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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나온 책이다. 이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는 3인을 꼽자면 서울대 신동원, 김호, 연세대 여인석을 꼽을 수가 있다.
이 책은 김호의 박사학위 논문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그런 류의 책이다. 동의보감을 연구하는 한의학자라면 10독은 해야할 책으로 생각한다.


15,6세기까지 조선인들은 한약재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명나라에서 수입해야하는 한약재가 너무 고가였기 때문에 당재(중국산)를 향약재(국산)과 대응하는 작업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묵제일기>를 보면 주로 약보다 침으로 치료하는 사례가 나온다. 약재를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침이 선호되었고, 침을 쓰더라도 지금처럼 경혈에 놓는 것이 아닌 중로 종기를 째는 외과도구로 활용되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가의 당재를 대체하여 향약재의 활용이 활발해지면서 약재를 이용한 치료가 보급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처방전 용량을 낮춰 약값을 낮추려는 노력이 보인다는 점이다. 허준은 1첩의 중량을 줄이기 위해 가급적 용량을 줄여서 처방하도록 권하고 있다. 이런 노력은 동의보감 뿐 아니라 고사촬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bk박사님 조사에 따르면 임진왜란당시 부산전투에서 전사한 조선인들의 유골크기를 미루어보건대, 현대인들은 동의보감 처방보다 약 30% 이상 증량해서 처방해야 동일한 효과를 보일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Gisan Medical Journal 2010/02/24 일자

위의 연구에서 박사님께서는 75kg인 환자는 하루 3첩! 100kg인 환자는 하루 4첩을 투약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허준에 대한 저자의 탐색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는다.

허준은 1539년에 태어났다.
허준의 아버지는 허논이다. 형제로는 본처자식 허옥, 본처에서 태어난 누나 두명, 그리고 허준, 자기 동생으로는 서자인 허징(다른 첩으로부터 태어남)이 있다.

허준의 아버지 허논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지역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허준은 양반가문의 서자출신이다.
허준의 어머니는 김씨부인(김욱짐의 서녀출신)이다.

허준은 전라도 담양, 경기도 파주, 서울시 가양동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성장지역은 전라남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훙에도 허준의 젊은 시절은 호남 지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호남 인맥이 중요했다. ,미암일기에 보면 허준이 나주에 살던 나사침 집안을 자주 방문했고, 해남 담양에 거주하던 유희춘과 알고 지냈다.
나중에 유희춘의 로비로 내의원에 낙하산인사로 들어가게 된다.
허준의 젊은 시절 서울로 출사하기 전에 호남 지역 사림들, 특히 서경덕 계열 학풍을 이어가던 학자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정통 주자학은 아님)
그리고 이후 파주 지역에 살면서 (허준 묘소도 파주에 있다.) 파주 일대의 서경덕 계열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유희춘은 1569년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한다. 허준 나이 30세!!!! (이미 그때 서울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당시 내의원 최고 탑클라스는 양예수였다.
허준보다 양예수는 십수년 이상 선배였다. 양예수는 당시 최고 어의였고. 그가 남긴 의림촬요가 훗날 동의보감의 기초가 된다. 당시 양예수가 나훈아나 이승철이라면 허준은 허각 정도 될까...

양예수 의학의 특징은 도가다.
허준 역시 양예수로부터 도사적 성격이 농후한 의학 이론을 전수받았다.

양예수의 맞수는 어의 안덕수였다.
양예수는 인삼같이 독한 약(준제)를 사용하기를 즐겼고, 화끈하게 효과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안덕수는 이런 양예수를 비판하고 효과는 느려도 사람 상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평판은 안덕수가 더 좋았다.

양예수는 자신의 지지세력 배출을 위해 허준을 선택했다. (양예수와 허준은 내의원 안에서도 인삼, 부자 등 한약을 독하게! 강하게! 준제를 애용하여 속효를 보고자하는 스타일이었음. 훗날 정조로부터 이런 부분에 대해 비판을 받았음. 그럼 도대체 허준을 비판한 당시 내의원들은 얼마나 순하고 느린 약을 썼단 말일까. ㅠ.ㅠ)

허준 36세, 드디어 왕을 진찰하게 된다.
1581년 42세 맥경을 교정 출간한다. 
1590년 51세 광해군을 고쳐주고 당상관에 오른다! (사간원이 서자인 허준에게 환수하라했으나 선조가 강하게 밀어부침.) 선조로부터 의서 정리에 대한 언질을 들은 시기임.

