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Essays 2010. 9. 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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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요양병원의 급증으로 그동안 많은 한방병원들이 쓰러졌다.  아픈 부모를 모시기는 싫고, 양방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그런 환자들 덕분에 9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중소형 한방병원들이 요양병원들의 카운터 블러를 맞고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대학병원마저 비실거릴 정도니 얼마나 맷집이 약한지 알만하다.

최근 일부 한방병원에서 특정질환을 컨셉으로 광고를 퍼부으며 재기를 모색하는 분위기인데...

두달 전 쯤 동건이(가명)가 왔었다.
원래  bk박사님은 평범한 환자한테 음식지도 같은거 안한다. 지도하는 환자는 향후 30년 이상 언제든지 그 환자에게 전화걸어서 팔로업할 수 있는 레벨의 환자들만. (지금 일하는 직장에서 8개월간 일하면서 음식 티칭 해준 환자가 서너 명도 안 된다는.)

더군다나 "당신은 무슨 체질이다"라고 체질판정을 해주는 경우는 그보다 훨씬 더 적다. 진짜 평생 내 환자다는 생각이 안 들면 체질판정 같은거 절대 안한다. (요새 분위기가 체질의학에 거의 문외한이다시피한 한의사들이 너무나도 쉽게 어이없는 -점보는 것도 아니고 재미삼아(?), 뭐 사실 환자도 크게 기대 안하고 물어보는 것 같긴하다- 체질판정을 해주고, 아무도 책임도 지지 않는 세태인데 언젠가 큰 부메랑이 되어 한의사들의 목을 칠 것이다. 그러니 누구는 소양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소음인이라고 하고...환자는 에이 체질 이거 다 구라야! 이렇게 흘러가는거다. 궁극적으로는 체질판정도 종이 진단서에 의사 도장찍고 돈받고 해주는 쪽으로 나가야 사주카페같은 체질판정 분위기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체질을 틀리게 판정해줄 가능성이 있으니깐. 내가 허준도 아니고 말이야!' 사람이 하는 일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판정결과를 수정할 수 있는 그런-라뽀가 강한, 어 내가 소음인인줄 알았는데 소양인인 것 같아라고 말했을때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평생환자'가 아니면 해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자리는 페이라 언제든 떠나야하기 때문에 내 평생환자는 거의 존재할 수 없다고 보면 된다.

동건이는 체질판정은 안 해주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음식지도를 해주는 케이스였다. 워낙 상태가 안 좋아서..
다행히 3주 정도 잘 따라와주었고, 환자도 만족, 나는 더 만족하는 분위기였는데...

내가 갑자기 입원하는 바람에 거의 8월달 내내 치료를 쉬었다.

그 와중에 동건이 상태가 악화되어 어찌어찌 광고를 보고 모 병원에 가서 80만원(보름치)에 달하는 약을 지어먹고 오늘 저녁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우리 병원으로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물어본 결과 그 병원의 전술은 다음과 같았다.

1. 환자(동건이)에게 "당신은 00증, 00병이 아주 심각한 지경이다"라며 겁을 많이 주고
2. 고가의 한약을 권한 후에 (하루분에 거의 4만원...일반 한의원의 4배)
3. 처음 2주 동안 나빠질 수 있다고 미리 도망갈 구멍을 만든 후에
4. 약먹이고 나으면 좋은거고 안 나으면 '약을 더 먹든가 말든가'  떨어져나가는 건 어쩔 수 없고
5. 광고로 새로운 신환을 다시 끌어들인다. (다시 1번 반복)

동건이는 내일 위,대장 내시경을 하러 간단다. 얼마나 겁을 줬으면 20살짜리가 내시경하러 가겠다고 ... 그것도 대장내시경까지! 내 동생이면 대장내시경은 왠만하면 말렸을텐데...하다가 빵꾸나는 경우도 있는데 왠만하면 종병 가서 하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bk박사님의 진료 특징이 침환과 약환을 구분하지 않으며, 변증을 며칠 동안 하거나 심지어 몇주 동안 끄는 경우도 있다. 워낙 약실력과 임상경험이 부족하고 약환자가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 무엇보다 눈썰미가 없어서 한번 보고 몇분 안에 척척 처방 갈기는 걸 잘 못한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변증을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하는 한의사지싶다. 안습이다. ㅠ.ㅠ 그러다보니 환자 침 맞으러 올때마다 생각나는 거 물어보고 변증하다가 빠진거 있는지, 책도 찾아보고 나름대로 목표와 계획을 짜서 진짜 내가 줄 수 있는 85% 이상의 약을 시스테믹하게 주려고 노력하는데(결제가 약환의 진료 끝이 아니라 진료의 시작인 셈. 그러다 보니 결국 친구한테 약 지어주듯이 세월아 네월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일부러 약을 천천히 주는게 아니라 가족한테 약 줄때도 이런 스타일이다. 결국 못 고친다는 이야기. ㅠ.ㅠ) 그런데 그렇게 곱게 키운(3주째 경과관찰하며 변증을 해가는 중인데) 그 사이에 환자를 이렇게 어이없게 80만원을 홀랑 빼먹어버리고 한약안티로 만들어서 뱉어버리다니...(80만원이면 동건이가 도대체 며칠이나 알바를 해야 손에 쥐는 돈인지 알기는 하냐.)

내가 진짜 화나는 건 80만원이라는 돈이 아니라(막말로 약값이라는건 그 가치만 한다면 얼마를 불러도 상관없다. 가장 비싼 약은 효과없는 약이지. 가격이 높은 약이 아니니깐) 그런데 약을 보름치 주면서 "2주동안 상태가 나빠질수 있다"는 면피용 멘트는 용서할 수 없어.!!

이런 말이 동의보감에 나오나? 약먹는 내내 상태가 나빠질 수가 있나? 그럼 약은 왜 주는거지? 나 한의대 들어오고 17년동안 이런말 처음 들어보는데? 내가 로컬에 나와서 제일 싫어하는 말들, 한약은 원래 효과가 나중에 오래 있다가 나타나요. 이런 류의 개드립들...

(동건이가 하도 큼플레인하길래 그냥 그 병원도 치료 잘한다고 대충 얼버무렸지만......아무리 화나도 동업자니깐 선배님이니깐 시바. 나도 앞으로 본의 아니게 환자 망칠 수도 있고...이 좁은 바닥에서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 헤헤)



설거지.

양방이든 한방이든 다른 병원에서 단물 다 빼먹고 망쳐놓고 나 몰라라 내버리면 그 환자를 받아서 다시 치료하는 걸 전문학술용어로 설거지한다고 하는데, 이미 환자는 병원 치료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제대로 계획 세워서 끌고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 상태가 안 좋아서 약을 쓰려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 경우도 많고...이래저래 설거지는 어려운 일이다.


오늘 진짜 화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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