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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약탕기에는 몇첩을 넣고 달였을까>

위 사진은 대구약령시 박물관에 놓여있는 구한말 약장과 약탕기들이다.

약장의 사이즈는 1리터 남짓한데 3가지 약재를 수납하기도 한다. 서랍에는 관련되는 약재들이 서로 조합되어이 있다. 적작약과 백작약, 황련+황백+황금, 창출과 백출 등등 이런식으로.

휴대용 약장도 아닌데 현대식 약장과 비교하면 사이즈가 너무 작아보인다.

약탕기도 마찬가지다. 3리터 정도 되는 냄비들이다. 냉장고가 없었으므로 약탕기에는 1첩 분량만 넣어서 달였을 것이다. (참고로 이 박물관에는 주막에 쓰던 대접도 전시되어 있다. 현대의 대접에 비해 용량은 2배 정도 된다.) 이 약탕기로 달이면 한 대접 분량밖에 안 나온다.

 

1934년 동아일보 연재소설 삽화에 나오는 탕약대접의 모습이다. 보기만 해도 배불러올 것 같은 사이즈다. 이 대접 크기와 위의 약탕기 사이즈를 비교해보라. 위의 약탕기들은 모두 1첩을 달이는 용도임을 알 수 있다.

 

<약재는 얼마나 비쌌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인삼수출 기록 내용에서 기재된 같은 가격의 당시 쌀의 분량을 현대의 쌀가격으로 환산해보면 인삼 300g이 당시에 (현재 물가기준으로) 70만원 내외에 해당한다. 인삼 40g이면 인삼값만 10만원 정도 나오게 된다. 이거 손 떨려서 쓰겠나. 실록에 보면 인삼은 임금님 하사품 목록에 들어가 있다.

 

<당시 1첩에 들어가는 약재의 양은 얼마였을까?>

동의보감 집례에 보면 첩당 10돈이 적당하다고 나와있다. 5돈은 너무 적다고도 나와있다. 왜 5돈이 적다고 써놨을까? 당연히 5돈 정도로 처방하는 애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비판이 나온 것이다. 5돈이면 20g이다. 참고로 동의보감 처방에서 군신좌사를 세팅할때 기준이 되는 약재는 신약이 되고 기준은 4g이다.

신형문의 단방투약법에 보면 한가지 약재로 투약할 수 있는 맥시멈의 기준을 5돈(20g)으로 설정해두었다. 실제로 정조가 인삼 5돈을 달여서 미음과 같이 갖고오라는 내용이 있다.

의서 중에 용량을 안 적어둔 의서도 있는데 동의보가에는 용량이 꼭 기재되어 있다. (참고로 상한론의 경우 통샤오린의 논문을 토대로 1냥을 15.6g으로 보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

 

 

 

<하루에 2첩 먹는게 맞을까>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 4월 15일 임오 6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약방 도제조 김명원과 제조 유근, 부제조 윤돈이 아뢰기를,

"신들은 의관들을 통하여 성후(聖候)에 감기의 증세가 있음을 삼가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인하여 상의하니, 인삼청폐산(人蔘淸肺散)에다 방풍(防風) 1돈, 백출(白朮) 5푼을 가미(加味)하고, 반하(半夏)를 배로 넣어 5첩을 진어(進御)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선조 34년 4월 16일 계미 2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약방 도제조 김명원과 제조 유근, 부제조 윤돈이 아뢰기를,

"어제 약을 지어 들였는데, 삼가 진어(進御)하신 후의 성후(聖候)가 어떻하신지 알지 못하여 감히 와서 문안드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평안하다. 약은 어제 1첩 복용하였는데 감기 증세는 점점 차도가 있다. 문안하지 말라."

 

선조도 15일에 1첩 먹었다고 한다.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 4월 18일 을유 4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신들이 의관을 통해서 성후(聖候)의 감기 증세가 아직도 쾌차하지 않다는 말을 삼가 전해 듣고, 의관들과 상의해 보니 ‘당초 성후는 담열(痰熱)이 있어서 폐를 맑게 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였기 때문에 인삼청폐산(人蔘淸肺散)을 올렸던 것이다. 이제 3첩을 드시고 담열은 내린 듯하나 원기가 부실하니 우선 청폐산을 중지하고 다시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에다 방풍(防風)·반하(半夏) 각 1돈과 백복령(白茯苓) 7푼, 백지(白芷)·행인(杏仁) 각 5푼, 계지(桂枝) 3푼을 가미하고, 원처방의 황기(黃芪)·승마(升麻)·시호(柴胡)를 모두 꿀에 볶아서 5첩을 진어(進御)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결론은 4월 15일에 선조가 감기에 걸려서 5첩을 처방했고 15,16,17일에 총 3첩을 먹고난 뒤에 18일이 되어 아뢰기를 증상이 모두 사라져서 보중익기탕 5첩으로 처방을 다시 내렸다는 내용이다.

의관들이 하루 1첩 분량으로 처방한 것이 명백하다.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 6월 27일

시수가 여러 의관과 함께 탕약을 의논해 정한 뒤에 가감팔물탕(加減八物湯) 방문을 가지고 읽어드리자, 상이 명길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두 번을 복용해야 할 것이니 인삼 두 돈을 한 돈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루에 2번 복용해야하는 것이 스탠다드가 아니므로 정조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때는 정조가 몹시 아플 때다. 특별히 두번 복용할테니까 용량은 절반으로 줄이라는 내용이다.

 

 

영조실록 94권, 영조 35년 8월 4일 辛巳 2번째기사 1759년 청 건륭(乾隆) 24년

임금의 환후가 편치 못하자 도승지는 동벽(東壁)에 입직(入直)하고, 두 수의(首醫)는 내국(內局)에 입직하였으며, 오적산(五積散)을 달여 들였다.

 

영조실록 94권, 영조 35년 8월 5일 壬午 1번째기사 1759년 청 건륭(乾隆) 24년

오적산 두 첩을 다시 달여 들였다.

 

위의 내용을 보면 영조가 아파서 8월 4일 오적산을 먹는다. (실록은 보통 하루에 일어난 사건을 시간순서대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적산 두첩을 달여서 먹었다고 첩수를 명시해서 나온다. 전날 먹은 오적산의 첩수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필시 1첩을 의미한다. 1첩 먹어보고 잘 안 나아서 이튿날 2첩을 달여먹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스탠다드한 상황이 아님을 즉, 하루에 2첩을 먹는 것이 '특이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오적산을 이틀동안 3첩을 먹고난 이후에 그 뒤로는 오적산을 먹지 않았다. 한약이 이렇게 짧게 치고 빠지는 약이었단 말인가!!!

 

 

결론 :

조선왕조실록에는 하루에 1첩을 먹는다는 내용이 여러군데에서 나온다. 하루에 약을 2번 먹는 것은 '특이한 상황'으로 표현된다. 병세가 위중하거나 차도가 없거나...

1970년대에 이르면 비로소 신문기사나 연재소설 등에서 하루에 2첩을 먹고 아침에 한첩, 점심에 한첩, 저녁에는 재탕해서 한첩 총 3번에 나눠서 먹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하루 2첩을 먹는 습관이 채 50년도 되지 않은 것 아닐까?

더군다나 냉장고, 대형약탕기, 레토르트 파우치가 나타나면서 1가지 처방을 10일분, 15일분씩 달여서 하루 2,3회 복용토록하는 현대식(?) 첩약투약패턴에 대해 엄밀한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본인 결론 : 한약은 하루에 1첩 분량을 달여 1회 복용하는 것이 맞고 복용기간은 1처방당 최대 5일을 넘기지 않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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