15세기에는 향약집성방처럼 '중국 처방의 수집'이 가장 절실한 과제였는데 막상 처방만 모아놓고 보니 이론이 없어!!이론의 부재가 수집된 처방의 체계적 정비를 어렵게 하고 있었음. 그래서 금원사대가 의학이론을 수집해서 책을 펴냈는데 그게 바로 의방유취! 세종이 편찬했는데 무려 365권!! 이걸 누가 다 읽어보냐고 ㅠ.ㅠ

16세기 후반에는 이론과 처방의 '조선화'가 당시 가장 절실하던 과제였음. 임상과 이론이 적절한 '분량'으로 압축되어 결합된 의학서적이 절실히 필요했음. 그래서 나온 시대적 산출물이 바로 '동의보감'임.


1592년 허준 53세. 임진왜란 발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 (이때 양예수는 나이가 많아 못 따라감. 거의 70 노인이었을 것임.)
임란 이후 모든 침구시술은 허준이 도맡아함 (김남수 일당들이 허준은 침을 놓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록을 조금만 읽어보면 완전 쌩구라인 것을 알 수 있음.)

1596년 선조가 종합 의서 편찬을 허준에게 준비하도록 명령함. 허준은 정작, 양예수, 김응석, 이명원, 정예남 등으로 편집국을 만들고 편찬기준을 마련함.

1597년 정유재란 발발로 의관들 모두 해산.

허준 61세, 1600년 양예수(70대중반으로 추정. 장수하셨네~)가 사망함. 허준이 명실상부한 내의원 1인자로 등극. 이후 현직에서 거의 은퇴하고 동의보감 저술에 매달림.

1601년 선조가 "야 일단 급한거라도 정리해라. 한글로도 만들어라!"라고 명령해 언해구급방, 언해태산집요, 언해두창집요을 편찬함. 동의보감 단독 집필을 선조가 명령함. 이때부터 선조가 죽기전인 1608년까지 50%를 쓰고 나머지는 귀양살이하면서 1년반만에 50%를 다 씀. 결국 귀양살이를 안 했으면 동의보감을 못 썼을 수도 있었음.

1608년 선조 사망. 사간원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함.
1608년 3월 광해군 즉위, 허준(당시 나이 69세. 손주보고 노실 상노인이신데 ㅠ.ㅠ) 파직됨.

1608년부터 1609년 11월까지 귀양살이와 복귀를 되풀이함. 귀양살이 중에도 도성을 출입하며 여러 의서들을 참고하여 동의보감을 준비함. 이때 허준이 본 궁궐내 의서가 500권임. 워드프로세서도 없이 이걸 한권으로 편집해내다니 엄청난 것임. (중국에서 인정하는 한국 의서가 딱 두가지임. 동의보감과 허임 침구경험방)

1610년 허준나이 71세!! 드디어 동의보감 완성!!! (정열과 열정의 할아버지!!! 귀양살이 도중에 완성하시다니!!!)

동의보감의 도교적 양생론이 들어간 내경편은 정작의 도움이 컸다. 편찬 초기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에만 관여했으며 임란 이후에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1613년 신종 전염병이 발생하자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 저술, 허준 나이 74세!! 정열적인 할아버지!!!

1615년 76세로 별세.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율동면 하포리 산 129번지 (허준의 아들과 동생이 모두 파주 목사를 지냄)



신형장부도는 왜 측면인가? : 장부보다 두뇌와 척추를 중요하게 보여주려고 그랬다. (기존에는 머리가 없는 정면 장부도도 많다)
동의보감 신형장부도는 <의학입문> <만병회춘>의 도형과 가장 근사하다. 허준은 <만병회춘> 장부도를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허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두뇌와 척추 사이를 흐르는 정이다!!!! 뇌와 연결된 척추를 통해 생명 물질인 精이 온몸을 움직이고 있다!! 이게 허준 이론의 핵심이다.

