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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이성규는 1999년부터 인도 캘거타에서 인력거꾼들의 이야기를 촬영한다.

 

 

마노즈.

초보 인력거꾼이다. 나이는 스무살.

10살 때 소작농이던 아버지가 비하르 카스트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  그는 불행해졌다. 스무살이 되던 해 그는 캘거타로 와서 가장 빈곤층인 인력거꾼이 되었다.

손님이 없어 슬프다.

 

 

 

빈의도 마찬가지다.

하루종일 환자를 안 보는데도 왜 이리 피곤한지.

 

 

 

 

 

여기 또 하나의 인력거꾼이 있다.

샬림. 늙은 인력거꾼이다.

인생은 늘 행복과 슬픔이 공존한다. 행복만 있을 수 없다.

인력거에는 갖가지 인생이 손님으로 올라탄다. 행복과 슬픔이 함께 타고 달린다. 어찌됐건 인력거는 달린다. 그게 인생이다.

 

 

 

 

 

 

 

마노즈가 힘들어서 술만 마신다.

샬림이 말한다. 야이 색히야 돈벌러왔지 술마시러 왔냐?

마노즈는 속이야기를 털어놓는다.  10살때 아버지를 잃었다고.

 

 

 

 

 

마노즈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샬림은 어떻게 해서든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꿈이다.

삼륜차.

이미 그 꿈을 향해 15년간 돈을 모았다. 이제 5년만 더 모으면 천이백만원정도만 되면 저 차를 살 수 있다.

(샬림은 자신의 꿈을 위해 한달에 5만원씩 매년 60만원 정도씩을 저축해온 것이다. 물론 동시에 매달 집에 5만원씩도 부쳤다. 잠은 인력거 합숙소에서 새우잠을 자고... 한번 인력거 운행으로 15루피. 380원 내외를 받는다.)

 

 

 

사실 그의 꿈의 본질은 차가 아니다.

가족이다.

차를 사고 그 차로 돈을 벌어서 집을 지어서 가족을 행복하게 해줄 꺼라고 한다.

 

 

 

그는 비가 오면 행복하다고 했다.

인력거를 타려는 손님이 많아지고 요금도 더 받기 때문이다.

늘 손님을 찾기 위해 집중한다.

한낱 인력거꾼도 이럴진대, 한의원 초진은 얼마나 중요하냐.

눈 크게 뜨고 귀쫑긋하고 초진봐라.

정신차리고.

 

 

 

 

 

 

 

 

 

 

 

 

캘커타에 적응하지 못한 마노즈는 몇달을 못 버티고 돌아갔다.

그에게는 인내하고 기댈 꿈이 없었다.

절망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린 마노즈.

 

 

 

 

 

샬림의 꿈에 큰 장애가 닥친다.

아내가 아프다.

큰 돈이 병원비로 빠져나갔다.

 

 

 

 

꿈이 무너지자 그도 절망한다.

화를 낸다.

 

 

 

 

하지만 곧 돌아온다.

그는 오늘도 달린다.

가족과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엔딩 스틸컷 중에 감독이 샬림을 태우고 달리는 사진이 나온다.

그가 얼마나 등장인물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감독과 피사체의 관계가 아니라 진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99년부터 시작된 촬영은 10년에 걸쳐 완성되고 2년의 편집기간을 거쳐 마침내 2011년 개봉했다.

 

샬림에게 출연료를 지불했다.

샬림은 차를 사는 대신 집을 샀다고 한다.

 

 

2012년 8월 감독은 다시 샬림을 찾아갔다.

다큐를 본 어떤 재미교포가 삼륜차 사라고 10000달러를 전달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듬해

2013년 12월 13일

감독은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인터뷰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21

 

여기에는 박정헌도 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악인 중의 한명이다. 끈이라는 책이 있다. 꼭 읽어보기 바란다.

박정헌과 이성규가 만나서 뭔가 만들었다면 정말 대단했을텐데...

 

 

그는 생명이 꺼져갈 즈음 페이스북에 담담한 여행기(죽음으로 가는 여행)를 올렸다. 그의 마지막 여행기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3334965&cloc=olink|article|default

 

 

내가 갓 한의대를 졸업하고 침돌이로 개고생할 때 사망일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어느 중국인이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수필로 남긴 것인데, 죽음에 대한 직시는 삶에 대한 각성을 가져온다.

얼마전 포항에 갔는데 대선배님이 큰 일갈을 해주셨다.

 

"목표없이 살지 마라. 목표없이 살면 10년 20년이 무의미하게 지나간다."

 

 

죽음이 삶의 안으로 들어올때 우린 고통스럽다. 그것이 가족이거나 지인일 때 그 고통은 한없이 커진다. 감독님 말대로 죽음은 존엄을 동반한다.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아이템이 죽음이다.

 

사람들이 영화 '시바, 인생을 던져' 개봉관(춘천 CGV 2013년 12월 11일)에 몰린 이유도, 사람들이 이순신에 열광하는 이유도, 안중근에 대해 열광하는 것도 죽음이라는 요소의 드라마틱함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난 개인적으로 시바 인생을 던져보다는 오래된 인력거가 훨씬 감동적이었다.)

 

 

감독은 떠났고, 작품은 남았다.

캘커타의 샬림은 여전히 달리고 있다.

샬림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가 보여준 '절망에 대처하는 자세'는 우리에게 묵직한 각성을 줄 것이다.

그 각성이라는 게 별게 아니다.

 

"야이 개색히들아. 니들 배부르고, 방 뜨시고 뭐가 불만이냐. 복도 많은 것들이 뭐가 그렇게 절망스럽다고 지랄이냐. 거기다 부모가 학비 대줘 한의대 졸업시켜줘. 국가에서 면허증 줘. 은행에서 돈 대줘. 뭐가 문제야. 하루에 5천원 벌어서 3천원 저금하는데. 인생이란 행복이랑 불행이 같이 달리는거야. 100% 순도의 불행이란 없다구.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건 어리석은 거야. 근데 그거 아냐? 행복이랑 불행이랑 같은거야. 니가 매일매일 쾌적하고 따뜻한 원장실에서 빵빵한 인터넷환경 아래에 카페질이나 하는 그 지루함이 불행처럼 보이지만, 각도만 다르게 보면 나에겐 한없이 행복해보여. 결국 행불행은 사건이나 상황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관찰자의 시선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거야. 인생 뭐 있냐? 그냥 풀처럼 사는거야. 가족들 위해 달리는거지. 그게 인생이야."

 

마치 마노즈에게 했던 말처럼.

 

"술마시려고 왔냐?"<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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