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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환자 사이를 마치 정비공과 고장난 자동차처럼 받아들이는 경우(정비공이 살펴보면 어디가 문제인지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지 금방 정답이 나오는 구조)가 있는데,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의사-환자의 모습이긴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 그런 관계는 흔하지 않다. 로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환자는 자동차가 아니라 '대화가 통하는 생물체'-대부분 속을 알 수 없고 엄청나게 다양한 변수를 갖는-로 나타난다.


환자님들아, 왜냐고 묻지를 마라...나도 괴롭다. ㅜㅜ

 

오늘 아침 왜 내 오른쪽 편두통이 생겼는지 의사가 말해 줄 것 같나?

어제 저녁부터 왜 속이 부글부글한지 의사가 알려줄 것 같나?

 

왜냐고 묻지마요. 나도 모르니깐. 대충 둘러댈 수는 있지. 염증이 있나봐요~ 신경에 문제가 있나봐요~ 인대가 손상을 받았나봐요~

이건 마치 태풍볼라벤이 왜 하필 9월 13일 오전에 포항시에 215mm의 비를 내렸어요?라고 묻는거랑 같지. 변수가 3천개쯤 되는 질문이지. 거기다 대놓고 볼라벤이 큰 태풍인가보죠. 9월엔 큰 태풍이 오는데 고기압이 약해지면서 영남으로 많이 지나갑니다. 라는게 무슨 의미있는 답변이 되겠나.

 

특히 양방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검사장비(사실 한의원에는 피부 밑으로 1cm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검사루트가 없다고 보면된다. 한의원에서 특화하는 분야 역시 피부 아니면 구강, 콧구멍 몇cm 정도밖에 못 들어간다.)로 인해 한의원에 내원한 초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로부터 PI를 상세하게 청취하고 중요한 이벤트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가장 유력한 스토리를 추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원장들이 착각하는데(가장 적합한 변증과 가장 적방을 찾는 과정으로) 실제로는 그 반대다. 룰아웃의 형태로 배제해나가는 방식을 써야 변증을 할 수 있다. 언뜻보면 야바위꾼이 마구 흐트려놓은 주사위가 들어있는 단 하나의 종지그릇을 찍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사위가 없는 그릇 3개를 찾는 게임이야. 그게 임상이라구! 아무도 학교에서 이걸 안 가르쳐주더라고...시발. (특히 임상초심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어? 얘한테 정부족의 스멜이 오네. 그럼 육미줘야지. 이러면 너는 한의사가 아니라 면허를 가진 돌팔이다. 변증의 핵심은 하나씩 아웃시켜 나가야하는 거지, 너의 조잡한 대뇌 전두엽의 삘링으로 처방 긁는 게 아니여. 니 삘로 날리면 2차처방이 없거든. 원샷이 빗나가면 끝장이야. 절벽에 몸던져야한다고.)

 

 

그럼 PI를 잘 청취하려면 어떻게 할까?

간단해.

환자한테 물어봐.

 

 

 

 

 

(전형적인 갑과 을의 모습. 환자 의자에는 등받이가 없다. 가장 바람직하다.) 


"왜 이래요?"

 

환자가 의사에게 묻는 문항이 아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묻는 말이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파요? 왜 이렇게 허리가 아파요? 왜 이렇게 됐어요? 라고 물어보라고.

그럼 환자는 지 나름대로 그간 있었던 스토리를 하나씩 이야기하지. 대부분 의학적으로 의미없는 내용도 많지만, 그 중에서 중요 이벤트를 찾아내야해.


가끔 한의사 앞에서 손만 턱 내밀고 맥보고 맞춰보라는 애들이 있는데, 여긴 점집 아니므니다.

 

진료실에서 초진 환자가 한마디씩 PI에 대해 말해나갈 때 원장 머릿속에서는 지우개로 하나씩 하나씩 경우의 수를 지워나간다. 환자가 모든 발언을 마쳤을 때, 이미 당신 머리에는 모식도와 스토리와 처방전이 나와있어야한다. 

(환자가 진료실을 나가고 나서 책을 후다닥 찾아보는 원장님들. 여러분들은 아직 개업할 시기가 아니므니다.) 그리고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스스로의 오진율을 염두에 둬야 한다. 미국 양방의사들 오진율은 15%라고 통계가 나와있다. 한의 쪽은 오진이라고 판정할 기준도 모호한 게 사실이다. 워낙 각가학설이 난무해서... 나의 오진은 얼마나 될까? 50%? 80%? 100%?

 

자, 이제 환자에게 줄 처방도 정해졌고, 모식도가 나왔으니 티칭할 거리도 잡혔다.

