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일어난 화재사건은 여러 사람들에게 각각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 거기 있던 동네 사람들에게는 "아 그때 병원에 불나서 불구경하러 갔었지. 그게 2010년이던가?"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있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구급차에 축 늘어져있던 우리 큰 간조의 뒤집어지는 흰 눈깔, 콧구멍을 막고 있던 그을음까지도 생생이 생각난다. 그 구급차가 KT사거리에서 신호등에 걸렸을때, 앞에서 절대 안 비켜주던 앞차량, 갈색 싼타페도 생각이 난다. (구급차가 뒤에서 울고 있으면 바로 바로 비켜라. 안 그러면 구급차 뒷자리에서 누군가 달려와서 당신 얼굴에 주먹질을 날릴지도 몰라. 그 구급차에 당신도 같이 누워서 가는 수가 있다.)
인간의 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게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서서히 잊혀지고, 아무리 최악의 사건이더라도 그 사건에서 뭐라도 하나 건질만한 점을 찾아낸다는 점이다.
1. 친구의 소중함
업장에서 불이 난 직후, 그 소식은 마치 전기 스파크가 튀듯이 나와 인간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어떻게 이런 소식은 이렇게 빨리 퍼질까. 마치 그 친구들이 모두 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며칠전부터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내가 불났다는 소식을 못 들으면 바보취급 당할 정도로 전파속도는 빨랐다. 바짝 마른 갈대밭에 불길이 번지듯이 불소식도 그렇게 퍼졌다.
그리고 나타난 12인의 용사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 매년 7월 27일 경에 김씨로부터 무언가 (음식물이든 과자든) 정기적으로 택배를 받고 있다면 당신이 바로 그 용사 중의 한명이다.(리바이스 형님은 주소를 몰라서 못 챙겨드리고 있다. 나중에 왕창.)
그때 병원의 불은 30분만에 진화됐지만, 김씨의 몸과 마음의 불은 소방관이 진화종료를 선언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 불길은 점점 더 번지고, 그 탄내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아마 내 포항고 동창들과 12인의 용사들이 없었으면 내가 사제폭탄 몇개 만들어서 9시 뉴스에 나왔을지도 몰라 ㅋㅋㅋㅋㅋ
2. 자연인 bk
불나기전에 내 호칭 앞에는 늘 한의사 000, 000 원장님 ,000 선생님 이라는 형식이 따라다녔다. 그리고 불나면서 그 호칭은 하이에나들에게 좋은 표식이 되었다. 만약 내가 그 전에 '건달 000' '호프집사장 000' 으로 불렸다면 하이에나들이 그렇게 달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한의사. 왠지 돈 많아 보이고, 윽박지르면 돈 다 내놓을 것 같고, 해외로 도망가거나 잠적하지 않고 한의원 다시 차려서 열심히 빚갚을 것 같은 착한 모범생 이미지. 거기다가 만나보니 숫기도 없고, 패닉상태에 어쩔줄 몰라하는 30대 초반의 어리숙한 초삥이 한의사.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좋은 먹잇감이었을까.
한의원이 없는 한의사는 더이상 원장님도 아니고, 한의사도 아니다. 그냥 불나서 가진것 다 날린 거지.
그리고 상연이 사무실에서 (과장대우 ㅋㅋㅋ) 컴퓨터 설치기사로 따라다녔을 때,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시선은 그냥 찌질한 컴퓨터가게 직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여름 푹푹찌는 교실 교탁 밑에 기어들어가서 랜선 하나씩 뽑아서 테스트하고 텅빈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아... 뭐 이렇게도 살면 되네. 시발 내가 한의사 안 하면 굶어죽나.
