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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상구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94년 초 동국대학교 기숙사 관음 411호인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새내기이던 내가 짐을 들고 그 방문을 열었을 때, 그 방안에는 곰 두마리가 나를 반겨주었다.
한마리는 이 글의 주인공인 한상구씨이고, 다른 한마리는 지금 분당병원에서 소처럼 일하는 최정락군이다.
한상구는 우연찮게도 나의 과선배이자 고등학교 1년 선배이기도 했다.(하늘같진않았지.--;;)
예과 1학년 동안 곰두마리랑 기숙사에서 뒹굴면서 참 재미나게 보낸 것 같다. 주말마다 여자기숙사를 얼쩡거리질 않나. 당시 한창 우후죽순이 되어가던 비디오방에 남자끼리 몰려가서 '나인하프 윅스'를 보질 않나. --;;;
한상구씨의 별명은 '상구라'였는데, 그의 집요한 작업 끝에 최정락군과 나는 당시 최하위 비인기 동아리였던 '전산위원회'와 '본초학회'에 전격 입단하게 된다. (우리와 절친하던 강태곤 군도 덩달아...ㅋㅋㅋ) 이 두 동아리는 우리 세명의 가입으로 겨우 생존의 기틀을 마련하여 지금은 상당할 정도로 융성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 셋이 살려냈다고 보면 된다!!캬캬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한상구씨는 모범생 그 자체였다. 교과서는 언제나 새까맣게 줄이 그어져있고(머리가 나쁜 탓도 있을 터이다..) 학점도 언제나 탑클라스를 유지했다. 술도 많이 먹지 못했고, 잘 놀 줄도 모른다. 공부하는 것과 테트리스하는 것 빼고는 할줄 아는게 별로 없다.
한상구의 특기는 전투테트리스인데, 내가 지금까지 본 바에 따르면 상구라에게 테트리스로 도전했다가 이긴 사람은 한명도 없다. 어떻게 그렇게 짜리몽땅한 손가락으로 벽돌을 순식간에 쌓아서 날리는지...
1994년 봄이었다. 한상구씨와 우리 일행은 만원씩 각출하여 보문단지로 꽃구경을 가기로 했었다. 당시 참가자는 한상구, 주대환,강태곤,최정락,김병성군이었는데 우리의 회비를 한상구씨가 모두 수납하여 출발하였다.
한창 남여상열지사에 목말라하는 스무살청년이던 우리가 부푼 기대를 안고 보문단지에 내렸을 때, 상구라가 외쳤다.
"야, 나 지갑 소매치기 당한것 같애."
정말이었다. 우리는 졸지에 알거지로 전락하여, 남녀상열지사는 고사하고, 허기에 굶주린 하이애나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들이 먹는 천원짜리 농심사발면을 침삼키며 지켜보다가, 누군가 비상금으로 꼬불쳐둔 돈을 갖고 초코파이를 사서 사람들이 고기구워먹던 현대호텔 잔디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나눠먹었다. 그때 누가 울었는지 기억은 안 난다.
결국 버스비조차 없어서 모두 걸어야만 했다. 학교까지 장장 4시간이나....
굶주린 우리는 모두 본초학회방을 급습하여 라면 10개를 작살내고 기숙사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한상구는 당시 이 사건이 미친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하지 못하는듯,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한상구씨는 남학생 중에서 졸업학점이 가장 높았으며, 2000년도에 치러진 한의사국가시험에서도 남학생중 1등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상구씨는 그해 분당병원에 군의관후보인턴으로 지원하였다. 정원은 남자 2명이었으며, 같은 반에서 총 3명이 지원하였다.
선발기준은 국시60%, 학점30%, 면접10%였으므로 한상구가 합격할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다. 90%는 먹고 들어갔으므로..
하지만 합격자 발표일에 한상구는 전화를 받지 못했고, 다른 학우 2명이 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그때 학교에 남아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던 선배들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은 분당병원에 찾아가지도 않았고, 항의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포항으로 내려가 포항시 태백한의원에 취직하여 부원장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선발과정에 대한 좋지않은 소문이 학교 내에 끊이지 않았고, 결국 2000년 어느날, 당시 병원장이던 교수가 수업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병원은 공부잘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하는 사람을 뽑는다."
한상구가 일을 못해서 뽑히지 못했다는 주장인데, 내가 보기에 상구라만큼 일 잘하고, 성실하고 말 잘듣는 모범적인 인간은 없었는데.
내가 졸업하던 해, 한상구씨는 포항시내 모호프집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귀뜸만 해줬어도 경주병원 썼을텐데..."
2001년도 3월, 군대를 연기하던 한상구는 결국 위생병 지원서를 썼고, 6월 18일에 입대하여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달에 만나서 확인해보니 이제 말년 병장이라 얼굴에 기름이 흐르고 배도 점점 불룩해지고 있더라.
94학번 이후로 사병으로 가는 한의사는 거의 없다. 기숙사에서 어울렸던 주대환,강태곤,한상구,최정락,김병성 중에 가장 공부를 잘하고 성실했던 한상구만 사병으로 끌려가고 나머지는 모두 공보의로 갔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는 기막힌 결과!
1년만 더 연기하고 개겼으면 1등으로 공보의갔을 거라는 힐난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처럼 구질구질하게 연기하고 또 연기하고 생쇼할만큼 상구는 교활하지 못했다.
