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편해욱

Essays 2010. 9. 2.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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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2003년 인물탐구 시리즈를 연재한 바 있다. 당시 한상구, 남운선, 전장훈, 최정락씨를 끝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김씨가 불나고 거지되고 병나고 입원했을때 가장 먼저 몇백씩 돈부터 부치고 전화한 놈들이 바로 남,전,최 이 녀석들이네. 그리고 이 녀석들 모두 다 한의원이 잘 안되고 가난하다는 공통점...특이한 점은 김씨가 잘 나갈때는 전화 한통 없고 김씨가 안 좋은 일 당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방 전화오는 특징이 있다.)


편해욱 샘이 관사에서 연초를 태우고 있다 2005 (c)bk

김씨가 경북도청에서 공보의 배치를 받던 날, 김씨를 데려가기 위해 대구까지 나온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때 남색 소나타2를 끌고 다녔는데, 김씨가 전군의 절친이라는 것을 알고 전군이 서식하던 칠곡의 오지 가산면까지 김씨를 태워주는 선행을 베풀어 주위를 훈훈하게 했다. 되게 까칠한 줄 알았는데 지내고 보니 형이 잔정이 많고, 전화로 안부도 잘 묻는다. (원래 공보의 대표가 신입공보의를 지소까지 배송하는 임무는 없었다.)




<전군이 미시클럽에 데려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해욱이형이 한숨을 쉬며 담배 한대..꼬실리는 중..2003년>


김씨가 공보의 1년차 때 해욱이형이 대표를 했는데, 매달 집담회(잡담회라고도 불린다)를 하는 날이면 대구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당시 외로움에 몸부림 치던 두마리 짐승, 김씨와 전군은 한번도 빼먹지 않고 개근하여 편샘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외에도 불특정한 회식이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정을 쌓아 해욱이형이 청도 00병원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자주 만났다. (알콜을 흡수하지 않고 만난 적은 별로 없었던 기억이 난다)



<주로 모이던 멤버. 좌로부터 정성엽, 이윤형, 김씨, 신용규, 구건회, 편해욱...일명 금요일날 달린다고 해서 금마회였는데, 7년이 지난 지금도 모인다. 김씨가 못가본지 3년째...언제 한번 대구 내려가야할텐데.>



진단방사선과를 전공한 해욱이형이 공보의를 마치고 진로를 결정했을때 우리는 모두 경악했다.

아산병원 브레인 펠로우.

경쟁률 제로.(당시만 해도 진방과 펠로는 복부가 인기였다. 브레인은 늘 콜을 받아야하는 스탠바이 상태로 지내야하고 바이탈과 깊이 연관된 분야라서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니깐.)

"아, 형 왜 거길 가요. 제일 힘들다는데"


몇달 후 전군과 함께 상경하여 해욱이형 원룸을 가봤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살림살이는 아령 두개뿐.
(해욱이형이 학교 다닐때 의대 산악부를 했었다. 용규형도 산악부를 했는데, 희한하게 산악부 했던 형들은 성격이 진짜 좋은듯. 인자 요산이라 했던가! 왜 우리학교에는 산악부가 없었을까.)


"형, 왜 집에 아무것도 없어요?"

"응, 어차피 당직이 300일 넘을꺼야"

그 후로 펠로우 하면서 고생 엄청했다는 후문이 들려오고...2년쯤 지나서 모대학병원에 조교수로 채용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전군도 공보의 마치고 개원하고 김씨도 개원을 했는데..

어느날 전화가 왔다.

"bk야 나 포항 내려왔다"

"형, 거기는 어떡하고요?"

"사표는 냈는데 아직 처리는 안 됐다"

"어디 병원 오셨는데요?"

"응 00병원"

김씨가 개원하던 동네에서 고개 하나만 넘어가면 있는 병원이었다. 지나가면서 리모델링하는 건 봤는데 2-300병상 밖에 안되는 작은 시골병원이다. 아니, 교수직을 때려치우고!! 그것도 이 시골에!!! 아마 그게 2008년 쯤 됐었나보다.

아, 이 양반 정말 연구대상이네. 아무도 안 가는 브레인으로 가더니 교수 자리를 박차고 이 시골구석에 내려오다니, 도저히 이해불가하다. 다음날 형이 한의원에 놀러왔다.

"형, 이 시골에는 왜 내려온 거라요?"

"환자 많이 보고 싶어서."

"예?"

