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기

Essays 2010. 8. 11.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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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이 있다면 나를 도대체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려고 이제는 질병의 고통까지 주시는건가!!




뭔가 이상했다.

7월 중순부터 몸이 조금 안 좋구나 싶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증상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좋아져야 되는데?'

특히 요통이 평소와 다른 부위에서 특이하게 나타나고 타진하면 특정 부위가 울리면서 아픈 게 예감이 너무 안 좋았다. 매일 침을 서너번씩 맞고(물론 내가 스스로 내 몸에 침을 찔러야 한다 ㅠ.ㅠ 덕분에 침질 스킬은 좀 더 향상됐지만 스스로 자침한다는 건 정서상으로 볼때 좀 없어보이고 ㅋㅋ 비참한 느낌이 들어서...) 
그나마 침 맞고 나면 서너시간 정도 컨디션이 좋아지고, 다시 시간이 흐르면 나빠지고...환자 한명 보고나면 바로 옆 배드로 기어들어가 누워야 했다.

처음엔 주하병인줄 알고 헤매다가 계속 심계가 하루종일 나타나고 오심구역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위기가 완전히 망해버렸다. 여기저기 자문도 구하고 주내상인것 같아 조호직씨에게 약까지 달였다.


"원장님 보시기에도 아무래도 검사를 해봐야겠죠?"

이상하다는 느낌이 차곡차곡 쌓여 한계에 다다랐을때, 내과 샘을 찾아갔다.
검사를 해봐야한다는 의견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원장님, 지금 OOOO에 바로 가실래요? 제가 그쪽에 알아봐드릴께요."



내과샘이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고 얼마 뒤, 근처 대학병원에 30분 내로 가면 진료볼 수 있도록 조치해주셨다.

한의원으로 올라가서 간호사에게 오후 4시까지 돌아올테니 환자들 전부 다 빼놓으라고 해두고 종병으로 향했다.










그리고 1시간 후 나는 환자복을 입어야 했다.


이거 좀 웃긴데, 분명히 오전엔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오후엔 환자복을 입고 있다. ㅋㅋㅋ
7살때 수술한다고 입어보고 거의 30년만에 처음 입어보는 옷.


"이 옷 괜찮다!!!!"

"너무 편해!!!!!!"

퇴원하면 한벌 사서 집에서 입어도 되겠어. 단점이 있다면 바지 끄네끼 묶고 풀고 하는게 좀 귀찮다는 정도...



+++++++++


"저 왠만하면 입원 안하고 싶은데요..."

과장의 말은 편안하면서도 단호했다.

"지금 입원하세요. 이 수치로 2주 넘어가면 치명적인 상태로 빠져요. 그땐 손쓸수도 없고. 지금 제가 앉아서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수치상으로 보면 너무 안 좋고, 일단 검사부터 더 해봐야하고 이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깐 오늘 입원하세요."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이번주 휴간데, 입원해서 무슨 병인지 한번 알아나보자.'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마침 그날 동생이 휴가를 떠나서 간병인이 없어!!




"저기 3천만원 보증각서에 보호자가 싸인하셔야 입원 가능한데요"

입원계 직원은 보호자를 데려오라고 했다.

"아, 걔 지금 휴가 갔는데요."

"전화통화 되세요?"

"지금 전화기 꺼져있던데요."

"각서에 사인 안 하시면 입원 안돼요."

"저 병원비 안 떼먹을께요"

한참 고민하던 입원계 직원의 최종 제안...


"그럼, 내일까지 오셔서 사인해주셔야해요."


원래 입원하면 쓰레빠나 세면도구 같은거 간병인이 다 챙겨줘야 제대로 그림이 나오는데, 이거 내가 다 일일이 챙기고 가방꾸러미 들고 돌아다니니깐 영 폼이 안 난다. 안 아픈 놈 같고 ㅋㅋㅋ












집에 갔다와서 짐 정리 대충하고 병실침대랑 막 친해지려고 하는데 밥이 왔다.
이 밥상을 보는 순간 드는 생각

"예비군 훈련가서 먹던 밥이 더 맛있을 지도 몰라!!"

