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대 수업을 듣다보면 모든 병이 A라는 처방으로 2주 정도 투약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증상이 다 치료될 것처럼 가르치는 무협지 교수들이 있다. 듣기엔 그럴싸하다. 멋지다. 캬,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방에 모든 증상이 날라가다니. 나는 걔네들을 '한제 망상주의자'라고 표현한다. 시발 한제로 낫긴 뭘 나아. 약을 써보기는 해 봤나.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증례도 아니고 그냥 에세이다.
26주전 우리한의원에 어떤 환자가 찾아왔다. 이미 돌고 돌고 돌아 대학병원 세군데, 양방 정신과, 한방 신경정신과 한의원까지 순례(?)를 마치고 찾아온 이였다. 소위말해서 모든 의사들이 '버린 환자'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4주간 한약을 투약하고나서 이 환자가 왜 버림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교과서적으로 (양한방 모두 통틀어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환자. 뭐 이런 환자가 다 있어! 보통 이런 환자들을 만나게 되면 양방교과서보다 한방교과서가 관용도가 조금 더 높다. (근데 그 관용도라는 게 마냥 좋은 게 아니다.)
어떻게 할래? 스톱? 다른데 가봐? 어딜 보내줄까? 갈데가 없네. 젠장! 더이상 갈데가 없다는 처지를 서로 합의하고 치료를 시작했다. (내가 이 환자 포기하면 얘는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는 느낌을 매일 받는게 바로 전문의의 소양이다. 불행히도 난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처절한 사투. 26주간 24가지 처방(물론 조금씩 달라진 처방이지만)으로 치료하고 환자와 빠이빠이했다. 내가 한의대 졸업하고 가장 긴 사투를 벌인 환자. 어떤 환자였는지 여기에 쓰기는 어렵고 의미도 없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로컬은 무협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그에게 먹인 24가지 처방이 완전히 다른 24가지가 아니었고, 크게 보면 2가지 처방인데 각각 12가지 변방을 투약했다고 보는게 맞겠다. 매주 처방이 바뀌었다. 귀찮아서 죽을 뻔 했지만, 보람과 사명감이 그 귀찮음을 압도했다. 결국 계절이 두번 바뀌었고 웃으면서 헤어졌지만 그 과정은 전혀 멋지지 않다. 뭐 그래도 사람 하나 건졌다고는 생각한다.
"야, 속는 셈치고 한의원이나 한번 가봐."
우리나라 의료구조상 한의사가 이렇게 버림받은 환자를 주워먹는(표현이 이상하지만) 경우가 많다, 특히 체질을 표방하면 그 경향은 더욱 커진다. 이 말은 뭐냐면 가볍고 스탠다드하고 교과서적 치료로 충분한 환자, 쉬운환자!!는 이미 다 남들이 가져가고 듣도보도 못한 환자들만 남아서 우리를 찾게 된다는 점이다. 헤게모니를 쥐지 못한 마이너 의료인들의 숙명이다. 누가 트랜스해줘야 겨우 연명하거나 아니면 돌고돌고 도는데 지쳐서 환자가 스스로 찾아오거나.(양방쪽 마이너는 안정적으로 동료들로부터 트랜스를 받지만, 한의원은 주로 후자다) 피부환자가 우리 한의원에 많이 오는데 그 과정은 대부분 동일하다. 로컬 피부과를 다니다가 잘 안 돼서 대학병원 피부과로 트랜스돼서 날라갔는데 거기서 준 처방이 로컬피부과랑 완벽하게 똑같은 경우가 많다. 그 상황에 처하면 일부의 환자들이 계몽(?)을 하고 한의원으로 달려간다. '야, 시바 뭐 대학병원도 해줄 게 없네. 이게 다야? 이걸로 안되더라니까! 다 해봤어. 안된다구! 나 어떡하냐. 어디 가야돼?'
이렇게 찾아온 환자들. 정말 치료하기 어렵다.^^ (한의대 수업시간에 듣던 내용이랑 완전 다르지? 내가 실력없어서 갖게된 내 생각이야. 셀프계몽해서 자기발로 찾아온 이런 군의 환자들. 정말 치료하기 힘들다.)
학생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뭐냐.
1. 일단 무협지처럼 씨부리는 것들은 다 임상무식자들이기 때문에 그냥 쟤는 저렇게 생각하는갑다하고 넘기기 바란다. 서태지가 25년 전에 이야기해줬잖아.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2. 돌고돌고돌아서 오는 환자가 있다면 조오오오오오오올라 긴장해야한다. 니나 내나 실력은 도긴개긴이니 이미 다 해봤다는 걸 전제로 하고 마음 단단히 먹을 것.
이 두가지를 조합하면, 로컬한의사가 살아가려면 양한방 할 것없이 미친놈처럼 공부하고 트레이닝받고 준비하고 기다려야 겨우 남들이 '버린 환자' 주워 먹으면서 임상의로 연명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은 절대 무협지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점. 물론 물빵약빵 업장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3. 쉬운 환자 많이 보는게 명줄 늘이는데 도움이 된다.
"야야, 한약 그거 플라시보 아냐? 그걸로 뭔 병이 낫는다고 그래. 그냥 보약이나 지어주지."
라고 생각하시는 의료인님께서는 이 포스팅 하단 리플에 자물쇠 채워서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다음부터 이런 환자(대부분 정신과를 거쳐서 옴)군이 오면 꼭 트랜스해드리겠다.<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