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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라는 행위와 죽음이라는 사건은 확실히 우리에게 있어서 금기대상이다.
내 직업은 어찌하다보니 한의사가 됐는데. 실제로 국가에서 주는 종이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팔이라고 보시면 된다.(종이가 없으면 무면허 돌팔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종이를 가진 돌팔이도 많이 있다. 종이있는 돌팔이가 더 무서운 존재다. 나처럼..--;)
나의 취미는 죽음에 관한 책을 모두 사모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우중충하고 우울한 넘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 생명의 존엄은 죽음이라는 사건 때문에 지탱된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죽음을 이용해서 먹고사는 의료계와 종교계의 종사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의사 한의사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자기들만 믿으면 우리를 모두 구원해주겠다고 떠드는 걸 보면 우울해진다. 거짓말쟁이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누가 가장 가난해질까?
병원과 교회가 가장 먼저 가난해질 것이다. 의사와 종교인들의 생활에서 죽음을 배제한 '마케팅'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하여 원초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인간을 병원과 교회로 이끄는 힘이 바로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1.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
우리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마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살고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현대 의사들이 본의아니게 꾸준하게 심어준 환상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저녁 뉴스를 보며 의사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했고, 병원에 자주 가기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사회의 모든분야가 전문화되면서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모든 판단과 의사결정 권리를 의사에게 완전히 넘겨버렸다. 우리 몸에 대한 주도권은 이미 의사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의사말만 들으면 오래살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랄 뿐이지.
아무리 의사말을 고분고분 들으며 병원을 들락거린다고 해도 우리는 어느날 문득 죽어버릴 수 있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항상 우리 등뒤에 바싹 쫓아오고 있다. 어쩌면 죽음이란 우리가 살아있는한 친구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막을수도 대비할 수도 없다. 죽음이란 그런 것.
2.가치관을 박살내는 죽음.
인간이 가진 가치관들은 매우 허약해서 조그만 충격에도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하물며 죽음이라는 엄청난 충격 앞에서는 그야말로 박살나버리고 만다.
1995년 늦가을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거실에서 지구촌영상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때 할배가 방에서 불렀다.
(할배는 다리가 아파서 10여년을 방에 앉아서 지냈고, 일체의 외출이 없었다. 대소변도 방에서 보았고, 부모님은 할배 똥치우는데 서서히 지쳐갔다. 그러자 할배는 똥을 봉지에 싸서 가구속에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나중에는 기저귀를 차야만하는 상태에 이르게 됐다.)
그 즈음이 내가 할배 기저귀를 사나르고 얼마 안된 때였다. 그때 할배는 나를 방으로 불러 내게 무언가 말하려했는데 무슨말인지 잘 분간해 들을 수가 없었다.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할배요 뭐라꼬요? 예? 예?"
할배는 연신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다지는 시늉을 반복하며 나를 간곡히 바라보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뭐라꼬요? 묻으라꼬요?"
그제서야 할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이,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교?"
그러자 할배는 내게 계속 묻어라고만 했다. 나는 알았니더라고 한 후에 할배방을 나와서 계속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나는 할배가 아무래도 평소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좀 와보라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여느때처럼 점심을 갖고 왔다. 엄마는 할배를 일으켜 앉혀서 미음을 떠넣었다. 그때 할배는 의식을 놓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는 억지로 미음을 할배 입에 밀어넣고 있었다.
"아부지요!! 아부지요! 눈떠보소. 와 이라는교??"
엄마가 할배를 계속 불렀지만, 할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엄마는 미음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모든게 끝났다.
나는 아부지에게 전화를 하고, 빨리 집에 오라고 하니 아부지는 그저 할배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니냐는 식으로 시큰둥하게 넘겼다.
하지만 아버지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직감은 하셨을 것이다.
나는 고모를 모시러 갔다. 고모를 모시고 아파트 복도에 들어서는데, 엄마가 밖에 나와 있었다. 고모는 후다닥 달려가서 곡을 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곧 할배는 이불에 둥둥 싸여 응급차에 올랐다. 할배발이 앙상하게 이불밖으로 삐져나왔다.
선린병원 응급실.
의사는 사무적으로 심전도를 붙여보고 사망을 선언했다. 아부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르고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고인채 볼을 계속 파르르 실룩거렸다. 할배는 지하 영안실 냉장고로 들어갔다. 관처럼 생긴 냉장고는 매우 좁고 싸늘했다. 참 화창한 가을날이었는데...
곧 죽음에 대한 의식이 시작됐다. 사흘간의 의식을 지낸 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할배는 내게 유언한대로 땅에 묻혔다. 묻으라는 게 유일한 유언이었다. 나는 그게 유언일줄 몰랐었지만.
