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 능력에 따라 일하고, 소출은 능력에 따라 가져간다.
공산주의 : 능력에 따라 일하되, 소출은 수요에 따라 가져간다.
즉 일하는 모티브와 분배의 모티브가 다른 것이 공산주의다.
인간은 모두 능력이 다르다. 하지만 수요는(좋은 집, 멋진 옷, 맛있는 음식을 바라는 욕망은) 대부분 비슷하다.
어떤 집에서 일하는 능력은 아빠100, 와이프는 50, 자녀는 0이라고 하면 아빠와 엄마가 나가서 150을 벌어온다.
그런데 3명의 수요는 거의 동일하므로 각자 먹고 싸고 자고 입고 하는데 들어가는 돈은 비슷하다. 50씩 나눠가진다.
그러면 아빠는 100을 벌어와서 50을 쓰고, 자녀는 0을 벌어와서 50을 쓴다.
그럼에도 아빠는 이 상황을 받아들인다. 가족이고 사랑하니까. 사랑은 곧 내 신체의 연장이다. 내 자녀가 굶으면 내가 고통을 느낀다. 나는 유니클로 입어도 우리 아들은 몽클레어 입히고 싶다. 그래서 수요에 따라 불합리하게 분배하는 것은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작동한다.
황교익이 말한다.
'월 250받는 최저시급 노동자도 한달에 한번쯤은 나비넥타이 메고 파인다이닝가서 1인당 20만원짜리 식사를 하는 사회를 만들자'
아름다운 사회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그 파인다이닝 식사값을 내야 한다. 황교익이 낼건가? 이게 작동하려면 우리사회 모두가(정확히 말하면 능력 높은 자들이) 그 (능력이 낮은) 노동자를 자식처럼 사랑해야 작동한다.
정작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소한 것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진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이 없는 자는 귀에 착 감기는 달콤한 말을 해서 인기를 얻지만 얼마가지 못해 실체가 드러나고 스스로 무너진다. 내로남불
지방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방살려야합니다 하면서 자신은 강남에 아파트 사는 국회의원처럼.
서울대 일극주의 문제 많습니다. 다양한 대학이 골고루 발전하는 사회 만듭시다 하면서 본인은 서울대병원만 가는 정치인.
공자님이 말씀한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과 본성을 숨기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교언영색에 대한 경계심을 말하는 것.
내 동생과 나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성취가 다르다. 내 대학 동기들도 거의 비슷한 출발선에서 개업했지만 지금 소출량에서 보면 아반떼 타는 놈에서 벤틀리 타는 놈까지 다양한 격차가 벌어져 있다. 이런건 개개인의 노력의 차이로 인한 것이 맞다.
그럼 능력에 따라 배분하는게 맞는 거 같은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할 점이 있다. 바로 능력이라는 것이 과연 뭘까?능력은 본인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내 친구 범수가 있다. 나랑 한 동네에서 자라서 나는 범수를 잘 안다.
우리아버지가 수협 다닐때 범수 아버지는 항구에서 하역노가다로 일했다. 일감이 들쭉날쭉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범수가 4살 때 이혼했다. 범수엄마는 떠나고 범수와 범수아버지는 남았다. 여인숙과 고시원을 전전하다가 범수 아버지도 돈 벌기 위해 떠나고 범수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8살때부터 고아원에 들어간 범수는 형아들한테 맨날 얻어맞고 돈 뺏기고 기합받고 부실한 식사에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자랐다.
반대로 나는 엄마가 200을 벌어와서 우리가족들과 다 나눴다. 우리 엄마는 강력한 공산주의자다. 자기가 벌어온 걸 아낌없이 베풀었다. 200을 벌어서 본인은 20도 안 썼다. 엄마 일하는 곳에 얼씬도 하지마라. 알바할 시간에 공부나 해라. 밥먹고 책사는데 돈을 아끼지 마라. 강력한 공산주의자 엄마 밑에서 나는 포항고에 진학했고 범수는 같은 해에 수고에 진학했다.
내가 한의대에 입학한 해에 범수는 고아원을 나왔다. 나라에서 자립금이라고 100만원을 받고 고아원동기들과 원룸을 얻어 8명이 같이 잤다. 내가 엄마한테 용돈받으며 도서관에서 조직학, 본초학 공부할 때 범수는 낮에는 중국집 배달을 하고 밤에는 노래방 삐끼를 했다.
3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범수와 나는 능력에서 10배 정도 차이가 나는 상태에 이르렀다.
범수에게 닥친 가장 큰 불운은 엄마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범수처럼 운이 나빠서 능력이 떨어지는 친구를 위해 능력자들이 도와줘야할까? 그 대답을 하려면 '너는 범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범수를 잘 안다. 범수를 만나면 밥부터 커피까지 내가 다 산다. 어슴프레한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의 오로라가 범수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내가 밥사는 것에 대해 불합리하거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범수를 전혀 모르는 내 고등학교 친구 송호가 범수에게 밥을 살까? 안 사지.
친구사이를 떠나 국가 차원까지 스케일이 커진다면 나는 그 이름모를 (내 친구 범수처럼)'불운한 누군가'를 위해서 기꺼이 내가 내 능력껏 걷은 소출을 나눠줄 '사랑의 용의'가 있을까?
만약 인간의 마음에 부처나 공자처럼 그런 게 존재한다면 공산주의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복음 마태복음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넘치는 것도 그게 그만큼 어려운 미션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멀리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느냐가 자본주의 공산주의의 승패를 가른 것이다.<b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