두뇌를 니환궁이라 표기하는 방식은 도가식 전통이다. 도가에서는 뇌를 니환이라고 한다. 도가에서는 뇌수를 생명물질의 근본이 응축된 장소로 본다. 이게 <입문><만병회춘>과 다른 표기방식이다. (만병회춘에서는 장부의 정확한 모습을 묘사하려고 애썼지만 허준은 장상을 중시하되 기능과 정보를 표시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척추를 고리처럼 24마디의 사슬로 표현하였다. 척추가 24개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은 당시 의학지식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경추 7개 흉추 12개 요추 5개로 현대의학에서도 24개로 본다 ㅋㅋ)
꼬리뼈 부근인 미려혈을 표현한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둥글고 구멍이 9개가 있다는 특징을 자세히 그렸다. 이 미려혈이야말로 니환궁과 연결되어있는 말단구조로 水火의 기제가 작동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허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精의 흐름!!!!

자세히 보면 신이 척추를 통해 두뇌와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허준은 신을 남성의 정액, 여성의 자궁으로 보았다.

허준에게 장부도는 뇌수-척추-腎으로 이어지는 정수의 도로를 더 강조한 것이었다.

인체의 내외 구분 : 허준은 인체를 분류할 때 중요한 내경과 중요하지 않은 외형파트로 구분하였다. 精과 관련된 핵심적인 장부가 아닌 경우는 설사 물리적으로 안쪽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외형>으로 정리하였다. (예를 들어 뼈는 인체 내부에 들어있지만 별로 안 중요하기 때문에 외형으로 분류되었다.)

허준에게 精과 기, 신은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이를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 장부신형도를 그린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소아의 기준: 영아는 갓 태어난 아이. 소아는 3세 이하, 동자는 10세 이하를 지칭함.

18세기 후반 한양을 중심으로 痘科, 소아과, 부인과 등 수많은 전문 의원들이 활동하였다. (소아과만을 다룬 의서도 출간됨. 1749년 급유방)
이로서 조선후기의 한의학이 분과를 거듭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전문의 제도와 흡사)

동의보감 이후 실용화하는 차원에서 수민묘전, 제중신편, 방약합편, 마과회통 등이 출간됨.



모든 학문에는 클래식이 있다.
한의학에도 역시 클래식이 있다. 내경, 상한론, 난경, 동의보감, 동의수세보원 정도 되지 않을까.
특히나 동의보감은 16세기 후반에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까지 그 활용가치를 내뿜고 있다.

그런데 현대 한의사들은 얼마나 동의보감을 잘 현대에 맞게 구현하고 있는가 자문해보면 답은 궁색하다.

동의보감이라는 전자레인지가 있는데 현대에 맞는 정확한 사용설명서는 부재하다. 그래서 동보를 안 읽어본 한의사가 동보를 비판하고, 동보를 사본적도 없는 양방의사가 동보를 격렬히 비난하는 개콘스러운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그냥 지 생각에 '이럴 것이다'라는 가정 하에 망상배틀을 하는 것.

양방의사가 팝송가수라면 한의사는 성악과 팝을 혼합한 크로스오버 가수다.
크로스오버는 기본적으로 성악에 달통해야하는 베이스를 갖고 있어야한다. 그게 없으면 죽도 밥도 안된다.
성악을 갖고 현대인의 귀에 거슬리지 않게 좋아하도록 노래 불러야하는 거다.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양의사보다 한의사가 훨씬 어렵다. 왜냐면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야하니깐.

현대한의사들은 클래식에 대해 얼마나 정진하고 있는가?
클래식부터 잘 해야 한다. 크로스오버는 그 다음이다. 판소리가 안되는데 재즈랑 크로스오버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타난 게 고노사이보그학원이다. 최근 한의학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전국최초 한의사전문 보습학원 고노사이보그학원(학원장 bk박사님)에서는 향후 전략 프로젝트로 동의보감 사용설명서와 동의수세보원 사용설명서, 팥침 사용설명서를 시리즈로 연구한다는 내부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물론 강의나 출판 계획은 절대 없다. bk박사님이 나이 70쯤 되면 한번쯤 출판을 고려해봄직하지 않겠나하는 여지는 없지않다고만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희박하다.)

아무튼 허준과 동의보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김호의 이 책과 신동원의 조선사람 허준이라는 책을 읽어볼 것.
이제마를 알고 싶으면 지금은 절판된 이제마 평전이라는 책을 구해보면 된다. 이 3권은 한의사 필독서라고 생각한다.<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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