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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러쉬대학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마친 의사가 쓴 자서전 같은 책인데 올해 읽어본 에세이 중에 가장 좋은 책이었다. 다 읽고 책장을 덮는 순간 나의 20대 30대가 영화필름처럼 스쳐가며 회한과 아쉬움과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는 의지도 샘솟게 한 책이다.

패배감에 사는 한의대생이라면 반드시 일독해볼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한의대에는 세계적인 석학이나, 전설적인 교수가 없다. 좋은 교수들은 점점 떠나고 정치적인 행위에 능력을 발휘하는 교수들이 고위직으로 오르고 있다. 한의학이라는 학문은 침체되어 있고, 어디를 따라해야할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롤모델은 없으며, 배출된 한의사들은 절대적인 학습량의 부족에 시달리며, 저퀄리티의 진료를 로컬에 선보인다. 한의사들끼리 만나면 오로지 매출액과 환자숫자 이야기밖에 안 한다. 돈돈돈! 오로지 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위안거리가 된 듯 살아간다. 다른 학문과의 교류나 탐구, 진취적인 연구의지는 대학부속 한방병원에서도 사라진지 오래다. 집단 전체에 물안개처럼 자욱한 패배감과 절망은 수재소리 듣는 학생들을 한순간에 패배자로 만들어 빵틀처럼 찍어낸다. 그나마 그 수재들도 이제 한의대에 들어오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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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생활은 훈련, 또 훈련 끝없는 반복 훈련의 연속이었다. 무엇이든 전문가가 되려면 처음에는 반복훈련을 거쳐 자나깨나 그 일만 생각하고, 혼신을 집중하고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우수해지는 길은 오로지 그것 뿐이다. 초기 훈련이 충분할수록 나중에 더 깊고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직종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ㄴ 무엇이든 적어도 10년 이상은 배우고 익히는 기간으로 삼아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남들이 빨리 출세해서 현장을 조기에 떠나는 것을 부러워하지말고, 오히려 더 정진하여 내공을 쌓을 기회가 주어진 것을 감사하는 게 좋다. 어찌보면 그렇게 노력해 쌓아 올리는 것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의대 강의에 임하는 교수님들의 열의는 정말로 대단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려고 10분간 휴식시간도 잡아먹어서 대기하던 다음 교수님과 말다툼이 나기도 했다. 그에 따라 학생들의 열기도 대단했다. 나는 매일 아침 오전7시에 학교에 와서 9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예습을 했다.

 

1961년 사이에 미네소타 프로젝트라는 게 있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 주관으로 한국 대학 현대화 원조계획으로 의대, 농대, 공대 교수를 미국에 불러 연수시키고, 교육과정, 내용, 장비 일체를 지원해준 것이다.

(한의대는 이런게 없다.)

 

병리학은 모든 질병을 규정하는 언어이자 실체이다. 병리학은 법조문과도 같다. 이런 저런 상세한 특징을 서술하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질병은 아직 원인이 밝혀져 있지 않다.

 

형태위주의 의학(병리학 기원)에 기능적 의학이 더해지면 다른 차원의 의학이 등장한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시절부터 내려오던 군대같은 회진문화.

"32병실 환자 총 6명! 회진 준비 끝!"

환자들은 모두 침대 끝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당연히 환자에게 반말하는 의사도 상당히 많았다.

환자 보호자가 건네는 촌지가 일상화되고 그 촌지로 저녁에 나가서 술 사 먹고 밥 사먹고.

 

 

<미국의 수련과정>

월요일에는 논문분석하는 저널클럽

목요일에는 전공 세미나

화수금 3일은 외과병리 컨퍼런스

 

미국 해부병리 수련은 3년.

 

 

외과병리 컨퍼런스의 굴드 교수 왈 "병리를 잘 하는 길이 궁금하냐? 아주 간단하다 본것을 본대로 몇마디 말로 표현해서 옆에 있는 눈먼 사람 앞에 그것이 그대로 떠오를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그 눈먼 사람은 바로 자네들 자신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길고 상세하게 말하면 더 잘 떠오를까? 천만에. 조리있는 몇마디로만 가능하다. 그래야 핵심을 바로 파악한 것이고 그 길을 궁리하는 것이 바로 병리다. 간단한 것이 어려운 법이야!! 간단한 게 어렵다고!!"

