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무엇인가

Essays 2019. 4. 1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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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은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당신은 그것만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아파트, 결혼, 취업, 진학, 한의원 매출, 자녀, 외모, 키, 탈모, 비만

포커싱 일루젼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눈 앞에 오직 그것만 보인다.

 

<>숫자의 행복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웃들이 2끼만 겨우 먹는 마을에서 3끼 먹으면 행복한 거다. 100만원 벌다가 200만원 벌면 행복하다.

특히 돈이나 물건처럼 '카운팅'이 가능한 것에는 비교의 리미트가 없다. 무제한적인 고통!

"원장님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죽고 싶어요."

"무슨 일인데요?"

"제가 이번에 땅을 잘 못 팔아서 50억 손해를 봤습니다. 공장부지였는데 30억에 팔았던 땅이 옆에 아파트 들어서면서 2년만에 80억짜리가 됐어요. 잠이 안 옵니다. 마누라가 팔지 말라고 했는데. .. 죽고싶어요."

"아, 너무 힘드시겠네요."

"제가 자산이 300억 정도 되는데 400억으로 점프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렸다 생각하니 너무 괴롭네요."

"아, 네. 근데 제가 이걸 위로해드리는 게 맞는건지, 이거 참 이거 뭐라고 말씀드려야할지"

 

천만원 벌면 2천 벌고 싶고 2천 벌면 3천이 보인다. 숫자의 마법이다.

20명 보다가 40명 보면 좋아 죽는데, 몇달 지나면 50명 보고싶고 70명, 80명 보다가 40명 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20명대로 주저앉으면 인생이 끝난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비가역적인 -즉 회복할 수 없는, 예를 들면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버리는 것- 변화이다.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비가역적인 손실이나 결핍은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다.)

 

<>행복은 공기 같은 것

우리의 삶이 하나의 방이라는 공간이라면 그 안에는 불행도 있고 행복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불행은 선명하게 인지되며 내 방(내 삶)에 들어올때도 문을 벌컥 열고(질병, 사고 등) 들어온다. 하지만 행복은 벌컥 들어오지 않으며 공기처럼 눈에 띄지도 않는다. 행복이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지만 공기처럼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럼 언제 느껴지는가? 반드시 결핍이 동반되어야 인지된다. 공기가 빠져나가고 나면 "아! 공기가 있을때가 행복했구나"라고 인지가 된다. 내가 손가락이 10개 있어도 행복하지 않다. 전혀 행복하지 않다. 재벌들도 특별히 행복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내가 손가락이 5개가 잘리고나면 "아, 내가 손가락 10겨 갖고 있을때가 행복했던거구나."라고 느껴지게 된다.

이처럼 행복은 반드시 결핍이라는 기준점이 있어야 느껴질 수 있는 감각이다. 그래서 배고파본 사람만이 풍족한 냉장고를 보며 행복감을 느낀다. 하루3끼 쌀밥 먹는 사람은 내일 쌀밥 먹는다고 행복해지지가 않는다.

 

<> 잉여의 행복은 없다.

잉여에는 행복이 없다. 하루 3끼 먹다가 6끼 먹는다고 두배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1끼 먹다가 3끼 먹으면 행복해지지. 팔이 3개 있으면 훨씬 더 편리하게 살 수 있지만 팔이 3개 됐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팔이 1개였다가 2개가 되면 행복해진다. 결핍의 충족에서 행복이 오는거지 높은 숫자에서 오는게 아니다.

인간의 관심은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뭐가 결핍되어 있는가?이지. 내가 뭘 더 가졌냐가 아니다. 예쁜 얼굴이 끝없이 성형수술을 하는 것도 결핍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순 없다. 누구나 다 결핍된 부분이 있다.

 

<> 행복은 방향에서 온다

행복은 수치나 정량적 평가에서 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백터, 방향성에서 온다.

100KG인 환자가 내원했다. 괴롭다고 한다. 자기가 원래 55KG이었다고 한다. 55에서 100으로 올라오는 그 벡터가 고통과 절망을 주는 것이다. 만약 그 환자가 원래 55KG이 아니라 130KG이었다면?

지금 100KG이라는 숫자에 대해 얼마나 행복하게 받아들였을것인가. 기분좋아 죽을 것이다.

100킬로는 의미없는 숫자다.  두명의 100킬로 뚱보라도 중요한것은 방향성이다. 점점 좋아지고 있는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가? 한쪽 뚱보는 기분좋고 다른 쪽 뚱보는 죽을맛이다.

