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지난 23일 저녁 예비군훈련에 끌려가는 김씨의 표정이 썩어 있다. (본지 독점)
김씨가 드디어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 2007년부터 시작된 6년간의 대망의 레이스가 막을 내리는 것. 이날 김씨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여 최고급 고무링과 이름표도 계급장도, 심지어는 예비군마크조차 없는 순수한 군복을 차려입고 동사무소로 향했다.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군복 자체에 내장된 강력한 방습 밀폐 보온 시스템이 작동하여 체온을 급상승시키며 혈중 혈당의 고갈을 초래하여 김씨를 짜증나게 했다. 그래도 마지막 훈련이라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동사무소 인근에 도착한 김씨는 미처 저녁을 먹지 못하여 근처 허름한 분식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라면 한개요"
20분 남았다.
라면이 나왔다. 허겁지겁 먹었다. 벌써 이번주 들어 라면만 4개째다.
계란이 덜 풀어졌다. 그래도 맛나게 흡입했다.
이 놈의 옷만 입으면 왠만한 음식은 다 맛있다.
아까부터 사장님이 주방쪽에서 계속 쳐다본다.
그리고 다가오시더니
"저기 밥 한 그릇 드려요?"
음, 이것이 바로 군복의 힘이다. 고맙지만 시간관계상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육군본부 규정집 206조 1항에 군인은 부당한 금전이나 물품을 수수할 수 없다고 명확히 나와있다.
소집 10분전, 라면 취식을 끝내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동사무소로 향했다.
그런데 문득 스치는 생각.
주민등록증.
'아차!'
아까 집에 그냥 지갑을 놔두고 현금만 몇장 챙겨왔다. 주민증이 없으면 총을 못 받는다. 우리 동대장이 깐깐해서 당연히 집에 갔다 오라고 할텐데..
시계를 봤다. 5시 52분. 이제 8분 남앗다.
집까지는 약 1km
뛰었다. 척척척척...
현재 대기온도 30도. 체온은 39도. 짜증온도 500도.
이 날씨에 구보라니.
2003년도 훈련소에서 뛰어보고 거의 10년만에 처음 전투화 신고 뛴다.
척..척...척...척...
전투화 소리에 맞춰 호흡도 가빠진다.
"헉...헉....헉...."
아, 시바....이놈의 신발은 뛰니깐 더 무겁다.
목구멍에서 피냄새가 올라왔다. 바짝바짝 탄다. 목이 따갑다.
시계를 봤다. 54분.
엉덩이에 염산이 묻은 것처럼 집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소매치기하듯 지갑을 낚아채고 튀어나와서 은실이에게 달려갔다. 도저히 뛰어서는 못 돌아갈 것 같다. 은실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동사무소에 도착.
입에서 단내가 계속 올라온다. 땀에 흠뻑 젖어 옷이랑 몸이 따로 논다. 모두들 편안하고 멍한 얼굴로 줄을 서 있는데 김씨만 홀로 벌겋게 상기되어 숨을 헐떡이며 샤워한듯 땀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교육시간. 우리 동대장님은 참 좋으신 분이다. 서울이라 그런지 교육의 차원이 다르다.
서부이촌동으로 위장전입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퀄리티가 뛰어나다. 아마 이스라엘 예비군들도 우리 동대로 오면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작전교육이 이어졌다.
전쟁이 발발하면 시내 각 사거리마다 진지를 만든다. 마대자루에 흙을 담아서 만든단다. 나에겐 3년째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서울시내에서 어디서 흙을 구한단 말인가. 3명 들어가는 1미터짜리 진지 하나 만들려면 1톤은 필요할텐데...그 많은 흙과 모래를 어디서 파나. 알수 없는 작전이다.
그리고 국방예산이 부족하여 예비군들 밥은 집에서 먹으란다. 전투 중에도 밥은 안 준다고 한다. 이것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아무튼 교육은 그렇게 끝이 났다.
늘 그렇듯 한강까지 걸어갔다. 아 지루하다. 오늘따라 왜 이리 멀까.
한강변에 가짜 진지를 만들어놓고 예비군 3마리씩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강을 지켰다....라기보다는 그냥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날이 선선해서 운동하러 나온 사람도 많다.
따라온 개도 많다.
예비군 3마리가 한강쪽으로 총을 들고 서 있으니 모두가 쳐다본다.
모두가 우릴 보고 웃으며 지나간다. 개도 우릴 지켜본다.
우린 강건너 먼산만 본다. 우린 지금 김포쪽에서 만조의 야음을 틈타 소형추진기를 몸에 감고 한강을 통해 침투하는 북한 특수부대 오중흡9연대 소속 침투조 10명을 가정하여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아마 우리 예비군들은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코스프레같은 훈련이 모두 끝나고 우린 모두 본부로 철수했다.
작년엔 싸구려 곰보빵이랑 이름도 듣도보도 못한 넥타를 받았는데 올해부터 6천원을 준단다.
6천원은 은실이 주차비로 모두 헌납하고 자택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실신해서 잠들었다고.
마지막 예비군까지 성실히 수행한 김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참으로 길고 지난했던 시간이었다. 이름표도 계급장도 없는 무명용사처럼 묵묵히 임무를 완수해서 기쁘다. 이제 이렇게 나이가 드는구나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하고 더이상 한강 코스프레를 안하게 돼서 기쁘기도 하고 감정이 묘하다. 앞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뿌리내리기를 기원한다."는 소감을 밝혔다.<서울/국방부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