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존중의 시대

Essays 2022. 10. 1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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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불행은 주식과 매커니즘이 같다.

85세 할머니가 내원했다.

"내가 요새 애를 많이 써가 죽겠시요. 우리 며늘아가 오십여덟인데 대장암말기로 지금 2년째 투병중인데 내가 막 잠도 안 오고 죽겠소."

내 친구는 마흔두살에 대장암으로 죽었는데 58살까지 잘 살다가 암에 걸렸다구요? 그럼 내 친구보다 16년이나 더 산 거잖아. 내 친구가 58살까지 살고 난 뒤에 대장암에 걸리는 삶이었다면 그 가족 모두 깨춤을 췄을 거에요. 와, 58살까지 살았다구요?

 

주식시장에서 인간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현재 주가가 아니라 나의 매수가격이다. 즉, 본전.

내가 카카오페이를 10만원에 샀는데 50만원까지 올랐다가 40만원까지 내려오면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다. 하지만 15만원에서 5만원까지 내려가면(같은 -10만원의 변화인데도 불구하고) 고통이 극에 달한다. 나의 본전가격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감정의 라인. 인간이 감정을 느낄때는 누구나 이런 <자신만의 기준이 되는 라인>이 있다. 위의 할머니는 아마 며느리가 가졌어야할 삶의 라인을 80세 정도로 잡았기 때문에 58세의(-22년) 대장암은 매우 고통스러운 이벤트가 되고 감정을 용솟음치게 한다. 인간의 감정은 절대 <기준선>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감정의 기준선>은 스케일이 작고 근거가 희박하며 뜬금없고 주관적이며 삶에 도움도 되지 않는 부산물에 가까운 망상의 라인이다.

인간의 감정 스케일은 작다. 그래서 재산이 10조 있는 재벌회장이, 서울대 법대 나온 잘생긴 청년이 절망감에 자살하는 경우가 생긴다.  인간은 누구나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현재를 바텀으로 잡고 짧은 스케일로 보는 버릇이 있다. 개원해서 하루 10명 보다가 몇년 뒤에 하루 50명 보게 되면 너무너무 기쁘지만, 그게 몇년간 지속되면 어느새 50이라는 숫자가 바텀이 된다. 어느날 30명 보게 되면 짜증이 폭발한다.반대의 경우도 있다. 교도소에 수감되는 시간이 길어지면 하루만이라도 자유의 시간을 주면 큰 행복을 느끼게 된다. 수인상태가 나의 감정의 바텀, 즉 기준선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 감정의 바텀, 기준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장의 사진을 첨부한다. 실제로 내 친구 중에 대전친구가 한명 있는데 그 친구는 티비를 돌리다가 한화가 이기는 장면을 발견하면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스케일을 짧게 보면 일희일비하게 된다. 삼성전자가 2만원하다가 만9천원으로 5%하락하면 분봉에서는 엄청난 변화이지만 500원부터 9만원까지 상승했던 월봉으로 놓고 보면 보이지도 않는 미미한 변화일  뿐이다. 인간의 감정은 월단위 변화보다 분단위 변화에 쉽게 요동친다.

분단위가 뭐야? 감정은 순간적으로도 반응한다. 분식집에 가서 서빙하는 직원이 내려놓는 그릇의 데시벨에 따라서 인간의 감정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몇 데시벨로(탁, 쿵, 쾅)  그릇을 내려놓느냐에 따라 그 <기준선>을 오바하면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고 직원에게 화가 난다. 클락숀을 울리는 테크닉도 살짝 누르냐 빵~~ 누르냐에 따라 감정이 반응한다. 심지어 날씨가 흐리면 기분이 나빠진다. 기온이 내려가도 나빠지고 올라가도 나빠진다. 26도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3도만 올라도 짜증이 용솟음친다. 인간의 감정선이란 얼마나 의미없이 미묘하게 작동하는가. 거기다가 기준은 늘 변한다. 겨울에 계속 영하였다가 어느날 5도만 올라가도 기분이 좋아진다. 인간 감정의 기준선은 상대적이다. 아주 지랄맞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비오면 기분 좋아서 춤추고 갑자기 토라지는) 미친년들이다.

우리는 감정존중의 시대를 살고 있다. 티비만 켜면 "여러분의 감정은 옳아요. 당신의 감정을 존중합니다. 화낼때는 화내세요. 슬플 땐 우세요. 당신의 감정은 소중합니다. 당신의 감정은 옳습니다."라는 식의 상담이 판을 치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러 큰 비용을 지불한다. 행복이라는 <감정>을 좇아 먼 길을 떠나라고 조언한다.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세요. 그걸 찾으세요. 행복해지십시요!!! 행복합시다!!!"라는 식으로 행복팔이 강사들이 인기가 많다.

동의보감에는 칠정이라는 파트 자체가 없다. 나의 일부분으로 인정해주지도 존중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분리수거해야할, 질병만 일으키는 쓰레기취급이다. 심지어 행복하고 기쁜 것도 허깨비 취급이다.

 

가장 어리석은 인간은 <감정>에게 나의 신체의 통제력을 내어주는 경우이다. "지난 밤 술자리에서 친구와의 다툼 끝에 감자탕을 머리에 들이부어 3도 화상을 입힌 50대 남성이 체포되었습니다..." 감정이 파도처럼 일어나면 몸의 주인이 되고 지 맘대로 휘두르다가 그 순간이 지나면 감정은 유령처럼 유유히 빠져나가고 몸뚱아리는 감정이 저질러놓은 뒷처리를 해야한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내 몸의 운전대를 내어주다니.!!

인간의 감정은 존중받아야할 나의 일부분이냐? 내다버려야할 쓰레기냐?

 

선생님!!! 그런데 좋은 가정도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라든지 즐겁고 행복한 감정이라든지

물론 있죠. 언제 행복하고 즐거울까요? 자신이 갖고 있는 <기준값> 이상의 현실을 만났을때 인간은 행복해집니다. 우리나라 축구팀이 마다가스카르 대표팀과 경기하면 우린 모두 5-0 이상으로 우리가 이긴다는 기준값을 갖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6-0으로 이겼어요! 기쁜가요? 아니, 그냥 무덤덤하지. 아, 이겼구나.

그런데! 우리가 0-4로 질 것 같은 <기준값>을 브라질을 만났어요. 경기를 했더니 2-1로 우리가 이겼어요. 어떤가요? 난리가 나죠. 기뻐서 눈물이 납니다. 그 기쁨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나요? <기준값>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에서 옵니다.

누구나 자기 머리속에 기준값을 갖고 있어요. 소개팅에 나가서 엄청 예쁜 여자를 보면 즐겁고 기쁘죠. 왜냐면 자신이 맘속에 갖고 나갔던 <기준치>를 훨씬 뛰어넘었으니까. 그래서 마침내 그 여자와 연애하고 알콩달콩 사귀다가 결혼하고 나면 서서히 첫만났을때의 기쁨과 즐거움이 더이상 느껴지지 않죠? 왜 감정이 사라진걸까요? 스스로 갖고 있는 <기준값>이 올라온 겁니다.

기쁨은 좋다! 슬픔은 나쁘다! 이런 개념이 아니에요. 감정이라는게 발생하는 기전을 우리가 더 유심히 들여다봐야 그 감정에게 나의 <육체>의 통제권을 지킬 수 있어요. 엄청 예쁜 여자를 만나서 눈이 뒤집혀서 엄마! 난 이 여자를 위해서 죽을래요. 이러면 안된다는 거.

감정은 절대 존중받아야할 소중한 존재가 아니다!<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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