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 : 1930년 출생 -2002년 사망
피레네 지방의 유대인 아버지에게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체국 직원.
가난한 지방공무원의 아들이었던 부르디외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파리의 귀족적 권위적 대학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사고를 갖게되고 자연스레 운동권 학생이 된다.
1955년, 부르디외가 25세가 되었을때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알제리대학의 조교로 취임한다. 당시 군복무를 대신 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는 알제리에서 인류학적 연구를 하다가 1961년(31세) 프랑스로 돌아와 소르본느에서 강의를 한다. 알제리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알제리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에대해서 연구했고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확립한다. 실존주의에서 외부적 문화관습을 뛰어넘어 개인의 이성의 능력을 지나치게 무한하게 규정하는 풍토에 반대했다. 더불어 지나치게 인간의 행동결정을 사회적 규범과 규칙에 따른다고 보는 구조주의적 관점에도 반대했다.
20대에 이미 그는 인간의 이성이 무한하지 않고, 사회적 규범도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불평등하고 권력지향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28세부터 죽기전까지 매년 책과 논문을 발표했다.
1964년에는 고등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때려치우고 자신이 스스로 연구소를 세운다.
그것이 바로 유럽사회과학연구센터이다.
1968년 5월 당시 38세의 부르디외는 이미 중견 대학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학생운동(5월 혁명이라 부름)의 한가운데.... 모든 학생들이 따르는 정신적 이론적 리더가 되었다.
그의 이론(1964년 발표작인 상속자들이라는 책이 대표적이다)에 힘입어 프랑스는 소르본느 대학으로 대표되는 소위 명문대학의 서열화가 박살났다. 이게 뭘 의미하냐면 교육제도를 통해 권력과 계급이 세습되고 재생산되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 연고대가 없어진 것.
모든 대학은 공립학교가 되었고, 대학운영은 100% 정부의 몫으로 돌아갔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프랑스는 정말 인류에게 있어 혁명의 국가다. 프랑스 대혁명, 5월혁명...
1979년 49세의 부르디외는 '구별짓기'를 발표한다.
50대의 그는 맹렬한 연구자였고, 60대의 그는 강직한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사르트르처럼 연구실에 쳐박힌 교수가 아니었다. 광장의 교수. 그가 바로 부르디외다. 학문의 이유가 불평등한 사회와 모순된 현상을 혁파하는 무기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추앙받았고, 90년대에 전세계를 휘몰아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철저하게 계급론적 시각을 고수했고 문화전반에도 적용시켰다.
30만원짜리 베를린필하모닉의 내한공연을 듣고, 피카소 그림과 뒤샹의 변기에 감탄하는 이들과 주말연속극에 열광하고 국제시장에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관에 차이가 있다. 그들의 출신, 학벌 등의 사회적 차이가 예술적 취향에까지도 갭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과 수준이 달라라는 마인드가 깔려있다.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가 어떤 가정과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아왔는지, 어떻게 계급적으로 길들여졌는지에 가장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죽도시장에서 건어물장사하는 엄마 품에서 전국노래자랑만 30년 듣고 자랐으면 당연히 베를린필의 연주에 졸린건 당연하다. 개인의 미학적 취향은 사회적 계급에 따라 강제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구분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베를린필하모닉을 보러다니고, 투란도트 오페라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나 가끔 보고 주말연속극에 빠져지내는 사람들을 하층민으로 보고 그런 영역의 상품을 대중예술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뭐가 고급예술이고 뭐가 대중예술이냐. 귀족과 농노처럼 지배 /피지배 계급론이 적용된다.
박원순이 세종문화회관의 지하주차장을 싹 없애버렸다. 공연관람객들이 지하6층까지 주차하던 공간을 주차 2층 한 칸으로 한정시켜버렸다. 도심의 차량유입을 억제한다는 논리를 펴지만 후후후 대부분의 공연이 주말 저녁시간대에 집중된다. 그 시간대에는 광화문 일대에 교통량이 별로 없다. 공연 마치는 시각이 10시가 넘는다. 도로는 텅텅비어있다. 하지만 박원순은 아무리 지하 4개층의 주차장이 텅텅 비어있더라도 오페라 관람객들이 그곳을 사용하는 것을 불허했다.
30만원짜리 빈필의 공연을 보러오는데 택시타고 대중교통 타고 오라는 거다. 당연히 반발이 극심하다. 이게 말이 되냐. 빈필 보는데 광화문에 버스 타고 가야되냐고.
삼대에 나오는, 너랑 나랑 계급을 전도시키세라고 허세를 부리던 덕기의 모습이 박원순에게 오버랩된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뭘 알아야 즐기지.