암4기였다가 3기가 되면 너무 행복해진다. 수술만 할 수 있어도 기분 째진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 모든 것에 적용해볼 수 있다. 재력, 지능, 교양, 체력, 지혜, 건강, 여유시간, 활력, 컨디션, 인간관계.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까?

벡터는 비교를 해야 평가할 수 있다. 남들과 자신, 혹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과 비교하면서 우리는 행복과 절망감을 느낀다.

한국인들이 아파트와 고급 자동차에 열광하는 이유는 눈만 뜨면 보이는 게 아파트요 차 뿐이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기라도 하면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앞차의 엠블램과 차량등급 마크다. E400이네, S350이네. 저건 뭐냐. 새로 나온 K9이네.

서로 지지고 볶고 경쟁하지만 뉴질랜드 프란츠조셉 빙하 옆에 S600을 갖다놔봐라. 얼마나 초라해보이겠는가.

 

 

<>카운팅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행복

행복에는 '비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종류가 있다. 바로 '카운팅'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행복이 그것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리미트가 있다. 형용사이기 때문에 안정적이다.

오늘 10:0이라는 스코어는 불행해보이지만 그 숫자 깊숙한 곳에는 '카운팅할 수 없는 행복' (예를 들면 아주 어려운 케이스의 환자가 잘 치료되었다든지, 자신이 갖고 있던 이론이 증명되었다든지)이 숨어 있을 수 있다.

하루에 100명의 환자를 봐도 고질병으로 내원하는 3명의 요주의 환자가 모두 내가 원하는만큼 치료가 안 되고 있고 헤매고 있으면 컴플레인을 하면 그날 잔고는 두둑한데 퇴근길은 찝찝하고 불편하다.

 

<> 회복될 수 없는 불행

"가장 중요한 것은 죽지 않는 거에요." -세계테마기행 2018년 체코편에서 어떤 어린이가-

"가족이 건강하면 부유할 필요가 없다." -세계테마기행 2018년 이태리 북부알프스편에서 어떤 할배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짐을 내려놓고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어요.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 기리라는 수행자, 세테기 2018 인도편-

위의 두가지 큰 전제조건.

1). 내가 죽지 않는 것

2). 가족이 건강한 것

 

<>저축과 행복

그 다음 행복에 있어서 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써버리는 것은 결제와 함께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소니 A7M3를 300만원 주고 결제했다고 치자. 물건이 집에 왔다. 나의 쇼핑, 구매행위, 소비는 끝난것인가?

아니다.

결제, 그것은 소비의 시작일 뿐이다.

이제부터 본 게임이 시작된다.

그걸로 가족들 사진을 찍고 추억을 기록하고 환자 피부상태도 찍고, 친구 모임에도 들고 나가고 잘 써먹어야 소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소유는 소비의 전부가 아니다. 끝난게 아니다. 시작이다.

결국 가격도 중요한게 아니다. 아무리 싸게 사도 쳐박아두면 엄청나게 비싸게 산것과 같다. 매일 들고 다니는 에르메스 백이 몇년에 한번 드는 루이비똥보다 싼 가방이 되는 것이다.

물건을 아끼지 마라.

그냥 보관할 용도라면 차라리 여행으로 써버리는 게 더 낫다.

아직 여행같이 형체가 없는 '경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뭐를 산다면 물리적인 물건이 있어야지!

당신은 무엇을 파나? 한약을 파나? 검정물?

아니다 당신은 건강을 판다. 볼보가 자동차가 아닌 안전을 팔듯이. 아웃백이 음식이 아닌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팔듯이. 스벅은 커피를 파는 가게가 아니라, 편안한 분위기를 커피랑 같이 파는 곳이다. 정용진은 스벅이라는 브랜드와 분위기를 팔고 손님은 분위기에 돈을 지불한다.

당신이 '어떤 물건'을 얼마에 파는지가 아니라 그 물건에 깃든 '가치'가 뭔지를 알아야, 본인이 뭘 파는지를 알아차려야 비로소 비지니스가 시작된다.