 

"어린애 같은 눈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보라. 전체를 봐라. 짧은 말로 표현해서 네 옆에 있는 눈 먼 사람 눈앞에 떠오르게 하라. 그게 바로 너 자신이다."

 

"우수한 병리의사는 부검 3천건 이상, 그냥 병리의사로 행세하려면 천건은 해야 한다!" -굴드-

 

햄버거 의사 : 햄벅 외에는 음식을 본적도 없는... 국소적인 업무에만 숙달된 단순노동형 의사를 말하는 것.

 

 

(설명이 구질구질할수록 잘 모른다는 말이다. 한의대 수업을 들어보라. 얼마나 장황하고 핵심없이 이야기하는지...)

 

모르면 모를수록 솔직해지고 남의 말을 더 들어야 한다. 쓸데없는 고집이 문제다. 자신의 한계를 빨리 깨닫고 무리하지 말고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여 인생의 고비마다 그들의 훌륭한 안목을 빌릴 수 있어야 한다. 인생에서 안목은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어려서부터 폭넓은 노출, 교류, 경험, 되새김, 사색이 필요하다.

 

조금이라도 불분명한 부분은 미주알고주알 끝까지 질문을 하면 굴드교수는 아무리 기초적인 것이라도 상세히 답해주었다. 한참 설명하다가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여기까지'라고 대답하고 끝나곤 했다. 고급 튜토리얼 수업인 것이다.

학생들이여 적극적으로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겉도는 학창시절보다 더 큰 인생의 낭비가 있을까?

 

굴드교수가 괴팍해보이고 업무에 지나칠 정도로 까다로운 건 끝까지 자기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얼렁뚱땅 넘어가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남들이 노력하지 않는 것을 참지 못했다.

 

굴드는 병리학의 역사에 대해서 해박했다. 역사를 알아야 깨달을 수 있다.

 

Iconoclast 우상타파자가 돼라. 학문에 있어서 늘 의심하고 자유롭게 성찰하라.

 

어느날 50대 중반의 정신과 전문의가 전공의로 들어왔다. 그는 저자의 진로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해부병리를 연구하려면 이 병원에 남아 있으면 안된다고! 본류로 가야 한다!! 시카고를 떠나 미국 동부로 가야 한다!! 저자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아쉬워했다.

 

'어깨 넘어'공부의 한계. 저자는 형태학적 병리학은 전문가로 익혔지만 생명과학 연구는 어깨넘어 공부라고 자인했따. 한의사들이 가진 양방지식 역시 어깨넘어 공부다. 이걸 인정 안 하면 진전은 없다.

 

독일에서 1년반 세포생물학 연구를 마치고 30대의 나이에 아산병원 개원멤버로 리턴.

초창기에는 '세계 최고의 병원'이라는 모토가 있었지만 지금은 잊혀짐. 사업화 현실화라는명목 아래 양적 팽창이 그 자리를 차지함.

(저자는 40대라는 인생의 황금기를 아산병원 병리과 만드는데 다 보냄. 보람도 있지만 공허하게 느껴진다고 함.) 이제 돌아와 보니 볼과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진 낯선 얼굴이 바라보고 있다고.

 

병리과 전공의가 한명도 안 들어옴. 슬라이드 유리값도 안되는 수가 때문임. 그래서 저자는 복지부를 찾아감. 초창기 복지부에서 각과별로 불러서 수가책정을 했는데 병리과에서는 아무도 안 갔다고 함. 그러니깐 그냥 바로 후려쳐버린 것.

초창기에 잘못 책정이 되고 그나마 매해 다른 과와 경쟁하면서 쥐꼬리만한 인상만 있으니 결국 수가인상은 요원한 길.

한국의 보험의료 정책은 정해진 금액 안에서 각과별로 경쟁시켜서 국가만 재정부담에서 벗어나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의료인들 스스로 덤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임상병리검사센터도 마찬가지다. 경쟁을 유도해서 덤핑하게 한다. 현행법상 의료수가를 덜 받는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얼마 후 검사센터 병리과 의사들이 모두 사직하고 덤핑하는 센터에는 취직하지 않기로 담합카르텔을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함. 신졸들이 개원하면서 다시 덤핑시작.

 

 

미국은 임상병리와 해부병리 전문의가 나뉘어져 있지만 한사람이 둘다 획득할수 있고 교류도 활발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원로교수들 간의 반목으로 완전 나뉘어져버렸고 교류도 없다. 영감들이 이러니 후배들도 그냥 그대로 남남처럼 살아간다.