야구를 보고 재미를 느끼려면 야구 규칙을 알아야 한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도 우와! 대단하다!라고 느끼려면 규칙을 알아야 한다. 어느 정도 배워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 교육에는 계급적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술을 이해하고 소비하는데도 그가 어디서 자랐냐에 따라 달라진다.
뭘 알아야 이해가 되지. 모르면 가치없다고 느껴진다. 미학적 쾌감을 느끼려면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 미적 이해는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능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단 먹고 사는게 해결된 후에야 문화적 취향이 의미를 갖는다. 당장 노가다하러 가야하는데 예술은 무슨 얼어죽을!
예술품의 생산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무명작가가 인사동 갤러리에 방 한가운데에 똥물을 한바지 갖다 퍼부어놓아도 언론가와 비평가들이 격찬하고 박수치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문화권력으로 작동하여 그 작품에 대한 금전적 가치마저 올린다. 내가 보기엔 똥물인데, 주위에서 격찬하고 비싼 돈을 주고 구경하니 정말 그 똥물이 고가의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하찮은 녹슨 못 하나도 칠곡군 금산공단의 바늘공장에서는 재활용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인사동 갤러리에 모셔다 놓고 조선일보 기자와 힘좀 쓰는 평론가들이 박수치고 권력의 숨결을 불어넣어주면 최고의 예술작품 계급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문화예술적 상품에도 계급이 존재하며 그것이 부당한 권력에 의해 생산된다는 시각!!
예술의 생산과 소비에 이런 계급론적인 시각을 적용하는 것!
그는 이런 관점을 정치에까지 확장시킨다. 현대의 정치는 민주주의가 자리잡은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늘날 정치는 권력, 자본 그리고 여론을 조작하는 언론에 의해 쥐락펴락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그러니까 한국으로 따지면 삼성, 조선일보, 새누리당. 이 3가지 권력이 결탁하면 겉으로는 민주주의처럼 보이지만 얼마든지 왜곡된 민주정치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검사, 신문기자, 국회의원이 모여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그 식당 사장이 밥값을 지불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60대의 부르디외는 노동자와 광장에서 함께 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진짜 좌파. 오리지날 좌파임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1789년 프랑스인들은 스스로 왕의 목을 자르고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이론을 만든다.
하지만 평등해졌는가? 계급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자들은 고급와인과 에르메스 버킨백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면서 자신이 상류층임을 인정받으려 한다. 남자들 역시 벤츠키와 고급시계 사진올리며 자신을 상류계급으로 바라봐주기를 원한다. 어쩌다가 일년에 한번 보러가는 라트라비아타 공연티켓을 SNS에 찍어 올리면서 마치 자신이 오페라를 자주 보러다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압구정 백야 일일 드라마' 시청중이라고 자기 블로그에 올리는 여자는 드물다. 압구정백야는 하층 민중계급이 주로 소비하는 예술품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상류층 지향성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이 존재가 하층민 출신일수록, 문화적 지식이 얕을수록, 지적 컴플렉스가 심할수록 그런 경향은 짙어진다.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왕, 귀족의 계급이 사라졌나? 아니다. 여전하다.
그것에 주목한 학자가 바로 부르디외다.
그가 만든 개념. 아비투스.
구별짓기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 아비투스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가 갖는 계급적 성향과 습관을 말하는 개념인 아비투스.
우리는 모두 각자 아비투스를 갖고 있다. 내가 무슨 가구를 좋아하거나 어떤 음악이나 그림을 좋아하는 취향을 결정하는 개인적인 선호도, 성향, 생각의 틀을 아비투스라고 부른다. 이 아비투스는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어떤 계급이냐에 따라 경향성을 띤다.
니가 베를린필하모닉의 연주를 듣고 잠이 오잖아? 그럼 넌 그걸 소화할 수 없는 하층취향의 아비투스를 교육받은거야. 너의 문화적 혈관에 천민의 피가 흐른다고.
자본계급과 문화계급이 서로 얼추 비슷해진다는 말이다. 돈이 있어야 표를 끊지. 당장 먹고 살게 걱정인데 뭔 예술타령이냐. 당장 추운데 스리버튼인지 투버튼인지 중요하냐. 추위만 가리면 되지. 패션은 무슨!!!
