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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부제는 '한의사집단은 어떻게 약사집단에게 뒤통수맞았는가'이다. 내가 보기에 한의사집단처럼 어리숙하고 세상물정모르고 순박한 집단이 드물다. 특히 지난 투쟁의 과정에서 살펴볼때 실리보다는 명분에 굉장히 집착한다.

곡괭이를 들고 우금치의 언덕에 서서 일본군의 총부리를 향해 돌격하던 농민군의 모습같다고나 할까.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김대중대통령의 명언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어야지요'. 한의사집단은 이런 흥정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럼 본인이 학창시절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겪은 경험과 함께 왜 한의사집단이 약사집단으로부터 뒤통수를 맞게 되었는지 서술해보겠다.

먼저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은 약사들의 '집단'에 대한 글이지 약사 '개인'에 대한 글이 아님을 전제로 밝힌다.


믿기 어렵겠지만 70년대에 한의사들이 약사들에게 한약을 가르친 적도 있다. 그리고 약대 내에서도 한약을 연구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약국에서 대놓고 약탕기를 돌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1993년 2월까지만해도.

당시 김영삼 당선자가 대통령 취임하기 직전인 1993년 1월 30일, 보건사회부는 약사법 시행규칙 제 11조 1항 7호 '약국에서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청결히 관리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하여 약국에도 한약을 조제판매할 수 있다는 입법예고안을 발표하였다.
한의협이 반대했지만 당시 안필준 장관은 법안에 싸인하고 법제처로 이송했다. 그리고 김영삼이 등장했다.

당시 보사부장관이던 안필준씨(63)가 [당시 신석우약정국장에 속아 개정안에 결재했다]는 장문의 편지를 95년 4월 한 한의사 앞으로 보내왔다.

안 전장관은 이 편지에서 [보사부의 시행규칙 개정 움직임을 안학수 당시 한의사협회장으로부터 처음 들었으며 그후 신 전국장에게 그런 기안을 하지 말도록 강력히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안씨는 그러나 신 전국장이 [현재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우황청심환 등 공장제품을 팔도록 하는 이외 아무것도 없다] [현재 수출까지 되고 있는 생약을 약국에서 판매한다는 것 뿐]이라며 강력히 결재를 요청했으며 그는 이 말을 믿고 결재했다는 것이다.

그는 [오랜 장군생활에서 감히 부하가 상관을 속이는 일은 상상치도 못했는데 결과적으로 한의사에게 피해를 주었고, 부탁 한번 받은 일도 없는 약사회의 로비를 받았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신석우 전 약정국장은 [안 전장관이 약사법을 개정하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한 적이 없다]며 [안씨가 주장하는 대로 거짓보고를 한 일도 없다]고 말했다.

신석우 국장 지금 뭐하고 있는줄 아는가? 한국제약협회에서 전무일을 맡아 한국제약업계의 이익을 잘 대변하고 있다.


안필준이가 신석우에게 속았든 안 속았든 오늘 논점에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1993년 10월 8일로 돌아가보자. 93년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약분쟁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약사법이 발표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약사의 한약조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며 한약사제도 신규도입을 통해 궁극적으로 한약은 한약사 면허를 받은 자에 한하여 조제할 수 있도록 함


2. 한약사는 분업실시 때까지 보사부장관이 정하는 '한약조제지침서에 따라 조제할 수 있고 한약조제지침서는 50-100종으로 제한할 방침임.


3. 한약사의 면허는 대학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한약분야의 과목을 이수하고, 한약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자에 부여함.(다른 의료관련 직종과 달리 '한약학과 졸업자'가 아님에 주목.)


4. 약사 한약조제권에 대한 경과 조치
기존 약사는 법 시행후 2년 이내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한약조제시험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한약을 조제할 수 있도록 함.
(시험주체, 과목, 방법, 난이도, 합격자정원에 대한 내용이 없음에 주목.)


5. 법 시행당시 1년이상 한약을 취급해 온 약사는 법 시행 후 2년까지만 한약을 조제할 수 있도록 함.


자,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한의사들은 과연 이것이 그 당시 합의문이었나고 자신의 눈을 의심할 것이다. 맞다. 우리는 당시 이런 합의문에 사인했고 투쟁판을 접었다. 허나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먼저 하나하나 살펴보자.
한약조제지침서 내용과 관련하여 약정국장이 가감문제를 들고 나온다. 즉 한의사들은 50개 처방으로 제한시키려 했고 약사들은 100가지 처방에 가감까지 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가감이라...가감이 뭐냐면 처방에 약재를 추가하는 것인데 이게 허용되면 처방수를 제한하는 것이 의미없어진다. 그런데 김영삼대통령이 유럽순방에 오른 어수선한 틈을 타 약정국장이 가감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언론에 흘리게 된다. 이에 유럽 갔던 복지부장관이 홀로 국내로 돌아와 지침서를 발표한다.

100가지 처방. 가감불가.

약사들의 승리였다. 더구나 가감은 금지됐지만 현재 탕전시스템은 일단 끓여버리면 무슨 약재를 가감했는지 알길이 없다. 약사가 잡아떼면 그 뿐이다. 더구나 약사들은 자신이 판매한 한약에 대해 기록물을 남기지 않아도 된다.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이 아닐수 없다.