희한하게 입원일수가 지속되고 계속 먹다보니 이 밥도 맛있어졌다. 퇴원 무렵엔 밥때만 기다려졌어. 인간의 적응력이란!!





병원에 입원하면 가장 먼저 해주는 일은 족쇄채우기.




이 장치는 환자가 어디 도망 못가게 만드는 수갑 역할을 한다.






수갑에 연결된 쇠뭉치. 어디 가려면 이거 끌고 다녀야 한다. 안 아픈 사람도 이거 끌고 다니면 순식간에 몸 속 어딘가가 아파질껄?
거기다가 치명적으로 이렇게 아이브이를 달아놓으면 웃도리를 못 벗기 때문에 샤워를 못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 하면 웃도리를 벗고 샤워해볼까 궁리해봐도 묘수가 없다.
에라이~ 씻지 말자. 결국 입원기간 내내 머리까지만 감았다. 악..더러워! ㅋㅋㅋ









하루 해가 지려고 한다. 
입원실 창밖은 고요하다. 한의원은 난리났다. 그리고 나는 수갑차고 편안하게 누워있다.



시간이 갈수록 병실생활에 적응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건 항온항습의 상태.




태양이 이글거리는 무더위. 하지만 창문 안쪽 공기는 선선하다. ㅋ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따사롭다.
실내는 24시간 에어컨을 틀어놔서 마치 가을날씨같다.
햇볕이 발가락을 간지럽힌다.
누워서 책보고 뒹굴거리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진짜 가을같다.







유성군이 휴가를 다녀와서 실어나른 책들.
그림 많은 책들로 엄선해서 가져오라고 지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늘 인생에서 특별한 해프닝_사건이 일어날때마다 일지를 꼼꼼하게 쓰는 버릇.
평소엔 일기를 잘 안 쓰다가도 여행가거나 다치거나.... 일상에서 벗어나면 꼭 일지를 쓰는 습성이 있다.






바깥 날씨가 짐작이 안 된다. 더울까? 습할까? ㅋㅋㅋ 나랑 상관없는 외부환경.









매일 저녁 유성군이 팥빙수를 사다 날랐다.
솔직히 말하면 팥빙수랑 책. 이 두가지 상품만 무한공급된다면 병원에서 3년은 살 수 있을 것 같아. 한발짝도 안 나가고 ㅋㅋㅋ




입원하면 매일매일 일상이 거의 반복된다. 회진돌고 밥먹고 자고...회진 밥먹고 자고....
날짜 감각이 사라져버린다. 의도적으로 날짜를 찾아보지 않으면 오늘이 며칠인지 잘 모른다.





마침내 긴 입원생활이 끝나고 퇴원하던 날 아침.
이 항온항습의 공간에 그새 정들었나보다. 섭섭하다. 허전하고.


 

다음은 일지를 바탕으로 투병과정 중에 본인이 환자의 입장에서 느낀 점이다.

## 환자복을 입고나서
내가 아파보니깐 이제 알겠다. 내가 그동안 너무 몸을 혹사시켰구나. 사실 화재 이후 여러 도움을 받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큰 도움들...
화재라는 갑작스런 족쇄에 발이 묶여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됐는데 심해에서 3년을 발버둥쳐야 겨우 수면 위로 탈출가능한 시나리오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수백명의 원장님들이 나에게 3년에서 2년으로 허우적거리는 시간을 단축시켜 주었다.

내가 받은 선물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시간을 아껴써야 했다. 화재 이후로는 좋아하던 산에도 거의 한번도 가지 않았고, 일요일에도 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매주 야학을 3군데 돌리고, 밤에도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퇴원하고 찾아보니 올해 틈틈이 읽은 책만 100권이 넘었다. 너무 무리했어.

건강이 참 소중하다. 이 문장을 여러분이 지금 읽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환자복을 입고 나서야 이 문장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머리로 이해되는 것과 몸으로 알아듣는 '체득'은 다르다.
인간은 모두 어리석다. 전력질주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있다. 회복되면 이제는 쉬엄쉬엄 살아야겠다.