그리고 재력=문화적 소비수준의 레벨이 얼추 연결된다. 이건희가 방산시장 마약김밥 찍어먹으면 그건 그냥 서민체험, 서민문화 체험이지. 안 어울리잖아. 서로 불편한거야. 특이하니까 뉴스에 보도되는거지. 잘 봐바. 이건희가 조수미를 자기집에 불러서 독주회를 들었어. 뉴스에 나오나? 안 나오지. 당연한 일이니까. 이건희가 근데 방산시장 가서 쭈구리고 떡볶이 먹어봐라. 당장 뉴스에 '소탈한 회장님'이라면서 나오지. 왜냐 특이하잖아. 민중들에게 위안을 주잖아. 아, 우리회장님도 저런거 드시네. 아 나도 그리 불행한 것만은 아니야. 이게 현대에서 텔레비전의 가장 큰 역할이야. 민중계층의 하층민들의 불만을 위로해주는 것.
드라마에 맨날 부잣집 이혼에 배다른 형제들이 치고박고 싸우는 것만 나오잖아. 그래야 천민들이 그걸 보고 위안을 받고 내일 또 일터에 나가서 묵묵히 일을 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나? 아니야. 부잣집애들이 더 품위있고 성격 좋고, 사랑을 베풀줄 알고, 가족들이 다 화목해. 아버지가 매달 생활비로 5천만원씩 주고, 내 고등학교 친구가 빌게이츠 아들이고, 매일 좋은 음식에 가정부에 기사 딸린 차가 있고, 계절마다 가족동반 해외여행을 가는데 불행하기가 쉽나?
돈이 생길수록 문화소비에 대한 열망이 올라가.
국민소득 2만달러를 돌파하면서 원두커피를 찾고, 골프와 스키가 대중화되고, 3만달러가 넘어서면 말타고 요트 타는 사람들이 늘어나.
자본이 문화을 늘 선행하는 거지. 결국 문화상품도 자본주의 하에서 소비의 객체가 되니까.
하나 조사를 해보자.
부모의 재력, 너의 출신학교, 니가 좋아하는 가구, 음악, 영화, 옷, 취미활동, 인테리어 취향, 직업, 재산, 주소, 좋아하는 요리, 친구들 성향, 영화장르, 좋아하는 배우, 주로 보는 티비 프로그램, 좋아하는 미술작품, 클래식 공연, 화가, 박물관, 해외여행빈도 , 배우자의 외모, 휴가지, 니가 지금 입고 있는 옷, 머리 모양, 갖고 있는 차, 가방, 시계, 옷 등등
이런 조사 결과에 따라 모든 인간은 3가지 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상류층 / 중간계급/ 대중취향 하층민
당신은 상류/ 중간/ 민중 가운데 하나의 칸으로 들어간다.
노파의 일그러진 손을 보고 "아이구 류마스티 걸렸네 노가다하는 손인가?'라는 생각이 들면 넌 하층 민중계급이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진이네요.'라면 중간계급, '음, 아름답네요. 플로베르의 늙은 하녀가 떠오르는 노동의 상징체 같군요.'라면 상류층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미학적 해석과정에서 계급적 성향에 따라 갭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
민중계급은 축구에 열광한다. 공 하나 던져주면 22명의 어린이들이 재밌게 놀 수 있다. 복싱도 아주 좋아한다. 주먹만 있으면 되니까.
골프나 스키는 중간계급의 스포츠다.
요트, 승마는 상류층의 스포츠다. 왜? 말과 넓은 들판이 있어야 하잖아.
피지배계급일수록 폭력적, 단체규율, 희생정신, 고통에 대한 인내와 복종이 강조되는 스포츠를 주로 소비하고 지배계급일수록 혼자 조용하게 넓은 곳에서 한적하게 즐기는 스포츠를 주로 한다.
매너. 고급스포츠일수록 매너가 중요시된다. 축구의 매너보다 골프의 매너가 더 엄격하다.
영국사립중학교에서는 베개 배는 법까지도 가르친다니까.
음식 매너도 마찬가지야. 칼질을 왼손으로 하면 안되고 3가지 종류의 포크는 바깥쪽 포크부터 차례대로 써야하고 달그락 소리 내면 안되고, 냅킨은 늘 허벅지에 올려두어야 하고 종업원을 소리내어 부르면 안되고....
그냥 동네 중국집 가서 후룩후룩 한끼 때우는거랑 레벨이 달라져.
음식소비의 취향에도 계급적 아비투스가 존재한다는 거지.
대중교통수단의 이동도 상류층 / 중간계급 / 민중의 레벨이 달라져.
상류층은 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고, 중간계급은 차를 타고 지상으로 이동하고 민중계급은 버스나 지하철로 단체로 실려서 이동하지. 개인적 시간의 소비도 민중계급이 이동에 가장 많은 시간을 허비해. 상중하 말그대로 도시의 지하로만 이동해서 다닌다면 넌 현재 하층민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
근무환경도 마찬가지야.