 

의료도 산업이다. 서비스산업이고, 노동집약적이며 원가의 대부분이 인건비다. (스스로를 잘 트레이닝하는 것이 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다.)

 

(유전체의학과 체질의학은 결국은 만나지 싶다. 내 생애에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인류도 서로 다른 염기배열이 0.1% 밖에 안된다. 그 0.1%가 체질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단일민족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상! 실체가 없는 것.)

 

굴드의 국내 강연 중 어느 의사가 "전자현미경으로 더 자세히 보면 광학현미경으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를 깨달을 수 있나요?"라고 묻자.

 

"현재 전자현미경은 광학현미경처럼 질병 진단에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예쁜 아가씨가 있어요. 그걸 얼마나 더 이쁜지 자세히 보겠다고 확대경을 갖고 가까이 다가가면 과연 무엇이 보일까요? 땀구멍에 낀 불순물이 보이겠지요. 그럼 아가씨를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서 전신을 보는 편이 낫겠지요? 즉 전체를 봐야한다는 겁니다. 생명의 작은 현상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체의 일부분으로 봐야 합니다. 항상 크게 보시기 바랍니다. 현미경과 함께 사는 우리지만 현미경적 시야를 가지면 안 됩니다. 세포보다는 조직, 조직보다는 기관, 기관보다는 개체, 개인보다는 사회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무쪼록 큰 의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형태적인 병적 변화가 질병을 일으킨다는 병리학적 기반에서 발전한 서양의학은 식물분류학과 같다. 하지만 생명이 그 분류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서양의학에서 발전이란? '세분화'다. 하지만 거기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본질적으로 같은 병을 진단명만 다르게 부르는 경우를 많이 봤다.

 

로마는 길을 닦을 때 발전했고, 방벽을 쌓을 때 무너졌다. (한의학도 마찬가지다. 개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건 생존의 문제다.)

 

잔기술 의학 : 눈에 띄는 병변을 잘라내고 뚫어주고 제거하는 내시경이나 외과시술의 손기술은 크게 발전해왔다. 이걸 잔기술의학. 반면 기능적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만성질환들의 내과적 치료는 발전이 늦어짐. -굴드-

 

의학은 과학인가?에 대한 굴드의 답변 "이분법적인 사고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지. 오렌지와 사과가 같으냐고 물으면 당연히 다르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같고 어떤 면에서는다르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우리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철학적 사유는 언어의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사실은 의학과 과학이라는 말 둘다 간단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다. 의학은 초자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환원주의적이며 중립적 가치관을 가지며 개방된 지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과학과 축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꺼야. 그러나 포괄적 이론과 논리적 일관성이 부족하고 전쳬를 간단하게 혹은 수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면에서는 과학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상태지. 특히 과학은 원천적 진보성이 있어야 하는데 의학이 정말로 그런 길을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

 

현대인들의 복부비만을 죄악시하고 다이어트와 운동을 신앙처럼 여기는 것도 하나의 우상이 아닐까? 복부비만도 진화론적으로 나름의 목적과 기능이 있어서 살아남았을텐데 100% 절대적인 악은 아닐것이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 자유로운 의심과 반문이 중요하다.

 

굴드박사 왈 "내가 암으로 아파보니까 나름 철저하다고 여겨졌던 서양의학에 의외로 문제점이 많더라. 세부 전문가는 많은 반면 그걸 총괄해서 어떻게 치료방침을 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 자신있게 나서서 챙겨줄 사람이 없었어. 앞으로 진보하면 생활의학, 예방의학 섭생 등 다양한 방면으로 도움줄 수 있는 종합의학적 개념이 새로 생기면 좋겠어." -그러자면 더 큰 철학적 역사적 안목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암기보다는 분별력과 분석력 위주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읽기와 쓰기와 놀기가 그것이다. 좋은 글은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이고 글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그런 과정이 공부가 된다.  공부를 억지로 시키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도록 이끌어야 한다. 놀기도 중요한데 무언가 받아들였으면 소화를 시켜야 비로소 내 것으로 흡수가 된다. 배운 것을 곱씹어보고 음미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 -굴드-

 

 

"어린애 같은 눈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보라. 전체를 봐라. 짧은 말로 표현해서 네 옆에 있는 눈 먼 사람 눈앞에 떠오르게 하라. 그게 바로 너 자신이다." -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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