 뿐이다.
동양인들은 자신을 특별하다. 남보다 탁월하다고 믿는 문화가 없다. 그들은 오직 화목과 집단의 목표가 중요하기때문이다. 일본에는 자존감이라는 고유단어가 없다. 중국에서 개인주의는 곧 이기주의와 같은 말이다. 한국에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로 말한다.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우리'라는 단어는 한국의 집단문화를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아이콘이다. 한국에서는 내가 빚내서 개설한 병원도 '내 한의원'이 아니라 '우리 한의원'이라고 말해야 한다.
평균적으로 볼때...
동양은 더불어 살고 서양은 홀로 산다.
서양은 논쟁하고 동양은 타협한다
미국인은 어릴때부터 말로 싸우는 걸 배운다.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훈련을 받는다. 동양인들은 서양의 논리적인 표현법에 서툴다. 그래서 대개 유학온 동양학생들의 첫 논문은 실망감을 안겨준다. 논리가 부족하다.
서양인은 '개별적인' 사물을 보고 동양인은 '연속적인' 물질을 본다.
여기 4가지 물건이 있다 치자
찰흙으로 만든 개
찰흙으로 만든 집
나무로 만든 집
나무로 만든 개
이것을 분류하라고 하면 서양인들은 같은 모양인 '집'을 묶어서 분류하고 동양인들은 재질로 분류한다. 나무조각은 나무조각대로 찰흙상은 찰흙상대로...모은다
자연과 하나되는 메세지는 동양인에게만 통한다. 서양인에게 자연과 하나되라고 하면 절대 이해 못한다.
세상을 통제하려는 서양과 세상에 적응하려는 동양
동양의 순환론과 서양의 직선론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구분하면 이거다.
직선과 원.
서양의학은 블로킹의 의학이다. 직선형 케스케이드 과정의 블로킹.
그에 반해 동양의학은 선순환. 원의 선순환 구조를 지향하는 의학이다.
단기적으로는 블로킹의 의학이 빤짝 효과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백전백패한다. 아니면 죽을때까지 블로킹만 하든가. 수액과 영양액과 진통제만으로 생명이 연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블로킹만으로는 장기를 포함한 인체 기능상의 부전을 액티베이션시킬 수 없다.
동양의 상환론과 서양의 본성론 : 미국에서 총기난사가 일어나면 미국언론은 개인적인 특성에 주목하는데, 동양의 신문들은 범인 주위의 상황적 요인(해고당했다.. 어릴때 이민와서 적응을 못했고, 교수가 나쁜사람. 총기구입이 쉬운 문화 등등)을 더 고려한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때도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미국에 미안하다는 느낌을 가졌다니!!!!!! 와우!! 미국은 그냥 '개인 조승희'라고 보는데 한국사람들은 그가 한국계 미국인인 조씨성을 가진 승희라고 생각하는 거다.
노무현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서양인은 '노'의 개인적인 자살로 보지만, 한국인들은 그 상황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노무현은 그 특정한 상황 하에서 타살당했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단순성 추구경향과 동양의 복잡성 추구경향
사물의 속성에 집착하는 서양과 맥락만을 중요시하는 동양
한의학에서 변증을 보라. 머리카락이 푸석거리고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멍하고 피부트러블이 생기고, 눈이 건조해지며, 잠이 잘 안오고, 변비가 생기고, 손발이 차고 생리통이 있고 가슴이 답답하다면? 어떤 한의사라도 보혈해야 한다는 '맥락'을 떠올린다.
그에 반해 서양에서는 머리카락은 머리카락대로 변비는 대장문제로, 생리통은 자궁문제로, 피부는 피부대로 이걸 다 조각으로 나눠서 접근한다. 내과 피부과 안과 정신과 신경과 .....온 과를 다 돌아다녀야 한다.
같은 여드름이라도 양방에서는 그냥 모공에 염증이 생겨서 부풀어오르고 발적된 상태지만, 한의학에서는 맥락부터 살핀다. 음허열이 오른 것인지, 습열인지, 실열인지... 잠이 잘 오는지? 소화는 잘되는지? 소변은 어떤지 이런 걸 물어본다. 양방의는 아니 대체 여드름만 보면 되지, 소염제 주고 염증을 가라앉히고 고름을 짜주면 되지 대체 소화, 소변은 왜 물어보냐고 의아해한다.