## 내과원장님의 아이스브레이킹

내과원장님은 나랑 한 세대이상 차이나는 분이다. 노련한 경험을 가진 숙달된 내과의사.
이 분이 진료하는걸 자세히 보면 아이스브레이킹의 달인이다. 초진환자가 오면 병 이야기는 2분 안에 하지 않는다. 그냥 외모나 직업이나 어떤 점이라도 끌어와서 일단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 진료에 들어간다.
초진환자에게 첫마디로 "어디가 아프세요?"라고 던진다면 전희없이 삽입만 하려는 것과 같아.



## 양방시스템 속의 한의학

아, 나는 졸업하고 10년 동안 동네에서 소꿉장난하면서 그저 의사흉내 내고 있었구나.
종병에서 진료하는 스타일을 보고 느낀 점은 얘들 진짜 앗쌀하게 진료하는구나. 강력한 시스템. 시스템 안으로 들어온 환자는 확실히 책임지고 밖으로 튕기는 환자는 냉정하게 버린다. 버려지는 환자 중에 한의로 치료하면 꽤 반응이 좋을 것 같은 환자도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장기의 부전과 바이러스성 질환, 면역계 질환 등 양방에서 해 줄 게 없는 환자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진짜병'을 다루는 한의사가 있어야하고, 대접받으려면 실력부터 키워야하고 실력을 키우려면 페이퍼로 대화를 해야 하는구나. 술자리에서나 주고받을 내용으로 한방천국 양방지옥 외치면서 자위하거나 디씨에 안티한방 글이 올라오는거에 발끈하는것 모두 페이퍼 앞에 먼지덩어리만큼의 의미도 없구나.

법률적으로 종병에 한의과를 넣어야 한다! 제대로 트레이닝받은(전문의 종이 말고) 대화가 통하는 (양방 과들끼리도 말이 안 통하는 판국인데 한양방 간에 대화가 통하려면 당연히 마이너리티인 한의사가 먼저 저들의 대화를 알아먹어야 하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그런 진짜 선수급의 한의사들을 투입시켜야 하는구나.
양방의 응급의학과 정반대 편에 한의과를 배치시켜야 한다.
<응급의학과>-<내과계,외과계>-<한의과> 환자 토스의 세가지 축. 환자토스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흘러가야한다.
예를 들어 급성복증으로 응급의학과를 거쳐 내과에 입원한 환자가 위대장 내시경 다 하고도 원인을 찾지 못하면 한의과로 토스해야한다. 외과계에서 수술한 환자들도 모두 조리하는 과정은 한의과로 보내서 퇴원시켜야 한다. 동네한의원 만개 만드는 것보다 종병에 한의과 설치하는게 환자들에게 훨씬 큰 도움이 된다. 두통을 호소하는 입원환자에게 두통약 처방받을건지 침으로 컨트롤할건지에 대해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입원하는 내내 매일 나는 '스스로 협진'을 하며 내 몸에 팥침을 놓았다. 물론 호전도는 그냥 양방치료만 하는 경우보다 훨씬 빨랐다고 생각한다. (만고 내 생각이지만) 맘 같아서는 옆배드 환자들도 진료해주고 싶었는데 ㅋㅋㅋ
bk박사의 지론은 종병에 한의과를 설치하고 선수들을 제대로 투입시켜서 국민들로 하여금 한의로 치료받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시대의 소명이라.


## 의사의 이빨은 찰랑찰랑거려야 한다
내가 환자가 되어보니 의사들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인턴, 레지, 펠로, 과장까지.
첫날 회진에서 과장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으응? 뭐가? 아직 결과도 안 나왔잖아.

그리고 이어지는 과장의 타진, 청진, 내 몸에 부종이 나타나는지 여기저기 확인해보는 과정.
토탈 20초도 안 걸렸지만, 과장이 직접 다 했다. 허걱.

그리고 또 한마디

"좋습니다"

아, 저 과장의 입술에 저 단어가 붙어있나보구나. 그리고 약 20초 정도 향후 검사 및 치료계획에 대해 짤막한 브리핑을 하고

"지금 OOOO 수치가 올라와있어서 내려야겠어요. 아시겠죠?"라고 확인한 뒤에 옆 배드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지금껏 진료하면서 저 과장만큼 꼼꼼히 체크하고 치료계획을 설명하고 환자가 알아들었는지 확인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환자 입장에서 '좋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니 결과가 좋든 안좋든 일단 맘은 편안해지는구나. 아, 의사 이빨은 찰랑거려야하는구나.


