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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한의학이 내 인생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공대에 갔더라면? 내가 미대에 갔더라면? 내가 의대에 갔더라면?
(최소한 한의대에서 겪은 환경보다는 훨씬 더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냈을 거라고 지금도 믿는다.ㅋㅋㅋ)

나는 20대의 학창시절에서 열정은 고사하고, 인사이트는 접어두고라도, 스킬조차도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 그 환경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직도 분노한다.
1.열정
2.인사이트
3.스킬
(이 세가지 중에서 교수라는 직업에 있어 스킬은 진짜 기본 중의 기본인데...이마저도 부족한 경우가..ㅠ.ㅠ)

변소칸에 처음 들어가면 똥내가 진동하지만, 계속 앉아 있다보면 후각세포가 마비되어 똥내를 느끼지 못한다.
내 코는 이미 무뎌질대로 무뎌졌고, 머리는 썩어간다. 요즘 10-20대의 나의 쌩쌩하던 두뇌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중이다. 늙은 뇌. 슬프다.

이제 졸업한지 10년이 지나고 임상 10년을 채웠다. 이뤄놓은 것도 없고, 돈도 못 모았고. ㅋㅋㅋ 손에 쥔거라고는 화재로 그을린 책 몇권이 전부구나.
 아, 더이상 한의학이 내 인생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기 힘든 세월이 덕기덕기 쌓였다.  이제는 내가 한의학을 망치고 있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올해 졸업 10주년을 맞아 여러가지 프로젝트가 난립하였다.

'동의보감 사용설명서'프로젝트와 '허준의 목소리'프로젝트
 임상한의사를 위한 마성의 팥침 정리집
 만화와 표로 보는 동의수세보원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마무리지은 것은 하나도 없다.

임상 10년이면 이제 한의학이 나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할 시기가 지난 것. 이제 내가 너를 망치는 것이다.


가르침에는 3가지 레벨이 있다.
1. 공부를 하고 실력이 쌓이고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가면 '너무너무 가르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른다. 후배나 친구들 만날 때마다 이야기하고(물론 대부분 관심이 없다.ㅋㅋ) 내가 쌓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 치졸한 시기.

2. 그 시기를 지나서 계속 정진하다보면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시기가 온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다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앙큼하고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지???!!!!....더군다나 나는 지금 더 공부해서 쌓기에도 시간이 모자른데....

3. 위의 단계가 지나고 세월이 쌓이면 대가의 자리에 오른다. 자유로워지고, 비로소 여유롭게 웃으면서 남을 진짜 가르칠 수 있는 시기가 온다. 이때 출사표를!!

초학일수록 대가 밑에서 배워야한다. 갓 임계점이 넘은 사람에게 배우면, 가르치는 자가 지가 뭔 소리를 하는지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같이 망하는 지름길이다. 동반자살하는 것! (본2가 예과 1학년을 가르친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개콘스러운 일인가.)



무엇보다 대가는 쉽게 가르친다. 리처드 파인만이 일찌기 말했다.

"모름지기 대가란 아무리 어려운 이론도 초등학생도 알아먹을 수 있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다."


한의대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입시성적의 하락, 홍삼의 성장, 한의사들 수입의 저하가 아니라 '대가'들의 부재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갓 임계점을 지난 이들의 지나친 게으름으로 튀어나오는 수준 이하의 개드립과 망상 인 브레인질에 대한 분리수거의 부재....그런 망상 인 브레인질에 대해 시간당 2.5만원의 가치를 매기기도 한다.)

대가의 부재를 감안하더라도 임상 10년은 한의학이 나를 망쳤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다. 성적의 하락에 개탄하고, 교수와 선배를 욕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간다. 가난한집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들며 "아버지가 해준게 뭐가 있냐며" 성질 부릴 나이가 점점 지나가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망칠 차례... ㅋㅋㅋㅋ (운이 좋다면 설혹 망치지 않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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