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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설 > 영화 순으로 독자가 갖는 여백, 즉 재해석의 공간이 좁아진다. 영화감독의 파워가 가장 강력한 것.

우리는 감독이 보라하는 것만 보고 들으라하는 것만 들을 수 있다.

티켓 끊고 앉는 순간 2시간 동안 우리는 귀와 눈을 감독에게 빼앗긴 포로가 된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그는 신이다.


시는 다르다. 얼마든지 독자가 알아서 재해석한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눈이 아름다운 미녀라고 써놓으면 독자들은 알아서 상상해가며 소설을 읽어나간다.


현대인에게 시는 '대중음악'이라는 형태로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같은 노래라도 누가 듣느냐에 따라 다른 스토리의 노래가 된다. 여백의 예술이다.

팝!

이 팝이 영화와 만났다. 극단과 극단의 조우.

팝을 듣다가 스토리가 끼어들고 다시 팝이 들어오고 또 스토리가 끼어들고를 2시간 내내 반복하다가.

아 음악 영화 역사상 가장 어려웠을 비빔밥을 비비기 힘들어한 감독의 고충이 느껴진다.

이 영화는 비비고 또 비비다가 마침내 라이브 에이드라는 공연에서 폭발한다.

2시간 내내 악천후 속 진흙탕을 운전하는듯한 플롯은 결국 라이브 에이드라는 클라이막스를 관람하기 위한 여정이었던 것.


뮤직은 듣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보는 것의 비중이 매우 크다. 그렇지 않다면 콘서트라는 라이브 장르가 진작 없어졌을것.

이 영화이 엔딩 크레딧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노래하는 화질 꽝인 영상이 나올 때는 관객이 한명도 나가지 않는다. 그 뒤에 유작인 노래만 나오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만큼 보는 것의 매력이 강하다. 프레디도 스스로의 직업을 퍼포머라고 정의했듯 늘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소리는 귀로도 들어오지만 몸을 통해 진동으로도 들어온다.

좋은 음질은 그냥 음원사이트에서 시디음질로 다운받아서 이어폰으로 들으면 된다.

하지만 감동을 받고싶다면 라이브 현장에서 혹은 영화관에서 퍼포먼스를 직접 보면서 귀와 함께 몸으로 진동을 느껴보는 것이 가장 좋다.


모든 직업의 쇼부는 데뷔 후 20년 내에 난다. 의사든 변호사든 가수든...
20년을 무명으로 지내다가 터지는 경우는 없다.
어떤 직업이든 20년 지나면 밧데리방전이다. 유통기한의 경과.

프레디는 데뷔 후 일찍 쇼부가 났고, 20년 뒤에는 죽고말았다. 우리에게 그의 이미지는 활력 넘치는 40대 초반의 절정의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다. 이 영화도 그렇게 끝이 난다.

모든 연예인은 대중의 입맛대로 어떤 캐릭터나 아이콘으로 소비되기 마련인데, 프레디는 끝까지 자기만의 고집으로 '소비됨'에 저항했다.

그는 대중들이 그를 '더러운 게이'의 대명사, '에이즈의 아이콘'으로 소비되도록 놔두질 않았다.

원톱에게만 가능한 경지다.


그가 공연장에서 에이호~ 에이호~하면서 관객을 조련하듯(갖고 논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대중으로부터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재능이 압도적이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을 했던 퍼포머였고, 심지어 자기 이름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ㅎㅎㅎㅎ 기존의 틀을 깨고, 자신의 재능을 극한까지 밀어부치는 예술가. (재능이 없는데 틀만 깨면 반사회적 인격장애 취급받을 뿐이다)


가수 중에 갑오브 갑.

갑이란 무엇인가 보여주는 가수.

노래를 기막히게 잘하면서 난닝구 입고 다니면 예술가지만 노래 못하는데 난닝구 입고 다니면 그냥 취객일 뿐.

일단 잘하고 봐야돼. 성적취향이고 성격이고 뭐고 간에. 아무리 친절하고 착하면 뭐하나. 노래가 안되고 연기가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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