나는 할배의 죽음을 겪으면서 나의 가치관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그 가치관들은 다시 회복했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할배가 죽었는데도, 세상은 멀쩡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즐겁고, 다투고, 여느때처럼 지지고 볶고 살았다.
할배의 죽음은 이 세상에 티끌만큼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세상은 잘도 돌아갔다. 아마 아마도 내가 죽을 때에도 세상은 평화롭게 늘 그렇게 돌아가겠지. 참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허무한 거구나. 아웅다웅 살아봐야 죽어버리는데. 인생이라는게 참 짧구나. 내가 가진 가치관이라는게 정말 허무하기 그지 없구나. 죽으면 이렇게 끝인 것을.
나는 할배의 죽음 이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할배의 죽음이 서서히 잊혀질 즈음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나는 또 학교에 다니게 되고, 생활에 시달리면서 다시 예전의 가치관들에 매달리게 되었다.
3. 항상 죽음을 생각할때 우리의 삶의 농도는 깊어진다.
매일 30명이 길바닥에서 교통사고로 죽는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늙어서 고요하게 잠들듯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들만의 명백환 환상이다.
대부분의 죽음은 고통스럽게 찾아온다. 잠들듯 스르륵 고개를 떨구며 죽는 것은 영화에나 나오는 죽음이지, 실제 죽음은 그렇지 않다. 고통스럽다.
나 역시 매일매일 죽음을 등에 안고 산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자신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인생을 보내고 정말 쓰잘데기 없는 일에 목숨걸고 앵앵거린다.
나는 죽음이 내 등뒤에 바싹 붙어다닌다고 생각하려 애쓴다. 그리고 항상 죽음에 대해 냉철하게 생각하고, 그럴수록 더욱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보내려 노력한다. 잘 안된다. 머리가 나쁜 걸까.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피하는 걸까.
죽음은 삶의 농도를 깊게 만든다.
4.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람이라는 존재를 잘 살펴보면 세포로 이루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포들은 원소들의 알갱이들로 이루어져있다. 우리 몸이라는 것이 거대한 알갱이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것은 이 알갱이들이 뭉쳐있느냐 아니면 흩어지느냐에 달려있다.
흔히 죽으면 몸이 썩어 없어지는 것처럼 알지만, 실제로 그 존재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몸을 구성하던 알갱이들이 흩어질 뿐이다.(산소,탄소,질소,수소 등등)
얼굴에 여드름이 났다가 없어지듯이. 얼굴이 지구라면 여드름은 인간이라고 볼수도 있다.
우리는 그저 알갱이였을 뿐이다. 다만 부모에 의해 선택받아 몸의 형태를 갖고 100년 정도를 살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을 갖고 뭉쳐진 알갱이일 뿐. 우리는 원래부터 인간이 아니라 알갱이였다.
알갱이가 알갱이로 돌아가는데 무엇이 슬프고 무엇이 두려운가! 오히려 알갱이들이 뭉쳐져서 인간이라는 형태로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5.죽음을 인정하라.
우리의 인생을 참있게 만들고 의미있는 삶으로 구원하는 것은 의사, 목사의 설교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솔직한 대면.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며, 친구다.
죽음의 존재를 인식한 후에는 삶의 행복이 엄청나게 많아진다.
1995년 늦봄 텔레비전에 어떤 간암환자가 나왔다.(지금은 죽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는 비가 오면 기분이 안 좋고 비가 싫었는데 이제 곧 죽는다고 하니, 저 비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도 들고 해서, 이제는 저런 비까지 소중하게 느껴져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창 밖의 비 내리는 광경을 유심히 보는 환자. 마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비 내리는 순간의 모습을 뇌리 속에 담아두려는 듯....
그 환자의 심정을 어찌 백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까만은 나역시 언제 어느때라도 간암환자처럼 죽음을 직면하는 날이 온다. 다만 시기의 차이일 뿐.
몇년전 한의대 졸업하고 여러가지 문제로 우울했을 때 집근처 방파제에 나가서 우두커니 앉아있다 오는 일이 많았다. 그곳은 매우 조용하다. 넓은 바다.
바다빛깔을 본적이 있는가? 흔히 바다는 푸른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바다빛깔은 무슨색이다 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모든 하찮은 사물들이 죽음 앞에서는 엄청난 의미를 발산하며 다가온다. 풀하나, 아이들 노는 소리, 하늘색깔, 바다색깔, 빗방울 소리에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살아있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가!
항상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약한 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하라!