## 펠로우의 스킨쉽

여기 펠로우는 나랑 동년배다. 인턴은 눈을 반쯤 감고 다니고 유령처럼 나타나서 피만 빼고 사라져버리고, 레지는 형사처럼 나타나서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채 문진순서도 엉망이고,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나를 취조하는데, 펠로 쯤 되니깐 의사 티가 난다.
여유가 있으면서도 해박하고 친절하면서도 강직한 티칭.
친절, 위트, 유머, 미소는 늘 실력과 함께 겸비되어야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 펠로는 늘 회진후에 내 어깨나 무릎을 만져주며 용기를 주고 떠나는 버릇이 있다. 배울점이다. 사회에서 만났으면 너랑 나랑 바로 친구먹는건데...지금 나는 환자복을 입고 있구나. ㅠ.ㅠ


## 환자와의 관계

불편한게 있느냐 , 안 심심하냐 등등의 환자의 심리상태를 한큐에 풀어주는 대화(키워드가 포함된)를 해야하는구나.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희망, 용기, 목표, 예후를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
내가 환자가 되어보니 불안, 걱정이 저절로 많이 생기고 특히 간병인이나 가족의 위로가 중요하구나. 특히 아무리 사소한 병이라도 입원 첫날은 환자 곁에서 많이 놀아주어야겠다. 그리고 앞으로 친구가 아프게 되면 꼭 문안엽서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진료시간

인턴은 유령처럼 새벽5시반에 나타나고, 6시 40분에 레지던트가 오고 7시 반에는 과장이 오고, 저녁 6시반에는 펠로가 온다. 하루에 4명의 의사를 만난다. 내가 갖고 있던 진료시간의 개념: 9시부터 7시...라는게 어찌보면 '신성한 소'였구나. 그냥 내 맘대로 진료시간 정하면 되는거구나. 그 '신성한 소'를 죽여야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조호직씨는 훌륭한 도살자다!! 조씨는 8시부터 진료한다.



## 항온항습

입원실의 항온항습의 공간에 살아보니, 외부온도나 습도의 변화가 인체에 가하는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크구나. 아, 항온항습에서 인간의 컨디션이 급속하게 회복되는구나라는 걸 느낀다. 그동안 한의원의 실내온도를 너무 낮게 설정한 느낌이 있다. 딱 가을날씨처럼 더운지 추운지 느낌이 없는, 에어컨 켰는지 껐는지 모르는 항온으로 맞추는게 중요하구나.


## 도제식 교육

내가 가장 충격받은 장면. 퇴원하던 날. 과장의 아침 회진에서.
나는 누워있고, 레지, 펠로를 옆에 세운채로 과장이 10분간 최근 이 질환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이 환자분 말인데, 이 병에서 가장 중요한건 환자 나이야. 그래서 앞으로 환자 볼때 000 0000인지를 주의깊게 확인하고 만약 50세 이상이면 매우 조심해서 봐야해. 내가 5년전에 어떤 50대 약사가 왔는데 000해서 결국 00대병원에서 0000하다가 사망한 례가 있어. 그리고 작년 일본학회에 가서 나온 이야긴데 우리나라에서 000이 많은 이유가 결국 00000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걸로 결론이 났어. 그러니깐 환자볼때 0000을 주의깊게 봐야해."

임상현장에서 과장이 20년의 경험을 '타임바인딩'해서 펠로와 레지에게 전수하는 도제식 교육의 현장. 환자를 직접 옆에두고 과장의 풍부한 경험을 들려주고 첫 환자를 볼때 주의사항과 핵심체크 포인트를 요약해서 설명해준다. 책으로는 절대 전수될 수 없는 타임바인딩의 현장을 목도하다.

책만 보고 로컬에 바로 투입되는 건 '소꿉장난'이지. 나는 천둥벌거숭이였어! 천둥벌거숭이의 10년간의 소꿉장난!!

