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비참한 사람들은 미국, 스페인 같은 선진국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남태평양 아누타섬 사람들이다.
미국사람은 다 불행하고 바다에서 고기잡아 먹는 남태평양 사람들은 다 행복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제작진에게 행복의 비결은 공동생산, 공동분배, 병들거나 출산, 노인, 유가족을 마을 주민들이 다 같이 돌보는 아로파 라는 제도라고 본다. 우리의 품앗이나 두레랑 같다.
이 다큐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아누타섬이 내 고향 울릉도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우리 할배. 동네 구들장은 다 놔주고 (무료로) 오징어 잡는 강꼬도 같이 만들고....
우리 할배 다리아파서 누워계실 때, 할배집 마당을 지나가던 홍상댁 할배(당시 나이 90)가 김상할배 아프나? 그러면서 나무 해놓은거 장작 다 패주시고...
니꺼 내꺼 이런 개념이 불분명하던 마을.
옆집 할배 아프면 지게짐도 대신 져주고, 우리집 수박밭이 잘 되면 수박 몇개 나눠주고...
눈 많이 오면 우리집까지 눈길도 치워주고..
암튼 울릉도든 아누타 섬이든 이처럼 척박한 환경의 소규모 부족일수록 똘똘 뭉칠 수 밖에 없다. 살아남기 힘드니깐.
제작진이 떠날 때 마을 주민 모두가 슬픔에 통곡하는 장면은 쇼킹했다.
우리 도시인들은 왜 그러질 못할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결국은 익명성이었다.
부모의 죽음이 10년간 탔던 내 차의 폐차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이유는 나와 이 세상에서 강력한 연대의 끈으로 이어진 단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젯밤 신안군 자은도 김말복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슬픈가? 아무 감정의 동요도 없을 것이다. 말복 할배의 죽음은 독자에게 하나의 익명의 존재의 사라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말복할배의 손자라면? 제자라면? 동네주민이라면? 똑같은 사건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이 익명성의 특성이다.
제작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빈민층의 고통이 자본가들의 탐욕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고장났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완벽하지 않다.
빈민들을 익명화하여 외면하는 사회구조가 문제인 것이지. 원래 자본은 탐욕스럽다. 자본주의란 원래 그러하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아로파든 뭐든 체제는 상관없다. 그보다는 익명이 만연하는 사회냐 아니냐가 훨씬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밥굶는 아이가 내가 아는 봉관이 조카라면 당연히 외면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이름모를 아이라면 나는 외면할 수 있다. 나는 아무런 고통 없이 외면할 수 있다...
한가지 이야기를 할까.
정부청사 앞에 지하도가 두개 있는데 광화문 쪽 지하도에 가면 오줌냄새가 진동하는 통로 끝에 박스를 뒤집어 쓰고 자는 노숙인이 있다. 겨울에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뭐라도 먹을 거라도 좀 줘야하나. 생각이 드는데, 나는 매번 그냥 지나친다.
왜 그럴까? 아마 그 사람이 울릉도 사동 2동 오박골 32번지 오재길씨 집앞에서 노숙을 했다면 나는 아마 지나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2동 주민들이 다 나와서 일단 급한대로 마을회관에 재우고 밥도 갖다주고 라면도 주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광화문 지하도에서 자면 익명의 노숙인으로 남지만, 울릉도 오박골에서 자면 그는 더이상 익명의 인간이 아니다.
결국 익명성을 결정짓는 것은 집단의 크기가 결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시골에 정이 많나? 주민의 집단이 소규모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익명성이 소실된다.
도둑질을 왜 하게 되나?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울릉도는 개척이후 100년간 도둑이 생기지 않았다. 이건 엄청난 기록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 사동 넘어가는 잿만다 연립주택에 도둑이 들었는데, 울릉도가 발칵 뒤집어졌다. 경찰들도 절도사건 접수를 그 때 처음 했고.
어제 다큐에서 협동조합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됐지만, 결국 이것도 협동조합이라는 제도가 중요한게 아니라 포인트는 소규모 도시, 작은 지자체 단위라는 점이다. 집단이 커지면 익명성이 증가하고 인정이 감소할 수 밖에 없다. 인정은 합리성의 대척점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굉장히 합리적인 처사가 결론적으로는 가혹한 매정함으로 수렴하기도 한다.
이 세상 사람들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인간관계를 익명성에 중점을 두는 부류와 작은 인연도 놓치지 않는 부류.
"이제 저 사람 두번 다시 안 볼텐데 뭘.... 길다가 마주쳐도 모른 척 할텐데..." -베풀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주의-
"그래도 이것도 인연인데 뭐라도 챙겨줘야지.." -정을 많이 베풀고 나도 정받자-
친구들도 그렇다. 잘 통하는 애들끼리 논다. 서로서로 잘 챙겨주는 그런 애들끼리 또 친하다.
익명선호주의자들은 그들끼리, 인연주의자들은 또 그들끼리 끼리끼리 지내게 된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후자 쪽에 정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1차진료 개원의에게는 후자쪽이 훨씬 유리하다.
환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본 병원에는 어떤 교통수단으로 왔는지? 옷은 춥진 않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가족과의 문제는 없는지 등등 그의 인간적인 영역에 대한 궁금증이 많을 수록-환자를 지인처럼 대하는- 후자의 원장에 속한다.
당신은 어느 부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