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당장의 큰일이 닥치면 그것밖에 안 보인다. 현재의 디테일에 매몰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돌이켜보면 쓸데없는 '디테일'은 기억이 안 난다. 대신 당시에는 안 보이던 큰 그림이 보인다.
우리가 느끼는 '현재의 별일'은 결코 큰 별일이 아닌 경우도 많고, 우리가 현재 '사소한 일'로 간주하는 일들이 실제로는 '사소한 일'이 아님을 [긴 시간]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알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이 뭔가 현명해지려면 긴 시간이 지나야만 하나?
아니다. 시간의 대가 외에도 공간의 대가를 치르면 된다. 멀리 떠나면 떠날수록 좀 더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현명한 시각을 갖게 된다. 만약 돈이 모자라면 높은 산에라도 올라라.
bk박사님의 명언 중에 "여행은 일상의 멈춤. 시간의 정지'라고 했다. 뭔가를 보려면 멈춰야 보인다. 떠나야 보이고, 대가를 지불해야 보인다.
진리라고 생각했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자신만의 일상의 매너리즘에 의도적으로 낯설어지기. 이게 여행의 목적이다.
내가 놓치 못하는 껍데기는 없을까? 나는 지난 20년간 한의사라는 껍데기를 분리수거하지 못했다.
가난의 탈을 쓴 무능을 직시하기를 두려워했고, 내가 가진 기득권을 최대한 지키려고 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뭐하나 폼나게 이뤄놓은 게 없다. 망해버린 부잣집 막내손자가 시대를 잘 못 타고나서 가난에 허덕이다 나이마저 먹어 동네 허름한 경로당에 누워 "100년 전만해도 이 동네 우리 할아버지 땅 안 밟고는 못 지나다녔는데"라고 한탄하는 것 같이. ㅋㅋㅋㅋㅋㅋ
명줄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한의사짓 안 하면 무슨 대단한 큰 일이 일어날 것처럼 살아왔지만, 막상 한의사로서 뭔가 훌륭한 업적을 이뤄놓은 게 없다.
시간은 한정적인데 인터넷의 노예가 되어 수년간 엄청난 시간을 갖다바치고도 모자라 또 이런 글까지 써제끼고 있다. 대다나다.
그거 안 하면 무슨 큰 일이 일어나길래 나는 이 껍데기들을 버리지 못하고 SCV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어쩌다가 이런 똥구더기에 들어와 '용기없고 게으르고 바라는 것만 많은 사람들 조직적인 뜻을 모아 정리하는 하찮은 일'에 에너지를 쏟았을까. 시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긴 시간과 함께 먼 공간의 이동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어주며, 자신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그거 안 하면 무슨 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매순간 질문을 던지게 한다.
여행이란 평소엔 큰일 날 것 같아서 중단하지 못하던 일을 '안 해보는거'다. 내가 10시부터 1시, 3시부터 6시까지만 진료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가 가장 날씨좋은 5월 10월에 2주간 휴가를 갖고 여름휴가는 주말3일로 줄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매일 뉴스를 보지 않는다면? 내가 하루종일 인터넷에 전혀 접속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한도전을 안 본다면?? 내가 그거 안 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거기 안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그거 안 하면 내 인생에 도대체 어떤 큰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내가 그거 대신에 다른 거를 하면 어떤 크고 나쁜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
여행을 떠나라. 자주. 되도록이면 멀리.
그 전에 여행갈 돈을 충분히 벌어야겠지?
자신이 만들어놓은 일상의 매너리즘에 의도적으로 낯설어지는 기회를 자주 만들수록 현명하게 살 수 있다.
루틴에 대한 돌아보기 : 우리가 매일하는 뉴스, 인터넷, 카페, 동호회 등 매일 루틴으로 하던 일들이 사실은 얼마나 안 해도 되는 짓인지 알게 된다.
시간의 소중함 : 여행을 떠나면 우리는 보통 30분에서 1시간 단위로 계획을 짠다. 일상에서는 하루 이틀 아무 의미없이 흘려보내지만 여행에 가면 농도깊게 시간을 대하는 법을 배운다.
쓸데없는 정보 : 여행가서 접하지 않아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정보들이 있다면 그건 쓰레기 정보다. 뉴스를 며칠 안 봤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뉴스는 쓰레기 정보다. 우리는 너무 질 낮은 정보에 자주 노출된다. 저질정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받으려면 어떤게 저질정보인지 알아내야 한다. 여행이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