도제식으로 환자를 앞에놓고 교육을 시켜야 환자의 수많은 증상과 요소 중에서 핵심적인 사항과 개념을 캐취해낼 수 있는 진짜 의사가 되는거야. 환자가 이마빡에 나 무슨병이요하고 써오는 경우는 없지 않냐.
그리고 타임바인딩. 이게 없으면 나같은 한의사를 100만명 배출시켜도 모두 다 맨땅에 해딩이야. 선배의사는 후배들을 위해 마땅히 자신의 경험을 전수해야해. 그게 없는 집단은 결국 모두 헤딩만 하다가 멸망하지.



##  한분야를 파자

한의사들은 2만명이 너무 넓은 곳을 여기저기 파헤치고 있어. 양방은 한 놈이 한분야만 파는데 그 구멍이 수천개라는 거지. 게임이 안되잖아. 한의들의 만병통치식 진료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어. 무슨 분야든 만시간이 걸린다고 하잖아.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깊이 파야해.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소꿉놀이하면서 동네에서 푼돈 긁어모으며 청춘을 써버리지 말자. 악마의 거래다.



## 팥침의 위력

이번 투병하는 내내 매일 내 몸에 침을 놨는데 느낀 점이 많아. 부살을 계속 놔도 안 되길래 코지코피 아나방으로 놨는데 바로 듣는거야. 이런 제기랄. 물론 그때는 입원하기 전이었지.  아, 이거 뭔가 좀 이상한 놈한테 걸렸구나 싶었어. 특히 어떤날은 요통이 극심했는데 큰집처방을 맞는 즉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효과가 좋았어. 여기 뭔가 있구나. 더 파야겠다. 죽을때까지 파면 뭔가 나오겠지. 내가 진짜 일반 환자라면 이 침을 계속 맞겠어!!
입원하는 내내 내 몸에 침질하고,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더 안 아프게 놓게 되는지 확실히 알겠더라고. 손발은 피투성이됐지만....ㅋ 기계는 절대 사람손을 못 넘어선다는 것도 느꼈어. '진짜환자"에게 '진짜치료'하는 '진짜의사'가 되자. 더 공부하고 경험을 쌓아야겠다고. 소꿉놀이하면서 의사흉내내는 짓은 이제 집어치우자고.
조기축구 그만하고 필드에서 뛰는 선수가 되어야 해. 솔직히 지금까지 어디서 필드인지도 몰랐어.



## 청결

입원하는 도중 모간호사의 처치를 받았는데, 간호복이 너무 더러운 거다. 으악!!! 눈이 똥그랗게 떠질 정도로 더러웠어.
아, 병원은 고급인테리어보다 청결이 최선이구나! 더러운 간호사 복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그 간호사가 찌르는 바늘까지 오염되었을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 제대로 경험하다.
가운이나 간호사옷은 늘 하얗고 빳빳해야 하는구나. 인테리어에 수천만원 때려붓는것보다 옷 깨끗이 빨아입히는게 훨씬 강력하구나. 우리 한의원 환자복도 늘 깨끗하게 빨아입혀야 겠다. 시트도 자주 빨고...
병원에서 청결이 가지는 의미를 새삼 느끼다.



## 일못하는 것

원래 아이브이는 3일 정도 쓴다. 그런데 내 담당 간호사가 미숙해서 일처리가 엉망이다. 빼먹는 것 투성이고, 아이브이에도 계속 피가 새도록 놔두고 그거 뚫으려고 수액 주입하다가 안 되면 또 찌르고....그렇게 해서 나는 매일 아이브이를 새로 찔러야했다. 뭐 이런 간호사가 다 있어!!!!
착하고 친절해도 일 못하는건 안돼. 여긴 직장이지 학교가 아니잖아.
아무리 한의사가 친절하고 착해도 일 못하는 한의사는 존재가치가 없어. 제대로 능숙하게 배우지 못하고 현장에 투입되거나 투입시키는 것은 범죄야.
사실 나도 간조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고 미숙한 상태로 현장에 투입한 적이 많아. 그냥 일하면서 배우는거지라는 안일한 마음 상태로 그랬는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잘못인지 몰랐네.
내가 당해보니 알겠어. 지금도 내 팔뚝에 구멍이 아주 많아 ㅠ.ㅠ

## 호칭
간호사들끼리 언니, 00아 이렇게 부르는거 절대 금기야. 내가 환자가 되어 호칭을 들어보니 이것만큼 불안한 것도 없네. 나도 간조들 이름 막 불렀는데, 이제 그러지 말아야지.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으면 환자가 불안하게 느끼게 되는구만.

