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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원장님 얼마나 힘드십니까? 저희가 이런 화재 전문 업체입니다. 완벽하게 복구가 가능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의 목소리는 천사같았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있다니!

그는 당장 달려왔다. 선한 얼굴로 활짝 웃는 그를 보니 오랜만에 만난 사촌형 같았다. 그와 현장을 살펴보았다. 할 수 있다고 한다. 걱정하지 말란다. 자기가 얼마전에 부산 어디 모텔 화재건도 완벽하게 복구해주고 왔다면서 자랑스러운 너스레도 떨었다.

 

돈문제가 걸린 큰 사건이 터지면 적군과 아군이 극명하게 나뉘어진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나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다.

 

"제가 같이 가서 설득해보겠습니다."

 

피해자와 합의하기 위해 찾아가는 자리는 영 내키지 않았는데, 그가 선뜻 동행해준다고 한다. 아, 너와 나는 이제 의형제다.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본인 내면의 욕망' 때문에 당한다. 사실 그 욕망이라는 것도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욕망이라기보다는 희망이라고 해두는 편이 낫겠다.

 

그는 일단 착수금을 달라고 했다. 300-400 정도 줬던 것 같다. 마이너스통장에서 꺼내서 줬는데 나로서는 꽤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일이 조금 이상하게 꼬여갔다. 화재복구 전문가라면서 데리고 온 직원이라는 사람이 막걸리 좋아하고 어느 독립영화에 단역으로나 나올법한 잡부같은 인상이었다. 뭘 물어봐도 딱히 나보다 잘 아는 것 같지가 않았다.

 

화재전문 철거복구업체.

 

난 회사이름에 걸맞게 뭔가 특별한 기법과 약품이라도 보유한 줄 알았지만, 그들이 갖고 온 건 퐁퐁과 세차할 때 쓰는 고압총이 전부였다. 직원도 사장과 잡부 1명이 전부인듯 했고, 나머지 인력은 다 현지에서 조달했다.

그들이 모니터를 복원한답시고, 내 고급 LCD모니터를 세워놓고 물을 뿌려댈 때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저게 복구하는거야?

 

업체 사장에게 물었더니 원래 그을음을 제거하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 모니터는 3개월 후에 사망했다.-

 

문제는 철거를 하는 과정에서 생겼다. 보통 화재가 생기면 주인은 절박한 마음에 쓸만한 물건을 건지려고 폐허속을 헤집고 다닌다. 나도 하루종일 그을음더미 속에서 단돈 만원짜리라도 건져보려고 이것저것 뒤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쓸만한 물건을 발견하면 한곳에 모아둔다. 외부로 가져갈 수도 없다. 왜냐면 그을음이 너무 많이 묻어서 일단 닦아야하고 따로 컨테이너 비용을 추가해가면서 보관할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철거하기 전에 사장을 불러서 내가 골라놓은 물건들 -그 중에는 녹용만 담아둔 미니 냉동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은 절대 건드리지 말고 다른 것들만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녹음하거나 계약서를 쓰진 않았다. 그는 나의 아군이었고, 의형제였으니까.

 

철거 다음날 한의원에 가보고 나는 너무 놀랐다.

내가 골라놓은 물건들이 절반 정도 없어진 것이다. 그것도 쓸만한 물건들만 쏙 빼가고 남겨둔 거라고는 돈도 안되는 접수대와 약탕기, 원장실 책상 정도였다.

 

원장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내가 모아둔 구권화폐들도 전부 다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CD나 DVD, 책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돈만 빼간 것이다.

 

불난 집에 와서 내 돈 받아가며 철거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훔쳐가다니!

 

나의 도덕률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짐승의 행위였다. 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사장을 불렀다.

 

 

"아니, 원장님이 버리라고 했잖아요."

 

뭐야? 지금 내가 녹용이 가득 들어있는 냉동고를 버리라고 했다고?

어제까지 아군이었던 나의 형제는 지금 내가 녹용냉동고를 버리라고 했다며 자기는 억울하다고 한다.

 

돈은? 본적이 없단다.

 

"야이!!!"

 

차마 개새끼라는 말까지는 안 나왔다. 그래도 내가 교육을 잘 받은 결과였을까.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사진도 증거도 녹음파일도 계약서도 없었다.

 

"경찰서 갑시다."

