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울릉도 개척민(1880년경 처음 이주함)의 4세대이다.
김씨의 친가는 울릉도 남쪽에 정착했고, 김씨의 외가쪽 증조부모는 북쪽에 정착했다.
처음 울릉도로 들어온 외증조부모는 오로지 식량을 구하는 일, 그 중에서도 나물이 잘 나는 곳을 찾아 정착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그들의 첫 정착지는 위 지도에서 A라고 표기된 백운동 만디다. 그리고 점점 해안가로 개척해서 내려온다. 증조모의 증언에 따르면 해안으로 내려올수록 농사가 더 잘되더란다.
두번째는 대바우(죽암)에 정착했다가 나리분지로 갔다가 다시 현포 신포구에 정착했다가 큰딸 따라서 송곳산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다. 주로 현포부터 천부사이에서(지도에서 녹색 원)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친가쪽 증조부모는 지도 아래 사동(자주색 동그라미)에 정착했다.
2세대가 지나가고 도동항(지도상의 푸른별) 쪽에 학교, 관공서, 인구가 밀집하게 된다. (개척할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다.) 도동이 메트로폴리탄이 될수록 북면에 정착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점점 더 불리하게 됐다.
도동에서 천부(북면의 거점 도시로 저동이 뜨기전까지 울릉도 제2의 시티)까지 배를 타고 가면 1시간 이상 걸리고 걸어서 간다면 도동-저동-내수전-정미향꼴짝(사람이름이 지명인 경우가 울릉도에 많다. 정미향씨가 살던 골짜기라는 뜻)-백운동만디-대바우-천부까지 약 16km를(지도의 보라색 라인) 도보로 걸어야한다. 총 4시간 소요. 통학이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다. 그래서 경제적 여유가 되는 집 자식들만 도동에 따로 자취방을 얻어서 수산고등학교를 다녔다.
반면 울릉도의 남쪽 사동에서는 도동까지 4km이므로 걸어서 1시간이므로 충분히 도보로 통학이 가능하다. 더구나 도동에는 공무원, 상인들이 집단거주하고 있어서 사동에서 농사지은 농산물을 내다팔 수도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남면 사람들이 더욱 풍족해졌다. 가을이 되면 김씨의 친할머니는 콩을 갈아서 바닷물로 간수삼아 두부를 만들어서 다라이에 이고 도동까지 가서 내다팔았다. 반면 북면에서 농사지은 것들은 도동까지 가져와서 팔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면에 사는 어린이들은 점점 학교와 멀어지게 되고, 여자 아이들은 중학교도 거의 안 갔고, 남자 아이들은 중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바로 오징어배를 탔다. 반면 울릉도 남쪽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교육열은 높아갔다.
개척 1세대로부터 140여년이 지나고 도동항, 저동항에 이은 3세대 메인 항구가 남쪽 사동항으로 결정되었다.(북쪽 현포항이 아니라) 그리고 공항까지 사동에 들어서게 된다. 사동 땅값이 가장 비싸게 됐고, 그 덕은 140년 전에 우연히 사동에 정착한 개척민들의 후손들이 누렸다. 현포에 평당 100만원 할 때 사동에 평당 500만원이 넘는다.
울릉도 출신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자면 윤부근 삼성전자 전 사장님이다.
그의 부친은 저동에서 약국을 운영했다. 윤부근 학생은 1970년대에 대구 대륜고로 유학을 갔고 다시 한양대 공대를 거쳐 삼성전자에 들어가서 사장까지 올랐다.
북면 출신이면 그런 루트를 탈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