 

## 피빼기
짜장면 사주시던 김원장님이 늘 내게 해주시던 말씀이 있었어. "삼리 하나를 찔러도 정성을 다해서 찔러라. 니 손끝 하나하나를 환자가 다 알아챈다." 그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었어. 그냥 교과서에나 나오는 고리타분한 말로 들렸지.
그런데 내가 아침마다 인턴녀석에게 피뽑기를 당해보니깐 알겠어. 내 팔뚝을 찾아 바늘을 쑤셔대는 인간이 하루에도 서너명이 넘는데, 이 사람들이 내 팔뚝에 고무줄을 채우는 순간부터 바늘을 찌르고 피를 뽑아대는 과정에서 느끼겠더라니깐. 이 녀석이 나를 얼마나 안 아프게 해주려고 노력하는지를...
결국 가장 능숙한 녀석은 인턴이었어. 늘 피곤에 쩔어있고, 눈은 반쯤 감고 다니는 애였는데, 피뽑기는 그 어떤 간호사보다 잘 했어. 아, 내 환자들도 이렇게 다 느꼈겠구나. 대돈 소상 상양 콤보.... 환자는 내 손길을 다 알아채는구나.


## 기다림

환자를 이유없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됨. 불가피하게 늦어진 경우는 반드시 최대한 신속하게 알리고 이유를 설명해야 해. 진료보다 우선하는게 순서 지키기.
나도 시티가 고장나는 바람에 졸지에 이틀 굶는 참사가 일어날뻔 했어. 레지가 당장 뛰어와서 늦어진다고 알리더라고. 안 그랬음 정말 화 많이 났을꺼야.




## 대화가 필요해.

양의랑 한의랑 말이 안 통해. 서로 너무 모르거든. 아메리카 원주민이 그랬다잖아. 스페인 침략자들이 인간인지 신인지 알아보려고 불에 태워보려고 했다고. 반대로 스페인 침략자들은 원주민이 짐승인지 인간인지 알아보려고 했다지. 지금의 양한방 모습과 오버랩되지 않아?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의 한계점에 이르렀어. 말도 안 통하는데 무슨 협진이야. 일단 대화가 돼야지. 만나야해. 지금 양한의가 공식적으로 만나는 창구가 보건소 공보의들 밖에 없잖아. 일단 죽이되든 밥이 되든 같은 지붕안에 쑤셔넣어놔야해. 지금 종병 필수설치 과목이 7개인가 그런데 여기에 한의과를 반드시 추가해야해. 삼복첩 지랄떠는 것보다 우선 종병에 한의과부터 집어넣고 선수급 한의사들로 하여금 환자를 돕도록 해야해. 내가 입원하던 병실만 해도 팥침 놔주고 싶은 환자가 여러명 있었어.
한의가 블로킹시키는 것은 잘 못하지만 액티베이트시키는데는 양의보다 훨씬 뛰어나. 장기나 기능의 부전, 자가면역질환, 바이러스질환 등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반드시 도움이 된다고 믿어.

## 궁금해하기 전에 설명하자

참 이 병원도 설명 안해준다. 지금 받는 처치가 뭔지 약이 뭔지 효과는 뭔지? 언제까지 해야되고 예후는 어떤지 아무도 설명을 안 해준다. 특히 씨티를 찍는 날 하루종일 굶겼는데 나는 왜 굶어야하는지를 몰랐다.
결국 포항에 있는 해욱이형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다.

"형 왜 굶겨요?"

"아, 그거 조영제 혈관에 주입하다가 토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그래"

"저 안 토할 자신있는데 먹으면 안돼요?"

"으응, 그건 니가 조영제 함 맞아보고 피드백 하자꾸나 ㅋㅋㅋㅋ"

실제로 조영제 맞아보니 왜 굶기는지 알겠더라고 ㅋㅋㅋ 뜨거운 물이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머리로 복부로 확 뿜어지는데 아우....