결국 난 카메라를 샀지만 카메라만 산게 아닐 수도 있지. 엄청난 추억저장소를 산 것일수도 있고, 그냥 돌덩어리를 산 것일수도(카메라를 장롱에 넣어둔다면)

 

<>시간과 행복

돈 이야기를 했으니 시간 이야기도 해야 한다. 일당 80만원짜리 인간이 누군가에게 1시간의 시간을 제공했다면 그는 10만원너치의 시간을 제공한 것이다. 퀄리티가 있는 의료인에게 진찰을 오래 받으면 그만큼 돈을 받은 것과 같다.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시간은 돈이고 내 시간을 내가 쓰면 내가 돈을 쓰는 것이고 나의 시간을 남에게 제공하면 내가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력으로 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간을 돈으로 바꿔먹는 것이다. 각자의 시간의 퀄리티는 다르다. 시급이라는 훌륭한 제도가 각자의 시간의 퀄리티를 평가해주고 있다.

시간낭비. 진료를 안 하고 등산을 가면 그것은 시간낭비인가? 참으로 잘못된 단어가 이 '시간 낭비'라는 말이다. 돈벌이가 안되는 시간의 사용을 '낭비'라는 말로 규정해선 안된다. 시간은 누가 쓰든 그게 남이든 본인이든 하염없이 흘러간다. 지갑에서 동전이 일정한 속도로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 그 시간의 사용처에 대한 가치판단은 매우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지 단순히 돈으로 치환되었느냐만 따질 수 없다.

젊은 시절에는 래디칼한 것(불닭볶음폭탄 같은 것들)에 마음이 끌리지만, 나이를 점점 들어가면 밸런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뭐든 적당한 게 좋다.

 

적당한 돈벌이, 적당한 놀이, 적당한 잠, 적당한 음식, 적당한 소비, 적당한 휴가

적당함 속에서도 돋보이는 나만의 아이덴티티. 화리부동. 어려운 문제다.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은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당신은 그것만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어떤 것을 간절한 목표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의대를 입학하는 것. 아파트를 사는 것. 결혼하는 것 등등이다.

대부분 지나고나면 그것들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의 일부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 옆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행복

 

"불행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지만, 행복은 연기처럼 방을 빠져나간다."

우리가 어떤 시절을 떠올리며 '그땐 참 행복했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젊음이든 돈이든 가족이든, 무엇가의 결핍이 발생하고 나면 비로소 아 그때 그게 행복했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매일 방안의 의자에 앉지만 의자가 방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그 의자의 존재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매일 의자에 앉아서 행복하고 고맙다 느끼나? 아니다. 갑자기 의자가 없어져버리야 비로소 의자의 가치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다. 늘 곁에 있는 것을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마치 공기처럼. 늘 풍족하게 공급되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는 없다. 매일 케비어를 먹어봐라 행복해지는지.

불행은 해운대에 들이치는 파도처럼 늘 우리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불행의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끝없는 문제풀이처럼 인생은 불청객들이 들이닥친다. 불행이 다 나가고 나면, 문제가 다 해결되고 고통이 없어지면 비로소 행복해지리라 생각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행은 행복의 반대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방안에 공존하며 인간은 늙고 병들고 소득이 줄기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불행들의 행렬은 줄어들지 않는다.

 

행복은 남극과 북극처럼 극단적으로 떨어져있는 상태가 아니다. 짜장면에 섞여있는 양파와 돼지고기처럼 우리 삶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불행과 행복은 한 방안에 같이 공존하고 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이건 마치 숨을 안 쉬고 사는 사람은 없지만 공기의 존재를 느끼며 사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다.

행복의 본질을 파고들면 소박하다. 우리가 열 손가락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건 소소하다. 하루 쌀밥 3끼 먹는것도 소박하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그 빈자리는(소박함의 상실) 너무너무 커진다. 손가락이 절단되면 손가락의 가치는 너무너무 커져버린다. 우리가 불행이라는 갑자기 들이닥친 친구만 쳐다보고 온통 신경을 거기에다 쓰고있으면 어느새 행복이라는 친구가 문틈 사이로 스르륵 연기처럼 빠져나가고 만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그의 빈자리를 느끼면 아차! 그때가 행복했구나하는 각성을 하게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을 각성할 수 없다.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공기의 소중함을 절대 느낄 수가 없다. 건강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건강의 소중함을 느낄 수가 없는 것처럼.

"행복을 느낄 수는 없지만 당신은 행복하다." 이게 내 결론이다.

작은 행복과 즐거움과 기쁨이 이미 당신의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다. 다만 못 느낄 뿐이다. 인간은 다 그렇다. 큰 행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큰 불행은 존재하지만) 행복은 원래 사이즈가 작다. 커피 한잔, 재밌는 예능, 맛있는 요리, 자녀의 뽀뽀 이런 것들이 찾아보면 일상에 가득하다.