강남역 삼성본사에 가면 직급이 높을수록 높은 층의 방을 배정받아. 니가 8층에 근무하면 22층 근무자보다 낮은 신분임이 틀림없어.
회장님은? 가장 높은 층에 계시지.
로스쿨이나 의전원처럼 하층민들이 상류층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장치는 더욱 교묘해졌어.
아무리 머리 좋아도 이건 뭐 부모가 돈이 없으면 절대로 의사가 될 수가 없어. 젠장.
누가 바이얼린을 전공했는데 서울음대 나오고 오스트리아 유학을 갔다왔다고 치자. 그럼 그 여자애 부모가 돈이 많을까 없을까? 당연히 많지.
바이얼린 한대에 4천만원씩 하는데 어떻게 노점해서 그걸 사주냐. 아버지가 잘 버니까 1억짜리 바이얼린 사주고, 레슨도 왕창 시켜주고 유학보내주고 얼굴도 성형시켜서 서울대 출신의 훈남 성형외과 의사와 결혼시키고 강남에 병원건물을 차려주는거지. 그 부는 다시 그 아래 세대로 물려주고, 그 아이는 어릴때부터 4대 오케스트라 공연보러 외국에 데리고 다니고, 최고의 명문 사립 초등학교부터 교육을 시켜. 또 아이비리그에 진출해서 교수가 되고 사회지도층으로 살아가게 되고....
이걸 계급의 '재생산'이라고 해.
문제는 상류층과 민중은 확실히 구분이 가는데 이 중간계급이 모호하다. 쉽게 말하면 중산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부르디외는 이 중간계급의 문화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주장해. 즉 상류층을 흉내내려는 어설픈 애들이 자신을 중간계급이라고 규정하는 거지.
검은색(하층 민중계급)으로 간주되기는 싫고, 그렇다고 흰색(상류층)이 아니라는 점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자신들은 회색(중간계급)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거야.
중간계급의 특징은 '상승지향'이야. 늘 상류층을 동경해. 상류층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에너지를 써.
부르주아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는 쁘띠부르주아들 ㅋㅋㅋㅋ
어슬프지.
늘 자신들을 민중보다 높은 레벨에 있다는 선민의식에 찌들어있고, 상류지향성을 나타내.
아주 가끔 프랑스 전통 코스요리를 시켜먹으면서 스스로 만족감을 느껴. 물론 돈이 없어서 자주는 못 시켜먹지. 본인에게는 흔하지 않은 드문 이벤트이기 때문에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잔뜩 올리게 돼. 나 이런데서 밥먹는 사람이야~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거지.
그리고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자신들이 사회의 취약계층을 돌보는 '상류층'임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물론 거액으로는 하지 않아. 왜? 돈이 없잖아! 몇만원씩 후원하면서 엄청 티를 많이 내. 인스타에 후원하는 인증샷이 난무하지. 상류지향성을 드러내는 거야. 사회지도층이라도 된 것처럼 캠페인을 해요. 2014년에 유행했던 어설픈 중간계급자들(톰크루즈나 빌게이츠 같은 사람들 말고 무명의 배우나 파워블로거들)의 아이스버킷 릴레이도 자기가 사회를 이끈다는 허세에서 시작된거야.
얘들은 스스로의 직업도 다 괜찮다고 '스스로 생각해' ㅋㅋㅋㅋㅋㅋ
의사거나 교사, 대기업 직원, 대학 연구원, 작은 빌딩의 건물주, 교직원, 조교수, 약사 뭐 그런 정도의 레벨.
근데 지가 노동을 안 하면 돈 나올 구멍이 없어. 귀족처럼 살고싶지만 실상 노가다랑 자본구조가 같아. 의사가 아파봐라. 결근하면 돈 10원도 안 나와. 그게 쁘띠부르주아의 가장 큰 특징이야. 본질적으로 하는 일은 고상해보이지만, 노가다 민중계급이랑 돈버는 구조는 같아.
얘들이 문화적 허세가 가장 심한 집단이기도 하지.
재미도 없는 폼페이 전시나 루브르 특별전, 퓰리쳐 사진전에 가는 애들이 이 집단이야.
하층 민중계급은 아예 그런것에 관심을 가질 여력도 없고 취향도 아니고 주말연속극이나 보고 내일 노동의 시간을 대비하지, 당장 피곤한데 그런데를 왜 가냐!!!
중간계급은 시간은 좀 있으나 직접 비행기 타고 폼페이나 루브르에 갈 수가 없으니, 이런데를 다니는 거지.