약사들 주장대로 100종으로 결정되고 난 후에도 약사들의 파워가 미치는 국립연구기관에서 '200종으로 확대하고 가감도 허용해야 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자 그럼 이제 합의문의 두번째 사항 한약사 면허 응시자격을 보자. 한약학과를 졸업한 자가 아니라 대학에서 한약관련 과목을 이수한 자로 규정되어있다. 물론 당시 약대에서는 한약과목이 태부족해 응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계절학기로 한약과목을 넣기만 하면 한약학과를 졸업하지 않아도 한약사 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약대애들은 데모했고 과목개설을 얻어냇다. 그리고 약사면허도 따고 한약사 면허도 따냈다.


한약학과 설치 문제를 보자. 애초 교육부는 아무 생각 없었고, 한의사집단은 한의대나 한약학대학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약사들은 물론 약대 내에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의대에서 총파업을 하고 있었는데 복지부차관(이 색히는 나중에 김대중 정부에서 경제수석까지 지내게 된다.)이 한의대 학장들 모임에 나와 '한약학과 잘 해결될 것이니 학생들만 복귀시켜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나서 복지부에서는 한약학과를 약대 내에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사태는 약사들의 뜻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약조제시험에 대해 보자.
이 시험의 성격은 기존에 한약을 조제하고 있던 약사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자는 측면에서 합의된 것이었다. (당시 음지에서 한약을 조제해 팔던 약사들은 천명 미만인 것으로 확인됐다.)

약사들 입장에서 보면 비굴하고 치사한 시험이었기 때문에 아예 헌법소원으로 판을 엎어버리기 위해 헌재 판결이 나기 전인 1차 시험은 보이콧했다.

한의대생들 기억나는가? '한발협'이라고. 이 단체의 박수사건이 유명하다.
"약사들 한조시 한번 더 치게 합시다. 자 동의하시죠? 박수치세요"

약사회는 '한약사 제도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해놓고 있었다. 한약조제시험도 보이콧하며 소송에 전력을 다 했으나 헌재가 기각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하루아침에 한조시 전원응시로 전략을 바꿨다. 이들에게 명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의대교수들은 한약조제 자격시험출제는 약대 교수를 배제하고 100% 한의대교수가 해야한다며 출제장을 나왔다. (한의사집단이 얼마나 명분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결국 한의대교수 몇명이 들어가긴 했지만 애초 약속대로 5:5가 아니라 11:22였으며 약대측 교수들이 예상문제집 강사였다는 점. 출제장에서 외부로 자유로이 전화통화까지 가능했다는 점 등 국가시험이라고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고 한의대교수들은 전원 출제거부를 선언하고 나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한약조제시험을 출제한 약대 교수들 중에 본초학과 방제학을 전공한 교수가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

출제장에서 나온 한의대 교수들에 의해 사슴의 뿔은 무엇이냐?는 식의 문제를 일부 약대교수가 출제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고 감사원과 시민단체들의 압박이 계속되었으나 약사집단은 꿋꿋이 시험을 치루고 2만3천3백60명이 합격. 합격률 96.9%를 달성하게 된다.


약사들의 대승이었다. 당시 한의사 수가 8천명이었으니 얼마나 엄청난 숫자인지 알 수 있다.


이렇게 93년도 합의문 조항이 하나씩 실행될 마다 대패한 한의사집단과 학생들은 엄청난 강도의 투쟁을 펼쳤으나 사태를 되돌리기는 불가능했다. 이 해에 한의대생 3천명이 모두 유급되는 사태를 맞았다.

돌이켜보면 한약분쟁은 두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93년도 합의문이 나오기까지의 투쟁.
2. 그 합의문이 실천되는 과정(95, 96, 00년)에서의 투쟁

93년도는 한의사집단의 자체역량보다는 학생들의 희생이 컸고 국민여론에 힘입은 바 컸다. 93년도 합의문만 놓고 보면 한의사집단의 승리가 맞다.

하지만 이 합의문이 실행되던 시기에 이르게 되면 한의사집단은 교묘하게 파고든 약사집단에게 대패하게 된다.

95년은 약대 내 한약학과 설치문제에서 패배.

96년은 한약조제자격시험 문제에서 대패.

00년은 약학과 출신의 한약사 시험응시 문제에서 패배.


한약분쟁의 과정이 어찌됐건 결론만 놓고 본다면

3만명의 합법적인 한약조제약사 배출.
약학과 출신의 한약사-약사 복수자격자 배출.
약대내 한약학과 개설.

93년도 합의와는 너무나도 다른 결말 아닌가.


합의문의 틈새를 파고 들어 예외조항으로 본조항을 뒤엎어버리는 탁월한 뒤집기의 명수. 이게 약사집단의 특기다.


마지막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내가 약사집단(개인이 아니다)을 경멸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직종 뿐 아니라 후배약사들까지도 짓밟아버린다는 점이다.

한약분쟁으로 인해 3만명 가까운 선배약사들은 한약조제를 합법적으로 할 권한을 쟁취했지만, 후배들은 한약에 손댈 수 없도록 차단됐다. 약사집단은 한의사들과 협상에 나설때 후배들을 배려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있었나? 있었다면 알려주시오.)
전약협 역시 자신들이 한약사면허를 따는 것에는 맹렬하게 투쟁했지만 후배들에 대해서는 배려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간략하게 약사들이 한약을 가져가게 된 과정을 정리해봤다. 그럼 여기서 이제 한약분쟁은 끝났는가? 그렇지 않다. 조만간 한약분업을 둘러싸고 더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언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국민들은 더 열심히 세금내야할 것은 확실하다. 우리 모두 그 날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자.




(본문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에 대한 지적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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