 

그럼 환자에게 뭐라고 말할까?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지가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 원장들은) '아, 시발 환자에게 어떻게 약먹으라고 권하지? 어떤 멘트를 쳐날려야 나를 돈독오른 원장으로 보지 않을까?' 어떤 멘트를 날려야 내가 양심적이고 실력있는 원장으로 비쳐질까? 어떻게 이빨을 털어야 얘가 미소를 지으며 카드 꺼내서 한약값 80만원을 결제할까? 약값은 실장한테 그냥 맡길까? 70 부를까? 85 부르고 깎아줄까? 일단 한제만 먹어보라고 살살 꼬셔볼까? 아니면 침으로 일단 한 5일 정도 맞아보고 안 나으면 약 먹자고 꼬셔볼까? 아, 자신없는데... 한약은 원래 효과가 나중에 천천히 나타난다고 미리 밑밥을 깔아놓을까? 아...어떡하지? 어떡하지?

 

 

진리는 단순하다.

그냥...환자에게 물어봐. 그게 정답이야.

 

 

 

 

"어떻게 할까요?"

 

오해는 하지말자. 여기서 어떻게 할까요?는 몰라서 묻는게 아니라, 환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잠깐의 시간을 갖자는 의미이다.  

 

한의대 갓 졸업한 음경도 모르는(졸업한지 오래 됐음에도 음경도 모르는 경우도 여기 포함) 피래미들이 환자에게 약 먹으라고 그래. 


"약 드셔야겠는데요"


지가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환자의 선택권을 박탈한 채- 마치 한약을 당장 안 먹으면 못 고치는 병처럼.....심지어 복용기간도 정확하게 정해줘. 참 어이가 없는 일이지.


"한 3제 드셔야겠는데요"

 

그냥 물어봐. 어떻게 할지. 의사는 도와주는 사람이지. 명령하고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환자에게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어보라는 게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멘트야. 다양한 루트를 다 알고 꿰고 있어야 나오는 멘트거든.....침만 주구장창 놓는 여사님들은 이런 멘트 할 필요가 없지. 어차피 그냥 침이나 열심히 맞으러 나오라고 하면 되니까. 내가 파는 게 백반밖에 없는데 메뉴판이 뭐 필요하냐.

 

학생들 강의때도 강조했지만 숫자로 -몇일분 내지는 몇제- 복용기간을 통보하는 것은 곧 '나는 신이다'를 선언하는 거랑 같아.

 

흔히 불안한 환자들이 묻지.

 

"한제 먹으면 나아요?"

 

"몇제 먹으면 나아요?"


이런 질문에 덜컥 쫄거나, 머리싸매지말자.. (복약기간과 관련하여 환자를 끝까지 골인시키는 티칭방법은 이미 대한동의보감학회 주최 2012 학생강의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환자들이 나가면서 원장에게 이렇게 묻지.

 

"저 원장님 근데 제 허리는 왜 아픈가요?" (특히 젊은 환자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해.)

 

 

초짜들은 디스크가 어떻고 지나가는 신경이 어떻고, 거기 경략이 어느 경이고 기허습담이 어쩌고 저쩌고 이빨을 털어대지. ㅋㅋㅋ 근데 환자가 지금 의학공부하고 싶어서 물어보는게 아니자나. 간혹 환자를 예과2학년 후배로 착각하고 노트에 그림 그려가면서 시바 컬렉션 꺼내오고, 3D로 캡쳐해놓은 인대사진 모니터에 뿌려가면서 마치 자신이 과외선생님이라도 된듯 환자를 그야말로 "티칭"을 하지.

(사람의 본능중에 강의욕이라는 게 있는데, 이게 공부를 하면할수록 줄어들어. 즉, 아는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씨부리는게 귀찮아져. 신기하지. 실제로 강의욕이 폭발하는레벨은 아이러니하게도 어설프게 갓 공부에 입문한 예2 정도 수준이 가장 심하지. 고수는 환자가 딱 받아들일만큼만 그릇에 내줘.)

 

근데 로컬에서 닳고 닳은 노원장님들은 그냥 이렇게 대답해.

 

"허리가 좀 안 좋네요. 열심히 치료합시다."

 

환자의 '본인 질환에 대한 무지'는 치료순응도 및 치료효과와 상관없다는 것이 이미 40년전에 논문으로 나와있다.


 

 





마지막 팁:)

의사가 실력있는지 없는지 체크하는 방법. 지가 모르는 걸 '잘 몰라요'라고 환자 앞에서 얼마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지를 보면 된다. 오히려 실력없는 것들이 절대로 모른다는 말 안한다. 많이 안다는 것은 곧 자기가 모르는 영역을 확실히 안다는 것과 같다. 무턱대고 "한약먹으면 간 나빠져요~ 한의사들 전부 무당이에요~"라고 말하는 애들과 "저는 한방 쪽은 모릅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의사 중에 어느 쪽이 돌팔이일까?


"저 한약 먹어도 되나요?"


이 질문에 양심있는 양의사의 답변은? "저는 한약 모릅니다. 한의사 샘이랑 상의하세요."이다.




이야기가 자꾸 이상한데로 가는데...암튼..


"왜 이래요?"

"어떻게 할까요?"

"열심히 합시다."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지만. 환자 앞에서 할 수 있으려면 10년동안 7만명 정도 진료하면서 내공을 쌓아야 입에서 툭툭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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