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사님 저는 수원에 사는 제리입니다. 고3인데 성균관대에 들어가기 위해 하루에 14시간씩 공부했습니다. 잠은 6시간 정도 잤고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이번에 수능을 망쳤습니다. 평소보다 2-3등급 떨어져서 수시에도 전부 떨어졌고요, 내년에 다시 이렇게 열심히 한다해도 또 같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 재수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안 좋은 경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안녕 제리. 상심이 크겠군요. 우선 본인에게 다가와서 '수능 망친거 그거 아무 것도 아니야. 앞으로 더 무궁무진한 우주가 펼쳐진다'라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사람을 조심하세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정말 흠이 아닌 일에는 '응, 그거 흠이 아니야'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위로하는 말이 생기는 거에요.
우선 본인이 하루 14시간씩 했다고 했죠? 저는 고등학교 다닐때 하루 16시간 이상 공부했어요. 2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났어요. 제가 제리보다 2시간 덜 잤죠? 하루에 2시간씩 더 했으니까 1년에 700시간이고 3년이면 2100시간을 더 공부했네요. 숫자에는 항상 더 높은 숫자가 있어요. 그래서 14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는 건 본인 착각이에요. 그건 본인 기준이 낮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일 뿐이에요. 그런데 공부시간에 대해서 한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환자가 왔어요. 그리고 한약 처방전이 나와야해요. 어떤 환자의 경우는 문진하는 과정에 이미 머릿속에 처방이 선명하게 그려져요. 그 환자가 나가면 바로 처방전을 긁기 시작해요. 10초면 끝이죠. 자, 두번째 케이스. 환자가 나갔는데 2시간을 생각해도 처방전이 안 나와요. 책도 찾아보고 선배들한테 전화도 돌려보고 단톡방에도 이야기해보고 그런 경우 오래 고민한다고 좋은 처방이 나올까요? 투입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좋은 처방이 나올까요?
내가 파스타를 10분만에 만들었어요. 근데 내 친구는 파스타 만드는데 2시간 걸렸대요. 누구 파스타가 더 맛있을까요?
자, 어떤 수학문제를 푸는데 누구는 1분만에 풀고 누구는 10분만에 풀었어요. 그럼 10분을 투자한 학생이 더 열심히 공부한 거에요? 공부하는데 시간이 중요한 것 같아요? 중요하긴하죠. 하지만 공부는 투입한 시간보다 결과물이 훨씬 더 중요한 분야에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본인 마음 속에 '열심히 했다'라는 마음부터 버려야해요. 앞으로의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안되는 마인드에요. 열심히가 어딨어요? 그냥 학생이 공부하면 그게 당연한거지. 뭐 대단한 일 했다고 생각하지말아요. 아빠가 나가서 돈 버는게 당연한 거죠. 아빠가 월급날마다 들어와서 가족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아느냐고 일장연설한다고 생각해봐요. 피곤한 인생이에요. 학생은 벼슬이 아니에요. 14시간 많이 한 것도 아니에요. 정작 시간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재수하는 것도 뭐 대단한 일 하는게 아니에요. 앞으로 인생에서 다가올 일에 비하면 고통스러운 일도 아니고.
목표로한 성대 아니면 대학 가기 싫고, 본인 실력에 맞춰서 대학가기는 싫고 그런 마음인거죠? 그냥 고졸로 살겠다는 거죠? 물론 고졸로 살아도 돼요. 그런데 한국사회는 인간이 넘치는 사회이고 내가 누군가로부터 선택되어져야하는 입장 (취직해서 일을 해야하는 처지)이라면 그런 순간마다 내가 왜 고졸이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해요. 굉장히 귀찮은 일이에요. 심지어 소개팅에 나가서도 내가 왜 고졸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할 거에요. 대학을 가더라도 중퇴를 하면 면접담당자가 맨 먼저 물어보는게 "왜 중퇴했어요?"를 물어봐요. 졸업한 사람에게는 "왜 졸업했어요?"라고 안 물어보죠. 그 이유를 잘 생각해보세요.
근데 내가 편의점 알바같은 거나 하거나 시집가서 애나 키우며 살겠다고 하면 고졸로 사는 것도 전혀 불편함이 없어요.내 얼굴이 손예진이다. 그런 경우에도 아무도 고졸이냐 대졸이냐를 안 물어봐요. 내 목소리가 아이유다. 그러면 아무도 안 물어봐요. 본인이 그런 수준이면 돼요. 그런데 지금 고민상담하는 이유가 본인도 '고졸로 살아가기'가 좀 껄쩍찌근하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요. 사람은 원래 당연한 건 안 물어보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바보라서 대학을 가는 게 아니에요. 운전면허 없이도 사는데 치명적인 문제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운전면허를 따는 게 아니에요.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물론 지금 "수능 망쳐도 인생 끝난 거 아니고. 대학 안 가도 사람 사는데 아무 지장없고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14시간을 공부했다고?? 맙소사 언빌리버블하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니. 정말 놀랍구나. 그런데도 결과가 안 좋다니 정말 너무 안타깝다. 성대 간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너는 정말 대단한 아이이고, 보석같은 너의 인생은 비록 수능으로 인해 잠깐 쉬어갈지 몰라도 앞으로는 찬란한 우주가 펼쳐질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지 모르지만 그런 달콤한 콜라 같은 말로 제리의 인생을 망가지게 할 순 없어요.
좋은대학 가라는 말이 아니에요. 명문대 가면 좋죠. 그런데 지능, 체력, 재력, 가정환경 등등 조건이 다른데 모든 사람이 다 좋은 대학을 갈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자기 수준에서 자기가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의 한도 안에서 꾸준함을 보여준 사람은 사회에서 환영받으며 출발은 별 볼일 없을 지라도 10년-20년 지나면 반드시 풍성한 보답이 온다는 걸 믿어요.
내가 지금 재수를 하는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될지, 그냥 고졸로 사는게 나을지 잘 생각해보시고 현명한 선택하기 바랍니다.<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