"불행은 일부러 느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팍팍 느낌오지만 행복은 의지력을 갖고 일부러 느껴보려고 해야한다."

 

제주도 여행 떠나면서 "아, 아무 사고없이 무사히 우리 가족이 돌아와야지. 그게 우리 목표야"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쨍한 날씨, 맛난 음식, 기가막힌 풍경 등등을 기대하지.

 

핸드폰을 늘 갖고 다니면 아무 감정이 안 들지만 잃어버리고 나면 아, 핸드폰 있을때가 행복했구나 싶다. 실제로 되찾으면 행복감이 폭발한다. 그러다가 어느새 계속 갖고 다니게 되면 그런 행복감은 또 연기처럼 사라진다.

의자에 앉을때 고마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3시간 서 있다가 앉으면 의자가 다르게 느껴진다.

 

<> 공기 속에서는 공기를 느낄 수 없다.

전철우가 이야기해준 것 "여러분은 자유를 몰라요. 자유 속에 있으니까."

물속에서는 물이 안 보이고 공기방울만 보이듯이 자유 속에서는 자유를 느낄 수 없다. 속박이 닥치면 그제서야 자유라는 개념이 느껴진다. 물속에 들어있으면 물이라는 개념이 느껴지지 않는다. 공기와 물을 번갈아 느껴야 비로소 물이 느껴진다. 공기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당연하지 임마. 행복 속에서는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다구. 행복이 사라지면 느껴지는거야.

 

<> 기준점이 다르다

개그맨 정은표가 아들 서울대 갔다고 인스타 올리고 동네방네 자랑하는데 이해가 안 된다. 1년에 5천명 넘게 들어가는 대학 들어간게 자랑거리가 되나????? 서울대 의대도 아니고???? 하지만 그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다. 서울대입학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정은표의 기준과 bk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한쪽에선 행복감이 폭발하는거고 다른쪽에서는 무덤덤하다.

전교 300등 하는 애가 40점 받다가 70점 받으면 집안 잔치하지만 전교 1등이 전교 5등하면 죽상이 된다.

내 친구 중에 급식나온 우유를 밥에 말아먹는 친구가 있었다. 남들은 어휴 그걸 왜 그렇게 먹냐!라고 힐난했지만 그 친구는 개의치않았다.

행복과 불행은 결국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뒷배경지를 갖다대줘야 비로소 해석이 되고 무슨 색깔인지 알 수 있다. 기준점이 있어야한다. 추워요. 더워요와 같다. 형용사일뿐이다.

집에 곤로가 있어요 --> 아무 의미 없다.

다른집은 다 냉장고가 있는데 우리집만 곤로에요 --> 불행하다

다른집은 다 아궁인데 우리집만 곤로가 있어요 --> 행복하다

 

누군가의 삶이 힘들다고 불평하는 걸 보면 나는 늘 이렇게 되묻는다. "누구랑 비교해서?" - 시드니 해리스

여기서 누구는 꼭 타인일 필요는 없다. 과거의 나도 포함된다.

결국 행복은 <바텀>을 어디로 잡느냐에 달려있다. 한의원이 잘 안될때 우울해진다. 그러다가 불이나서 쫄땅 망한 다음에 사거리에 신호대기를 받고 있는데, 저 멀리 불타버린 내 한의원이 보인다. 사거리 주변에서 갈곳을 잃고 여기 저기 병원으로 향하는 단골할매들도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작게라도 한의원을 차리게 되면 이전에 잘 안될때의 환자수에도 우울하지 않다. 나의 <바텀>이 불난상태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바닥을 찍고 올라오면(올라온다는게 중요하다. 안 올라오면 심각해진다) 사람의 시야가 넓어지고 행복을 느끼는 <바텀>의 기준이 내려간다.

만약 바텀이 내 능력보다 위에 있다면? 지옥이다. 서울법대 들어갔는데 나의 <바텀>을 연수원 수석에 중앙지법 판사로 잡는다면 불행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 인생의 <바텀>은 언제 어떤 시절이었는지 돌아보라. 행복은 거기서 출발한다.

 

 

 

불행의 반대편에 행복이 있는게 아니다.

이 불행이 끝나면 행복이 찾아오는 게 아니다. 그런 기대를 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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