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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서양의학이 전입되면서 기존의 한의학과 공존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 양의와 한의가 서로 논쟁하던 흔적들을 살펴보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금도 개선된 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오히려 서로간의 오해와 불신은 더욱 증폭된 느낌이다.


1894년 갑오개혁이후 등장한 개화당에서는 국립병원의 필요성을 느껴 1899년 내부소관의 내부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그 이듬해 광제원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이 병원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대방의(한방내과) 1인, 침의 1인, 종두의 10인, 소아과의 1인, 외과의 1인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방의와 침의가 함께 진료를 하고 있었던 것!
광제원으로 개편 된 이후에도 한양방이 함께 진료하던 체제는 유지되었다.

내부병원이 설립되던 해에 학부 산하에 의학교가 설립되자 이응세, 강필주, 조동호 등이 의학교는 외과학을 한의학교는 내과학을 중심으로 육성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고종이 직접 나서 동제의학교를 설립하였으나 1907년 정부의 공식 지원이 끊기고 고종의 사재를 출원하여 3년간 더 운영하다가 고종이 강제 퇴위되면서 동제의학교도 함께 폐교되었다.


1909년 한의학의 부흥을 위해 대한의사총합소가 개설되고 이 강습소에서는 동서의학을 같이 교육하였다. 한의학과목은 박준성, 서병효가 담당하였고, 서양의학은 안상호, 유병필이 맡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8월 29일 조선이 일본에 강제합병되자 일제에 의해 설립인가가 거부당하고 11월에 공식 폐교되었다.


폐교된 대한의사총합소를 이응세가 인수하여 1916년 조선병원을 설립하였는데 이 병원의 병원장이 지석영선생이었다. 당시 한약진료부와 양약진료부를 두었는데 동의 주임의사는 이준규가 맡고 양의주임의사는 류지선이 맡았다. 이렇듯 동의와 양의가 진료에 있어 서로 협력과 공존을 모색하는 시도가 여러차례 있었다.


이상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 박혜령 학예연구사가 서울대병원보에 연재한 내용을 발췌함.



지금의 의료일원화 논쟁을 보면 냉전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북한과 남한을 보는 것 같다.

100년전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단 같은 병원 안에 양의와 한의가 같이 진료하며 '구두'를 통한 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일단 서로 얼굴 맞대고 만나야 뭐라도 할 것 아닌가.

국공립병원에 한방진료부가 다시 "컴백"한다면 과연 양의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궁금하다. 환영해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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