양방에서는 염증이 두피에 나건, 뺨에 나건 턱에 나건 모든 '염증'으로 범주화해서 접근한다. 그런데 한의학에서는 염증의 부위가 어디냐가 또 '맥락'을 살피는 단서가 된다. 주름살도 팔자주름이면 신이 안 좋고, 이마 주름은 폐가 맛 갔고 등등...(이것이 입증여부는 이 글에서는 차치한다)
서양의학은 인체를 '통제'하려고 한다. 머리카락이 푸석거리면 외부에서 케라틴과 콜라겐을 발라 주입시키면 된다고 본다. 한의학은 인체 내부에서 선순환 구조를 액티베이션시켜서 내부에서부터 자체적인 콜라겐이 머리카락까지 올라와 윤기를 초래해야 한다고 본다.
서양인은 쥐의 '간'과 사람의 '간'의 유사성을 통해 개체와 집합이라는 구도를 형성시켜 사물을 범주화시키고 규칙을 찾아내려고 접근하지만, 동양인은 그렇지 못하다.
동양인은 규칙이나 범주를 사용하여 세상을 이해하는데 덜 익숙하다. 동양인은 부분과 전체라는 각도에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한국말은 동사가 중요하다. 맨 뒤나 맨 앞에 온다. 동사는 유동적이다.
명사는 서양에서 중요하다. 영어에서 동사는 문장 중간에 오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다.
서양 부모들은 명사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논리를 중시하는 서양과 경험을 중시하는 동양
모순되는 두 명제를 보면 서양인은 하나의 명제만이 옳다고 선택하는 반면 동양인들은 두 명제 모두에서 나름의 진리를 도출해내서 중용을 추구하고자하는 변증법적 방식을 선호한다. (대표적으로 '일리가 있네요'라는 문장으로 나타난다)
'외향적이지만 내성적이다'
이 문장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럴듯한가? 이 모순이 받아들여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양인!! ㅋㅋ
그렇다고 동양인이 형식논리에 약한 것이 아니다. 수학과 과학에 뛰어나다. 다만 경험과 논리가 충돌하는 상황하에서는 형식논리를 덜 사용한다는 점이다. 논리적 사고능력이 떨어지는 덜떨어지는 집단이 아니라는...
쌀농사.는 공동작업이 필수다. 관개공사가 절실한데 이는 협동을 바탕으로 한다. 집단의 화목을 중시하고 중앙집권적 문화가 발전한다.
반면 그리스는 농업보다 수렵, 무역에 적합한 지형이었다. 구지 안정적인 공동체가 필요 없는 지역이었다. 주 생산품도 포도주와 올리브라서 남들과 구지 화목하게 지낼 필요가 없었고 자율권이 더 풍부했다. 시장이나 거리에서 서로 말다툼하고 논쟁하는 것이 자유로웠다.
생태환경이 경제적 차이를 가져오고 다시 사회적 차이를 초래했다.
과학은 수사학의 일종이다. 그리스에서만 발달했는데 유독 그리스의 공회가 논쟁의 기술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하학 증명은 궁극적으로 수사학적 형태를 띄고 있다. 논쟁이 장려되는 사회에서는 비모순율이나 형식논리가 개발된다. 논리학이 발달하면 자연스럽게 과학의 발달로 이어진다.
분석적 사고와 종합적 사고.
수술같은 적극적 개입은 서양의학 특징이다. 동양의학은 종합적이기 때문에 적극적 개입을 꺼린다. 건강은 균형으로 유지된다는 쪽이다.
동양인들은 어떤 사건에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특히 자신이 초래하지 않은 잘못. 예를 들면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그런 사건이 생기면 총리가 사임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든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힌 경우 인과관계가 애매하기 때문에 일단 무조건 사과하는게 맞다고 본다. 반면 서양인은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으면 절대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경희대 패륜녀에 대해서 그 부모가 사과하는 일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종교에서도 서양의 종교는 옳고 그름의 구조로 되어 있다. 불신은 곧 죄다.
동양의 종교는 둘 모두 함께를 지향한다. 동양 종교들은 타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하고 서로의 교리를 흡수한다. 한국에서는 어떤 이가 불교도이면서도 유교도이기도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종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양은 서양의 사고로부터 배울 점이 있고, 서양은 동양의 사고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
특히 최근 의학분야에서 동양의학의 서양 진출은 괄목할만하다.
서양의학의 장점을 획득하여 세계로 나아가라!
최인철의 번역 후기처럼, 이 책은 동서양의 사고방식에 관한한 독보적인 존재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의학을 포함해서)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
우리는 이런 책을 양서라고 부르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 특히 한의예과 1학년 필독서는 우주변화의 원리가 아니라 '생각의 지도'가 되어야 하지않을까?
(총균쇠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문명의 종말도 읽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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