그 전까지는 길바닥 아무데나 턱턱 주저앉아서 바밤바 빨고 그러는거 잘 못 했다. 한의사니깐 욕도 잘 못하고...원장 체면 지킨다고 버럭버럭 하지도 못하고 ㅋㅋㅋ 주6일, 해가 뜨는 시간에는 늘 일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점심때 바람이라도 잠깐 쐬러 나가면 어찌나 불안한지 ㅋㅋ 원장실은 늘 감옥이라고 투덜댔지만, 막상 그 감옥을 벗어나니 쇼생크탈출에서 출감 직후 자살하는 영감처럼 너무나 바깥 세상의 햇살이 어색했다. 친구들 다 학교갔는데 나 혼자 땡땡이 치는 기분같은 것.
평일날 모두가 일하는 한창의 낮에, 나 혼자 할일도 없고 갈데도 없어서 어슬렁거리면 몸은 너무 편안하지만, 마음은 그게 너무 어색하다. 내 마음 참 요상하지. 빨리 원장실로 돌아가야할 것 같고, 간조한테 전화가 올 것 같은 환각이 들지만, 실제로 난 돌아갈 원장실도, 한의원도 없다. 날 기다리는건 하이에나들 뿐.
한의원 밖에 이런 세상이 있구나. 평일날 놀아도 되는구나. 아, 이게 백수라는 거구나.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공백이 있어 본 적이 없었거든. 고교생-대학생-부원장-공중보건의-개업원장-(그리고 갑자기)백수
이러니깐 어색할 수 밖에. ㅋㅋㅋ
그리고 느낀 것. 한의사는 나의 한때 직업이지, 그게 곧 나는 아니더라. 내가 그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더라.
나도 그냥 인간이더라. 나를 규정하는 학벌, 직업 이런 거 다 한순간에 날라가버리는 500원짜리 비옷같더라.
검찰총장도 을지로 지하상가 벤치에 눕혀놓고 입에 바밤바 물려놓으면 그냥 동네 찌질한 영감쟁이일 뿐이더라.
3. 환자
대부분의 한의사들에게 환자란 뭘까? 그냥 돈 만5천원 나오는 내 밥벌이수단?
아침에 출근하기 싫게 만드는 존재들. 귀찮고 싫지만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봐야하는 짜증나는 무리들?
그런데 내가 강제적으로 진료행위를 박탈당하고, 백수생활을 해보니, 내가 그동안 봤던 게 전부 소꿉놀이한거더라. 의사흉내내기 소꿉놀이.
아, 내가 이게 진료라는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남들이 개원하니깐 개원하고, 남들 하는대로 그냥 대충대충 그냥 그저그런 병원놀이를 하고 있었구나.
'아 시바 졸라 환자 보고싶네.'
문득 그 생각이 드는거다. 아, 한의사가 꽤... 썩... 괜찮은 직업이었네.
그리고 뒤따르는 수치심.
아 시바, 내가 진짜 아는 거 하나 없이 소꿉놀이 했었구나. 부끄럽다. 시바. 내가 진짜 공부 안했구나. 못 배웠구나. 스승을 안 찾았구나. 그냥 남탓, 학교탓만하는 그런 찌질한 지방개원의였구나. 내가 노력을 안 했구나. 내가 진짜 아는게 없었구나. 내 환자들에게 미안하다.
챌런저호가 공중폭발하듯이 화재와 함께 산산조각으로 흩어져버린 '내 환자'들
주변 원장님들로부터 '내 환자'가 자기 병원에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걱정을 해주고 가더라. 그 환자들 봐서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오픈해라.
그런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아 내가 그냥 멍청한 초삥이 원장에 쓰레기같은 진료를 했어도 '내 환자'라는 사람들이 존재했었구나. 내 병원 할때는 몰랐는데 그게 폭파되니깐 그 속에 숨어있던 존재들이 드러나는구나.
서울로 올라오던 날, 마지막으로 한의원이 있던 동네 한바퀴 돌아보는데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걸렸다. 내 앞 횡단보도로 눈에 익은 할머니가 지나가는데.... 우리 한의원에 도장찍던 이금자 할머니였다.
다리를 저는 걸로 봐서 어디 다른 병원에 침맞으러 가는가보다. 할머니 챠팅했던 기록들이 머릿속으로 스르르르륵 지나간다. 아, 내가 저런 사람들 다 버리고 떠나는구나. 그 때 더 잘해줄껄..