그리고 반드시 인증샷을 찍어서 올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고급문화에 대한 지향성은 SNS가 발달되면서 그 허세가 날로 심해지고 있지.
부르주아처럼 보여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쁘띠부르주아들의 허세. ㅋㅋㅋㅋ
상류층은 이해가 안 되지. 용산 중앙박물관 폼페이 특별전을 왜 가냐? 그냥 비행기 타고 다음 주말에 폼페이 한번 갔다 오면되는데.
얘들은 콘서트를 보러가기도 하지만 연말이나 특별한 날에만 가지.
그리고 꼭 그걸 SNS에 올려. 왜 선망의 대상이니까. 그렇게 보여지고 싶으니까.
그냥 상류층 흉내내는 얼치기 집단이야. 허구지 허구. 상류층을 향해 모가지가 뿌러지게 쳐드는 허세집단. 허풍으로 가득해.
까르띠에 시계를 사고 티파니 반지를 사는데, 일생 일대의 큰 이벤트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일생에 단 한번 큰 맘먹고 티파니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지.
이건 음식과도 연결시킬 수 있지.
하층 민중계급이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사먹으면
중간계급은 농축과즙100% 아침에 망고주스를 사먹고
상류층은 그냥 필리핀에서 직수한 망고를 먹어.
하층민은 삶이 고단해. 마트에 가도 100% 주스를 사기가 두려워져. 유기농목장 우유를 사기가 꺼려지지.
늘 1+1 우유를 집어들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야. 왜 늘 계좌가 부족하니까.
빵은 파리바게트나 홈플러스 브랑젤리에서 사지. 시식코너도 반드시 들러야해. 공짜잖아!
그들의 좌절감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해소돼. 유일한 탈출구지.
그들은 직접 눈앞에서 하는 공연은 못 봐. 단가가 안 맞거든. 한번에 10만원씩 하는걸 어떻게 보냐.
결국 복제가 쉬운 문화상품으로 몰려. 영화, 책, 드라마, 음악 같은거지. 연주회나 오페라 같은 단가가 높은 일회성 공연은 소비할 여력이 없지.
짝퉁 가방을 들고, 마트에서 주로 쇼핑을 해. 늘 생활에 치어 생활하다보니 어느 순간 나이든 자신을 발견하게 돼. 언제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은거지?
생활이 전쟁이야.
현실이 괴로우니 탈출구는 매일 저녁 홀린듯이 보는 텔레비전이 전부야. 네모난 바보상자가 유일한 탈출구라니까.
드라마에 나오는 부자집 가족간의 불화를 보며 위안을 삼고, 뉴스에 나오는 온갖 안 좋은 소식을 보며 스스로의 처지에 위로를 받아.
사회지도층이나 연예인의 파멸에 환호하지. 부자들이 파산하거나 연예인이 망해버린 뉴스에 묘한 쾌감을 느껴.
부잡집 애들이 예쁘고 성격도 착하고 좋은 남자 만나서 화목하고 건강하게 해외여행 맨날 다니면서 날씬하게 잘 산다는 내용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어떤 하층민이 그걸 보고 위안을 받겠나? 당연히 시청률이 박살나지. 재수없잖아!!!
상류층 인사들이 고통받고 불화를 겪는 장면이 많아야 텔레비전이 제 역할을 하는거야. 한국에서 막장드라마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그거야. 그만큼 위로받을 민중계급의 수요가 많다는 거지.
그리고 요즘 흔해진 SNS, 페이스북에 시덥잖은 글을 올리고 좋아요가 많이 눌러지면 마치 스스로 연예인이 된것처럼 느끼기도 하지.
민중계급은 문화적 소비에서 매우 위축되고 박탈된 상태를 대대로 대물림해.
계급의 상속.
끝내 프랑스 대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는 구호는 아직도 미완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받는 보편적 인권이 공평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계급사회가 여전하다.
현대에 들어서 자본주의가 끼어들면서 더욱 교묘해졌다.
이런 끈질긴 계급주의에 저항하고 혁파하기 위한 정치/사회/교육/문화/예술의 다방면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최우선은 하층민들이 이런 현실을 우선 깨우쳐야 한다. (중간계급은 허상이라고 이미 말했다.)
그리고 그 통로는 텔레비전이다. 하층민을 움직이려면 텔레비전을 장악해야 한다. 그래서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신문사들이 종편으로 진출한 것이다. 텔레비전을 장악하지 못하면 한국의 모든 선거에서 패배한다.
하층민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투표다.
각성된 하층민들의 조직된 투표가 사회를 변화시킨다. 광장에 나가거나 피를 흘릴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