전역후 상구라의 애정행각이 더욱 빛을 발하고, 개원후 대박터져서 나를 부원장으로 채용해줄 날을 손꼽아 기대해본다.
한마리는 이 글의 주인공인 한상구씨이고, 다른 한마리는 지금 분당병원에서 소처럼 일하는 최정락군이다.
한상구는 우연찮게도 나의 과선배이자 고등학교 1년 선배이기도 했다.(하늘같진않았지.--;;)
예과 1학년 동안 곰두마리랑 기숙사에서 뒹굴면서 참 재미나게 보낸 것 같다. 주말마다 여자기숙사를 얼쩡거리질 않나. 당시 한창 우후죽순이 되어가던 비디오방에 남자끼리 몰려가서 '나인하프 윅스'를 보질 않나. --;;;
한상구씨의 별명은 '상구라'였는데, 그의 집요한 작업 끝에 최정락군과 나는 당시 최하위 비인기 동아리였던 '전산위원회'와 '본초학회'에 전격 입단하게 된다. (우리와 절친하던 강태곤 군도 덩달아...ㅋㅋㅋ) 이 두 동아리는 우리 세명의 가입으로 겨우 생존의 기틀을 마련하여 지금은 상당할 정도로 융성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 셋이 살려냈다고 보면 된다!!캬캬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한상구씨는 모범생 그 자체였다. 교과서는 언제나 새까맣게 줄이 그어져있고(머리가 나쁜 탓도 있을 터이다..) 학점도 언제나 탑클라스를 유지했다. 술도 많이 먹지 못했고, 잘 놀 줄도 모른다. 공부하는 것과 테트리스하는 것 빼고는 할줄 아는게 별로 없다.
한상구의 특기는 전투테트리스인데, 내가 지금까지 본 바에 따르면 상구라에게 테트리스로 도전했다가 이긴 사람은 한명도 없다. 어떻게 그렇게 짜리몽땅한 손가락으로 벽돌을 순식간에 쌓아서 날리는지...
1994년 봄이었다. 한상구씨와 우리 일행은 만원씩 각출하여 보문단지로 꽃구경을 가기로 했었다. 당시 참가자는 한상구, 주대환,강태곤,최정락,김병성군이었는데 우리의 회비를 한상구씨가 모두 수납하여 출발하였다.
한창 남여상열지사에 목말라하는 스무살청년이던 우리가 부푼 기대를 안고 보문단지에 내렸을 때, 상구라가 외쳤다.
"야, 나 지갑 소매치기 당한것 같애."
정말이었다. 우리는 졸지에 알거지로 전락하여, 남녀상열지사는 고사하고, 허기에 굶주린 하이애나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들이 먹는 천원짜리 농심사발면을 침삼키며 지켜보다가, 누군가 비상금으로 꼬불쳐둔 돈을 갖고 초코파이를 사서 사람들이 고기구워먹던 현대호텔 잔디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나눠먹었다. 그때 누가 울었는지 기억은 안 난다.
결국 버스비조차 없어서 모두 걸어야만 했다. 학교까지 장장 4시간이나....
굶주린 우리는 모두 본초학회방을 급습하여 라면 10개를 작살내고 기숙사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한상구는 당시 이 사건이 미친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하지 못하는듯,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한상구씨는 남학생 중에서 졸업학점이 가장 높았으며, 2000년도에 치러진 한의사국가시험에서도 남학생중 1등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상구씨는 그해 분당병원에 군의관후보인턴으로 지원하였다. 정원은 남자 2명이었으며, 같은 반에서 총 3명이 지원하였다.
선발기준은 국시60%, 학점30%, 면접10%였으므로 한상구가 합격할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다. 90%는 먹고 들어갔으므로..
하지만 합격자 발표일에 한상구는 전화를 받지 못했고, 다른 학우 2명이 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그때 학교에 남아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던 선배들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은 분당병원에 찾아가지도 않았고, 항의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포항으로 내려가 포항시 태백한의원에 취직하여 부원장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선발과정에 대한 좋지않은 소문이 학교 내에 끊이지 않았고, 결국 2000년 어느날, 당시 병원장이던 교수가 수업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병원은 공부잘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하는 사람을 뽑는다."
한상구가 일을 못해서 뽑히지 못했다는 주장인데, 내가 보기에 상구라만큼 일 잘하고, 성실하고 말 잘듣는 모범적인 인간은 없었는데.
내가 졸업하던 해, 한상구씨는 포항시내 모호프집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귀뜸만 해줬어도 경주병원 썼을텐데..."
2001년도 3월, 군대를 연기하던 한상구는 결국 위생병 지원서를 썼고, 6월 18일에 입대하여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달에 만나서 확인해보니 이제 말년 병장이라 얼굴에 기름이 흐르고 배도 점점 불룩해지고 있더라.
94학번 이후로 사병으로 가는 한의사는 거의 없다. 기숙사에서 어울렸던 주대환,강태곤,한상구,최정락,김병성 중에 가장 공부를 잘하고 성실했던 한상구만 사병으로 끌려가고 나머지는 모두 공보의로 갔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는 기막힌 결과!
1년만 더 연기하고 개겼으면 1등으로 공보의갔을 거라는 힐난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처럼 구질구질하게 연기하고 또 연기하고 생쇼할만큼 상구는 교활하지 못했다.
전역후 상구라의 애정행각이 더욱 빛을 발하고, 개원후 대박터져서 나를 부원장으로 채용해줄 날을 손꼽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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