돌이켜보니 나도 환자들에게 너무 설명을 안 했었구나. 왜 침을 이렇게 맞는지 왜 이렇게 해야하는지 언제까지 치료하고 목표가 뭐고 섭생은 왜 이렇게 해야하는지....
내가 환자가 되어보니 환자가 물어보지 않는다고 해서 안 궁금한게 아니었어. 당해보니 답답하다.



## 예후에 있어서 숫자의 중요성

하루에 피검사를 두번 돌릴때도 많았다. 매일 숫자로 호전 악화되는 정도가 보이니깐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다가온다. 얼마나 호전되는지 rom이든 압통이든 무조건 수치화해서 비주얼하게 접근해야 발전이 있구나. 양방진단이라고 무조건 배척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되는구나.
의료에서는 숫자가 참 중요하구나. 숫자없이 진료하는건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거구나.



## 목표의 공유

진료가 끝나면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고 현재위치가 어디쯤이고, 우리가 어떻게 서로 노력해야하고 앞으로 언제 다시 내원해야 하는지 '공유'를 하고 내보내야 한다. 그게 안되면 오면 오고 안 오면 안오는 갑다...'아 오늘은 날이 더워서 안 오는갑다' '오늘 김장해서 안 오나?' 이런 병원이 돼버린다.
"환자분 수치가 지금 140입니다. 이게 정상은 20 이하로 내려가는 게 우리 목표입니다. 다음 내원일은 00일이고 특히 0000을 지키세요"


## 위기의 중요성

그동안 동의보감에서 위기(胃氣)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내가 직접 당해보니 위기라는게 병의 예후에서 엄청 중요하다는 걸 알게되었다. 꼭 환자에게 밥맛을 물어봐야겠어.



## 노는 것에 대한 죄책감

병원에 있으니 마치 여행을 온 것 같다. 런던의 어느 호텔에 머무는 것처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내 모습을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아파서 죽는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겠다.
돈 조금 못 번것, 내 동기들보다 뒤쳐진 것, 인생이 엉망진창이 돼버린것에 대해 죄책감 갖지말고, 안 아프게 사는 것만으로도 80점 이상의 인생이다. 인생살이 너무 질주하지도 말고 넘어지면 탈난다. 의미있는 일에 쉬엄쉬엄 시간을 집중 투자하고 나머지는 놀고 쉬어. 거기에 대해 죄책감 가지지 말고 잘 놀고 잘 쉬는 것도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다. 앞으로 스케줄 짤 때는 쉬는 것도 넣어.


## 안타까운 사연

내 바로 옆 배드 환자. 40대 가장. 1남 1녀. 이 환자 역시 수치가 문제다. 레지던트가 와서 약을 증량해보지만 결국 수치를 잡지 못한다. 최후의 방법으로 미국에서 나온 신약을 써보자고 한다.
서서히 장기부전으로 죽어가는 환자. 희망이 없다. 레지던트가 미숙하다. 내가 옆에서 엿들어도 설명을 하는게 환자에게 너무 겁만 준다. 저렇게 설명하면 안되는 건데...
한알에 3만원이고 1년 약값이 천2백만원인데, 한번 먹으면 내성 때문에 끊을 수 없고, 성공율은 50% 정도다. 마지막 방법이고 아직 출시되지 않는 약이라서 희귀의약품센터에 알아봐야 한다. 최악의 상태도 염두에 두고 맘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결국 보호자들은 화를 내고 레지던트는 나가버렸다. 그 레지던트가 잘못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미숙했을뿐.
아, 겁을 안 주고 위험한 상태를 고지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특히 저 환자 일주일전까지 멀쩡하고 건강했었다는데 가족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환자는 또 얼마나 불안할까... 인간의 몸이라는 게 한방에 가는 수도 있구나. 허무하다.

그리고 또 한명의 환자.
70세 할머니. 입원 하루만에 퇴원통보를 받았다. 해줄 게 없다. 나가서 죽으라는 것이다. 현재 먹을 수 있는 것은 죽 50cc가 전부다. 퇴원통보를 받은 딸은 어쩔줄 몰라한다. 그냥 집으로 데려가면 환자가 죽음을 눈치챌 것이고, 환자는 지금 병고쳐서 나간다는 입장이고 결국 모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딸은 다른 병원을 알아보아야 했다. 이런 경우 집으로 모시면 결국 집과 응급실을 왔다갔다하다가 고생하다가 돌아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사회는 어느새 출생과 죽음의 의식을 병원에서만 치르게 되었구나.