죽음으로부터 배우는 것. 그것은 곧 삶에 대한 찬양이다. 결코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 뿐이다. 알갱이가 뭉쳐졌다가 다시 알갱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우리는 다시 알갱이로 흩어지기 전에 진지하게 시간을 보내야한다.<끝>
내 직업은 어찌하다보니 한의사가 됐는데. 실제로 국가에서 주는 종이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팔이라고 보시면 된다.(종이가 없으면 무면허 돌팔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종이를 가진 돌팔이도 많이 있다. 종이있는 돌팔이가 더 무서운 존재다. 나처럼..--;)
나의 취미는 죽음에 관한 책을 모두 사모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우중충하고 우울한 넘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 생명의 존엄은 죽음이라는 사건 때문에 지탱된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죽음을 이용해서 먹고사는 의료계와 종교계의 종사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의사 한의사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자기들만 믿으면 우리를 모두 구원해주겠다고 떠드는 걸 보면 우울해진다. 거짓말쟁이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누가 가장 가난해질까?
병원과 교회가 가장 먼저 가난해질 것이다. 의사와 종교인들의 생활에서 죽음을 배제한 '마케팅'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하여 원초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인간을 병원과 교회로 이끄는 힘이 바로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1.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
우리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마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살고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현대 의사들이 본의아니게 꾸준하게 심어준 환상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저녁 뉴스를 보며 의사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했고, 병원에 자주 가기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사회의 모든분야가 전문화되면서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모든 판단과 의사결정 권리를 의사에게 완전히 넘겨버렸다. 우리 몸에 대한 주도권은 이미 의사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의사말만 들으면 오래살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랄 뿐이지.
아무리 의사말을 고분고분 들으며 병원을 들락거린다고 해도 우리는 어느날 문득 죽어버릴 수 있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항상 우리 등뒤에 바싹 쫓아오고 있다. 어쩌면 죽음이란 우리가 살아있는한 친구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막을수도 대비할 수도 없다. 죽음이란 그런 것.
2.가치관을 박살내는 죽음.
인간이 가진 가치관들은 매우 허약해서 조그만 충격에도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하물며 죽음이라는 엄청난 충격 앞에서는 그야말로 박살나버리고 만다.
1995년 늦가을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거실에서 지구촌영상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때 할배가 방에서 불렀다.
(할배는 다리가 아파서 10여년을 방에 앉아서 지냈고, 일체의 외출이 없었다. 대소변도 방에서 보았고, 부모님은 할배 똥치우는데 서서히 지쳐갔다. 그러자 할배는 똥을 봉지에 싸서 가구속에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나중에는 기저귀를 차야만하는 상태에 이르게 됐다.)
그 즈음이 내가 할배 기저귀를 사나르고 얼마 안된 때였다. 그때 할배는 나를 방으로 불러 내게 무언가 말하려했는데 무슨말인지 잘 분간해 들을 수가 없었다.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할배요 뭐라꼬요? 예? 예?"
할배는 연신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다지는 시늉을 반복하며 나를 간곡히 바라보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뭐라꼬요? 묻으라꼬요?"
그제서야 할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이,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교?"
그러자 할배는 내게 계속 묻어라고만 했다. 나는 알았니더라고 한 후에 할배방을 나와서 계속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나는 할배가 아무래도 평소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좀 와보라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여느때처럼 점심을 갖고 왔다. 엄마는 할배를 일으켜 앉혀서 미음을 떠넣었다. 그때 할배는 의식을 놓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는 억지로 미음을 할배 입에 밀어넣고 있었다.
"아부지요!! 아부지요! 눈떠보소. 와 이라는교??"
엄마가 할배를 계속 불렀지만, 할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엄마는 미음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모든게 끝났다.
나는 아부지에게 전화를 하고, 빨리 집에 오라고 하니 아부지는 그저 할배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니냐는 식으로 시큰둥하게 넘겼다.
하지만 아버지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직감은 하셨을 것이다.
나는 고모를 모시러 갔다. 고모를 모시고 아파트 복도에 들어서는데, 엄마가 밖에 나와 있었다. 고모는 후다닥 달려가서 곡을 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곧 할배는 이불에 둥둥 싸여 응급차에 올랐다. 할배발이 앙상하게 이불밖으로 삐져나왔다.
선린병원 응급실.
의사는 사무적으로 심전도를 붙여보고 사망을 선언했다. 아부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르고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고인채 볼을 계속 파르르 실룩거렸다. 할배는 지하 영안실 냉장고로 들어갔다. 관처럼 생긴 냉장고는 매우 좁고 싸늘했다. 참 화창한 가을날이었는데...
곧 죽음에 대한 의식이 시작됐다. 사흘간의 의식을 지낸 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할배는 내게 유언한대로 땅에 묻혔다. 묻으라는 게 유일한 유언이었다. 나는 그게 유언일줄 몰랐었지만.