3. 돈과 법
화재 직후 부산사나이들(임진성옹과 리바이스행님외 친구 1인)의 도움으로 나는 모든 대화내용을 다 비밀리에 녹음해서 갖고 있다. 거의 하루종일 보이스레코더를 차고 다녔고, 녹음파일만 2기가 쯤 된다. 그리고 그 녹취파일들은 하이에나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다.
설마 이렇게 어리버리한 원장이 화재 직후부터 모든 대화를 다 녹음해놨다고??? 정말??
정말이다. 그 안에는 화재로 고통받는 한의원 원장을 협박하고, 겁주고, 거짓사실로 사기치고, 말도 안되는 논리로 (판사가 들으면 폭소를 터트릴 정도로) 연기하는 하이에나들의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지금도 갖고 있다. 평생 버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돈이었다. 돈.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더라. 돈 있으면 그냥 내 기억속에서도 "아 그때 그게 2010년인가 2008년인가 내가 한의원하다가 불난 적이 있었지. 아마" 정도의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결국 돈이 핵심. 모든 사건의 열쇠였다.
10여명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어떻게 제한된 원장의 돈을 더 많이 나눠가질까? 이게 나의 화재사건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법.
돈과 법이라는게 진짜 뭔지, 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구나. 내가 지금까지 살던 건 그냥 소꿉놀이였구나. 그냥 어린애였구나. 돈있어야 인간답게 산다. 그것도 아니면 법을 잘 알거나, 하다 못해 좋은 변호사가 불알친구거나...
세상 사는 데에는 힘이 있어야 인간취급받고, 짧은 인생이지만 쉽게쉽게 살다간다. 그 힘은 두군데서 나온다. 돈아니면 권력.
4. 염쟁이 유씨
얼마전에 연극 염쟁이 유씨를 보는데 중간에 시신을 수의로 똘똘 싸는 장면이 나왔다.
18년전 돌아가신 할배, 선린병원 지하 영안실에서 염할 때의 장면(장의사가 천석이요~ 만석이요~ 외칠때마다 아버지 눈에서 물풍선이 새듯 눈물이 줄줄 흐르던 장면)도 잠깐 생각났지만, 나는 무대위의 시신마네킹이 싸매질때마다 마치 내가 똘똘 싸매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내가 그때 연기에 질식해서 불에 타죽었으면 우리 엄마 아부지가 내가 염당하는 모습을 저렇게 지켜봤겠구나. 참 자식으로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불효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하이에나도 나도 니도 다 죽는다. 뭐 천년만년 살 것 같나. 내랑 같이 졸업한 형님들 중에 두분이 이미 이 세상 떠나셨다. 내 후배들도 몇몇 안 보인다.
똑바로 살자. 바른 생각, 깨알같은 인생의 잔재미, 꼼꼼한 효도, 남들 하는거 다 해보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진료해서 '내 환자' 많이 만들고, 돈 많이 벌어 좋은데 많이 쓰고 나서 염당하자. 그리고 좋은 친구 많이 사귀고, 잘해주고 잘 지내자. 그리고 절대로 부모보다 먼저 죽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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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본인 화재로 고생하신 12인의 용사, 20여명의 포항고 동창들, 대학 동기들, 동대 한의대 여러 선후배들, 동국한의대 포항시 동문회, 포항시한의사협회 이사님들 사무장님, 저랑 얼굴 한번 본 적 없는데도 주머니 털어주신 700여명의 한의사 선생님들, 세간살이 다 내다판 40여명의 모사진동호회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꼭 다 갚겠습니다. 그리고 최준배 원장님과 이용양 선배님에게는 평생 못 갚을 빚을 졌습니다. 두분께는 갚을만큼 갚다가 못 갚으면 치울라고 합니다.^^
[2012년 4월 22일,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대화재1000일 기념식'은 우천관계로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