## 공감력

입원하고 몸이 아프니 저절로 짜증이 늘어난다. 특히 옆배드에 문병온 가족 중에 아이들 몇명이 내 배드커튼을 제치고 구경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병실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리면....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하는게 인지상정 아인가. 나 또한 늘 주위에 폐를 끼치지는 않는지,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피해를 주면 마땅히 작은 사과와 성의를 표하여 무례한이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나는 늘 옳고 나의 행동은 늘 불가피했고, 나는 비판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무례한이 되기 십상이다. 이게 심해지면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로 간다.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 공감력이 떨어지는 것은 예후가 좋지 않다. 인간에게 있어 공감능은 지능보다 중요한 능력.


## 수간호사의 역할
로컬의 코디나 실장처럼 병동에서는 수간호사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의사에게 물어보긴 좀 그렇고 궁금하긴하고...그런 갭을 수간호사가 메우고 있었다. 회진 직전에 환자들 세팅하는 것도 수간호사가 하더라고! 허걱. 뭐 이런 에프엠스러운 병원이 다 있어.
그리고 환자와 보호자가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 정신적 지지, 격려, 예후, 안정감을 주는 것 까지 모두 수간호사의 역할이었음. 병동의 안방마님. 인상깊었음.


## 재밌게 살아야겠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 창문.

환자복 입고 비스듬히 누워서 병실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보니 세상이 달라보인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사소한 일에 에너지를 많이 써버렸어. 더 큰 그림을 그렸어야 하는건데....더 재밌게 흥나게 살았어야하는건데...순간을 즐겨...누워서 책펴놓고 "아...좋...다..."   "아...편안해..." 스스로의 감정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그 감정을 더욱 증폭시켜 느껴봐. 그 감정에 스스로 푹 빠져서 즐겨 그 순간을.
아, 맛있다. 아, 재밌다. 아, 좋아...아, 편안해....아..고맙다. 아 행복하다...


## 금식의 고통

씨티 찍는다고 두끼를 굶었더니 미쳐버릴 것 같았어. 아 밥먹는게 이렇게 행복한 거였던가? 내가 가진 소소한 모든 것(재능, 건강, 두뇌, 사지, 이목구비, 오장의 온전함, 부모님의 살아계심)에 늘 감사해야겠다. 밥먹는 것까지도 정말 행복한 거였어.




## 망각

병원에서 환자복 입고 느낀 감정들이 일상속에 파묻히다 보면 금새 또 잊게되겠지. 환자식별띠를  성게군 인형에 끼워놨어. 운전할때마다 보려고. (매일 아이브이 찌르던 바로 그 미숙했던 간호사가 이 띠를 안 잘라주고 퇴원시켰지 뭐야. 젠장...ㅋㅋㅋ)



<끝>


<별첨>

## 스팸전화 퇴치법

스팸전화 많이 오잖아. 광고, 은행, 카드사 등등에서 전화 오면 한마디만 해.

"저 지금 입원중이에요."

그럼, 상대방이 정말 진심으로 사과하고 최대한 신속하게 전화를 끊어주더라고...퇴원하고나서도 계속 써먹어야겠어. ㅋㅋㅋ

동양매직에서 전화도 한통 왔었는데, 작년에 정수기 구입한거 필터 갈 때 됐다고...
그래서 내가 그 정수기 설치했던 한의원은 불타버렸고, 정수기는 철거반애들이 훔쳐가버렸고, 나는 지금 입원중이다고 이야기했더니.....상담원이 이렇게 말했어.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시 전화 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정도로 사과할 필요까진 없었는데...ㅋ



-김씨는 현재 퇴원하여 자택에서 방바닥을 띠굴띠굴 뒹굴며 안정가료를 취하고 있으며, 진료는 16일에 복귀할 예정으로 알려져있음.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씨는 "첩보를 입수하고 안부전화주신 모든 선후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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