나는 할배의 죽음을 겪으면서 나의 가치관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그 가치관들은 다시 회복했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할배가 죽었는데도, 세상은 멀쩡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즐겁고, 다투고, 여느때처럼 지지고 볶고 살았다.
할배의 죽음은 이 세상에 티끌만큼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세상은 잘도 돌아갔다. 아마 아마도 내가 죽을 때에도 세상은 평화롭게 늘 그렇게 돌아가겠지. 참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허무한 거구나. 아웅다웅 살아봐야 죽어버리는데. 인생이라는게 참 짧구나. 내가 가진 가치관이라는게 정말 허무하기 그지 없구나. 죽으면 이렇게 끝인 것을.
나는 할배의 죽음 이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할배의 죽음이 서서히 잊혀질 즈음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나는 또 학교에 다니게 되고, 생활에 시달리면서 다시 예전의 가치관들에 매달리게 되었다.
3. 항상 죽음을 생각할때 우리의 삶의 농도는 깊어진다.
매일 30명이 길바닥에서 교통사고로 죽는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늙어서 고요하게 잠들듯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들만의 명백환 환상이다.
대부분의 죽음은 고통스럽게 찾아온다. 잠들듯 스르륵 고개를 떨구며 죽는 것은 영화에나 나오는 죽음이지, 실제 죽음은 그렇지 않다. 고통스럽다.
나 역시 매일매일 죽음을 등에 안고 산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자신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인생을 보내고 정말 쓰잘데기 없는 일에 목숨걸고 앵앵거린다.
나는 죽음이 내 등뒤에 바싹 붙어다닌다고 생각하려 애쓴다. 그리고 항상 죽음에 대해 냉철하게 생각하고, 그럴수록 더욱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보내려 노력한다. 잘 안된다. 머리가 나쁜 걸까.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피하는 걸까.
죽음은 삶의 농도를 깊게 만든다.
4.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람이라는 존재를 잘 살펴보면 세포로 이루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포들은 원소들의 알갱이들로 이루어져있다. 우리 몸이라는 것이 거대한 알갱이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것은 이 알갱이들이 뭉쳐있느냐 아니면 흩어지느냐에 달려있다.
흔히 죽으면 몸이 썩어 없어지는 것처럼 알지만, 실제로 그 존재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몸을 구성하던 알갱이들이 흩어질 뿐이다.(산소,탄소,질소,수소 등등)
얼굴에 여드름이 났다가 없어지듯이. 얼굴이 지구라면 여드름은 인간이라고 볼수도 있다.
우리는 그저 알갱이였을 뿐이다. 다만 부모에 의해 선택받아 몸의 형태를 갖고 100년 정도를 살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을 갖고 뭉쳐진 알갱이일 뿐. 우리는 원래부터 인간이 아니라 알갱이였다.
알갱이가 알갱이로 돌아가는데 무엇이 슬프고 무엇이 두려운가! 오히려 알갱이들이 뭉쳐져서 인간이라는 형태로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5.죽음을 인정하라.
우리의 인생을 참있게 만들고 의미있는 삶으로 구원하는 것은 의사, 목사의 설교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솔직한 대면.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며, 친구다.
죽음의 존재를 인식한 후에는 삶의 행복이 엄청나게 많아진다.
1995년 늦봄 텔레비전에 어떤 간암환자가 나왔다.(지금은 죽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는 비가 오면 기분이 안 좋고 비가 싫었는데 이제 곧 죽는다고 하니, 저 비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도 들고 해서, 이제는 저런 비까지 소중하게 느껴져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창 밖의 비 내리는 광경을 유심히 보는 환자. 마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비 내리는 순간의 모습을 뇌리 속에 담아두려는 듯....
그 환자의 심정을 어찌 백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까만은 나역시 언제 어느때라도 간암환자처럼 죽음을 직면하는 날이 온다. 다만 시기의 차이일 뿐.
몇년전 한의대 졸업하고 여러가지 문제로 우울했을 때 집근처 방파제에 나가서 우두커니 앉아있다 오는 일이 많았다. 그곳은 매우 조용하다. 넓은 바다.
바다빛깔을 본적이 있는가? 흔히 바다는 푸른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바다빛깔은 무슨색이다 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모든 하찮은 사물들이 죽음 앞에서는 엄청난 의미를 발산하며 다가온다. 풀하나, 아이들 노는 소리, 하늘색깔, 바다색깔, 빗방울 소리에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살아있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가!
항상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약한 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하라!
죽음으로부터 배우는 것. 그것은 곧 삶에 대한 찬양이다. 결코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 뿐이다. 알갱이가 뭉쳐졌다가 다시 알갱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우리는 다시 알갱이로 흩어지기 전에 진지하게 시간을 보내야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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