 

내가 경찰서 가서 해결하자고 하니 그는 더 잘됐다는 투였다.

 

"좋습니다. 저도 오늘 꼭 공사대금 다 받아야겠습니다."

 

그날은 비가 엄청나게 오던 날이었다.

 

포항 남부경찰서 앞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그 새끼와 말다툼을 했다.

그는 경찰서가 무너질듯 큰 소리로 악을 질렀다.

 

"야이 개새끼야, 공사를 했으면 돈을 줘야지. 시발놈아 한의사가 이래도 되냐. 돈도 많은 새끼가 우리같은 노가다 돈을 떼먹냐. 돈 내놔 이새끼야."

"야이 시발놈아, 녹용은 어디갔냐? 시발 철거하라고 했지 내 돈 가져가라고 했냐?"

 

나도 이제 욕이 술술 나왔다. 며칠전까지만해도 품위있던 원장님이었는데 이제는 경찰서 마당에서 노가다 아저씨랑 소새끼 말새끼하면서 개처럼 으르렁대는 신세가 됐다.

 

경찰이 나왔다.

 

"아이, 아저씨들. 왜 이리 떠들어요? 나가요. 나가."

 

경찰은 해결해주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마치 주말연속극 보면서 라면먹다가 나온 듯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때 갑자기 승철이가 생각났다. 어릴때 동네 친구인데 시내에서 단란주점하는 반은 깡패 반은 사장인 친구였는데, 다급하니까 바로 전화를 들었다.

 

"어디서 온 친구야? 우째 해주꼬?"

 

승철이는 내가 말만하면 이 새끼를 돌매달아서 동해바다에라도 던져버릴 수도 있다는 느낌을 줬다.

 

아니다. 됐다. 내가 해결해볼께.

 

사촌형을 불렀다. 내 전화기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 사건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비가 퍼붓는 가운데 멀리서 사촌형의 차가 보였다.

 

"병성아 잠깐 타라."

 

개새끼가 분이 덜 풀린 채로 씩씩거리는 걸 놔두고 차에 올랐다.

 

"어떻게 해줄까?"

 

형은 저런 인간은 숱하게 봤다는 느낌으로 태연하게 말했다.

 

"형, 저 새끼 진짜 칼로 찔러 죽이고 싶어요. 저건 진짜 인간이 아니에요. 악마에요. 저런 쓰레기는 없어져야 돼요."

 

만약 그 때 내 손에 칼이 들려있었다면 난 그 놈을 찔렀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여러번 난자해서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보내버렸을 지도 모른다.

 

나는 이 사건 뒤로 뉴스에 나오는 '우발적 범행으로 살인을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 더이상 비난하지 않는다. 부처님을 제외하고 누구나 다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칼을 들 수 있다.

 

나를 차에 남겨두고 형은 그 새끼를 만나러 나갔다.

 

그리고 20분 정도 이야기를 했다. 막 언성이 높아지려는듯 싶다가도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마치 파도타듯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잠시 후 형이 돌아왔다. 녹용값으로 50만원을 배상하고 나머지 공사잔금은 주는걸로 이야기를 했다는데 내가 콜하겠냐고 물었다.

 

콜.

 

너무 지쳤다.

 

 

 

 

"아이구, 아주머니. 얼마나 힘드세요. 제가 권리금은 따로 6억을 빌려드릴테니, 천천히 장사해서 갚으세요. 계약금 5천만 내면 이 마트를 인수할 수도 있고 재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힘껏 도와드릴께요.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저도 젊을 때 고생해봐서 도와드리고 싶네요."

 

서글서글한 마트 사장의 이 제안은 그 아줌마의 귀에 그게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을까?

 

사기꾼들은 원래 상대가 듣고싶은 말만 골라서 하는 달콤한 재주가 있다. 반대로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그 욕망' 때문에 파국의 덫에 걸린다.

 

"어이, 아줌마! 난 6억 빌려준다는 말 한 적 없는데요? 잔금 5억 안 내면 계약금 못 돌려드려요."

 

계약금이라도 돌려달라고 호소하던 아줌마는 끝내 분신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했다.

 

아, 진짜 뭐라 할 말이 없다. 언론이나 경찰은 진실을 알 수 없다고 하고, 6억 빌려준다는 계약서도 없으니...

아주머니의 명복을 빈다. 난 아줌마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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