형이 아산에서 트레이닝받은 중재시술은 최근 신경외과와 진단방사선과 사이에서 환자를 놓고 줄다리기가 한창인 분야다. 당시 영남지역에서는 경북대에서 가장 많은 시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머리에서 혈관 터지면 100km 이상을 구급차로 후송하기가 어렵다. 포항이나 울진에서 터지면 대구까지 싣고 가다가는 더 악화되기 때문에 왠만하면 포항에서 처치를 해야하는데, 당시만 해도 경북 동해안 인구가 거의 100만명에 달했지만, 중재시술을 제대로 하는 병원이 한 곳도 없었다. 알고봤더니 시골병원인 줄 알았던 그 00병원이 울진부터 울주군까지 스트로크로 짱먹는 병원이었다는 사실!!

"이 분야가 말야. 전국에서 누가 1년에 몇건 했는지 통계가 바로바로 뜬다. 내 목표는 ###이야"

"예?"

해욱이형이랑 가끔 만나서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지금 포항에서 뭐하고 있나..형은 교수자리도 박차고 이 시골에 내려와서 환자 더 보고 싶다고 전력질주하는데.....마치 내가 50대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내가 지금 씨를 뿌릴때지 수확할 때가 아닌듯한데...여기서 뭘 하고 있지?

'머리에 종소리가 울리는 느낌'

뎅~~~

아마 해욱이형 만난 직후였을 거다. 정신이 번쩍 든 김씨가 물치기 일체 다 버리고, 진료방식도 완전 다 바꾸었다. 더욱 가난해졌지만, 신나게 진료하던 시절... 물론 몇달 후에 불나버렸지만.ㅋㅋ


해욱이형이 원래 말투가 샤프하다. ㅋㅋㅋ 날카롭고 정곡만 콕콕 찌르기 때문에...

"어떤 분야건 몇년 이상 올인해야 그제서야 니가 뭘 모르는지 알게 되고, 무조건 고수 밑에 찾아가서 배워야 실력이 는다. 더 배워야돼."

(들리는 소문에 해욱이형이 이미 건수에서 경북대 병원를 넘어섰다고 한다.)

해욱이형이 포항에 내려온 이후에 원래 소속돼 있던 대학병원에서도 계속 근무해줄 것을 부탁하여 일주일에 절반은 포항에서 일하고 나머지 절반은 비행기 타고 서울 가서 일하는 생활을 했다. 출퇴근을 비행기로...!!



작년에 내가 불났다는 소식을 듣고 해욱이형이 불러서 어느 기찻길 옆 식당에서 물회를 한그륵 사주었는데 그때 나한테 해준 말이 두가지.

1. 매달 기름값 넣어줄테니 계좌번호 찍어라

2. 불난거 회복하려고 서두르다보면 더 큰 실수를 저지르니깐 일단 쉬어라.



"형, 아버지 한의원 어디에요?"

해욱이형 본가가 포항이다. 부친께서 한의사고, 포항에서 한의원을 하셨다해서 공보의 할때도 물어보고 그 이후에도 계속 물어봤는데 끝내 안 가르쳐줬다. 한번 놀러가고 싶었는데...(아마 해욱이형 성격에 한의대 왔으면 자퇴했을꺼야 ㅋㅋㅋㅋ)

늘 양방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바로 전화해서 물어보면 핵심만 콕콕 찝어서 설명을 해주는데 꼬부랑글씨는 김씨의 가방끈이 짧아서 잘 못 알아듣는다 ㅋㅋㅋㅋ 얼마전 김씨가 입원했을때도 양방 처치에 대한 해박한 정보를 제공하여 김씨의 투병생활에 큰 도움을 준 바 있다.


김씨의 바램이 있다면 해욱이형이 포항생활 잘 마무리하시고 경대 병원 과장으로 들어가는 것. ㅋㅋㅋ 한 10년내로 가능할까...하여튼 특이한 형이야! 늘 지켜보고 있으면 배울 점도 많고!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형이 한때 매그너스를 타고 다닌 적이 있는데, L4 앰블럼을 달고 엔진은 L6를 끼우고 다녔다. 보통 사람들은 L4엔진달고 L6앰블램을 붙이는데...ㅋㅋ 하여간 이해불가!! 돈도 거의 안 쓰는 것 같아!! 환자 보는 낙으로 사는듯...당분간 포항에서 머리터지는 사람들은 정말 복받은 것.)


무엇보다 김씨를 서울로 올려보낸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 사람. 늘 감사하다.<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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