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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구리시 돌다리인지 굴다리인지 무슨 시장통 앞의 던킨도너츠.

구영형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근데 동의보감에 각 문을 보면 단락마다 처방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구분해서 써야합니까?"

구영형님은 이렇게 말했다.

"니 군대가면 그냥 동의보감 10번 읽고 다시 온나."

그로부터 22년이 지났다.

이제 이 질문에 자답을 해보려한다.

허준. 허준은 어떤 사람인가? 무서운 할아버지다. 내가 공부가 짧았을 때는 동의보감의 작은 소제목만 허준이 정하고 내용은 전부 인용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원출처와 동의보감을 놓고 같이 보다보니 이 할배가 실제로는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무서우면서도 자상하고 쿨하면서도 꼼꼼하고.

기존 의서에서 애매하거나 헷갈리게 돼 있는 부분은 단호하게 기준을 정해서 새로 '정의'를 내린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분류를 스스로 제시하기도 한다.

처방들도 중구난방으로 대충 복붙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룰이 있다. 앞부분에 나오는 처방은 가장 베이스가 되는 이론적인 처방 즉 무난하고 적응증이 넓은 산탄총 같은 처방이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적응증이 날카롭고 저격총 같은 쓰기 어려운 처방들이 나온다. 가장 뒤편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최소한의 약재(야채나 과일 등 포함)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처방들을 수록해두었다. 그래서 가장 쓸만한 좋은 처방은 한가운데 나온다!

수많은 처방에서 특정 처방을 픽해야할 때 허준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구분포인트를 앞쪽으로 당겨서 수록해놨다. 허준이 처방을 수록할때는 큰 카테고리를 먼저 제시하고 그 다음에 바로 해당처방의 가장 중요한 선방포인트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오요탕 처방을 보면 풍수 뒷부분에 나오는데

治感風寒咳嗽, 聲重咽痛 이렇게 나온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면.

"이 처방이 속한 카테고리는 풍한해수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감별포인트는 聲重咽痛이야."

A처방, 治OOOO, XXXXX

이런식으로 돼 있으면 治 다음에 나오는 OOOO는 허준이 "야, 너네들 이 정도는 확실하게 처방을 카테고리화하고 있어야지. 이건 무조건 외워놔라. 이 처방은 OOOO치료하는 처방이야! 알겠니?" 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요약문이고. 그 뒷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XXXXX 부분이다. 이 부분을 허투루 보면 안된다. XXXXX가 선방의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소실되었을 경우 <투약의 중지>를 알리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동의보감 모든 처방을 한제 10일 단위로 투약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한의학 서적을 보다보면 OOOO이라는 부분이 애매한 개념인 경우가 많다. 심신불교, 비위불화 이런게 도대체 무슨 증상을 말하는거야????

"할아버지 근데 풍한해수가 뭐에요?"

허준이 친절하게도 오요탕 治 풍한해수에서 풍한해수가 뭔지에 모르는 바보들을 위해서 그 처방이 나온 챕터 앞부분에 정의를 내려놨다. 코막히고 목소리무겁고 입마르고 목구멍 간질간질하고 말하면 기침이 나온다....깔끔하다. 딱 떨어진다. 허준은 어중간한게 없다. 두부를 칼로 잘라놓듯이 카테고리를 확실하게 분류한다. 그런데 어??? 풍한해수에 해당되는 증상이 너댓개로 많네??! 오케이. 환자가 왔는데 풍한해수 같아. 풍한해수 같은데 증상이 너무 많아요 다 그게 그거같아요. 여기서 어떤 처방을 써야하느냐!! 에 대해서 허준이 聲重咽痛이 가장 중요한 감별포인트니까 성중인통이면 오요탕 써라!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주는 거다. 잊지마. 카테고리 다음에 나오는 첫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처방에 다 이런 <핵심 감별포인트>가 선별되어 있다. 평위산, 이공산 찾아봐라. 뭐가 나오는지 不思飮食이 나온다. 불사음식! 그게 포인트라고 허준이 알려주는 거라고! 배고프다고 하는 놈한테 평위산 주면 되냐 안 되냐?

자, 이 오요탕의 원출처는 단계심법이다. 단계심법에서 오요탕을 찾아보면 허준이 제시한 포인트인 聲重咽痛이 나올까? 안 나온다. 허준이 자기 맘대로 집어넣은 문장이다.

허준은 이렇게 자기 기준대로 기존 출처의 내용에 첨삭을 엄청나게 많이 해놨다. 기존 의서들을 복붙해서 편집한 게 아니라. 전부 정리하고 쓸데없는 건 지우고 중요한 건 자기가 추가해서 첨삭해서 당시 기준으로 재해석 해놓은 책이다. 자신이 직접 의론을 써넣은 부분에는 문장 뒷부분에 출처표기가 없다. 동의보감에서 그런 문장을 발견하면 매우 중요한 조문이 된다. 오요탕처럼 중요한 감별증상을 직접 써넣기도하고, 원출처에 담겨있던 쓸데없는 증상들은 전부 다 삭제해버리고 중요한 감별증상 몇개만 추려서 인용하기도 하고, 약재도 특정 약재의 용량을 더블로 올려서 군약으로 올리기도하고, 쓸데없는 수치들은 무시하기도 하고, 새로운 약재를 추가하기도 하고 산제를 탕제로 환산하여 계산하기 쉽게 만들어두기도 했다. 원출전의 많은 처방들을 모두 삭제하고 중요한 처방 몇개만 남기기도 했다.

동의보감의 거의 모든 조문, 모든 처방에 허준의 첨삭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환자가 오면 카테고리를 잘 픽할 줄 알아야한다. 비염환자가 오면 이 환자의 카테고리를 어디로 정할지 결정해야한다. 비문, 해수문, 폐문, 허로문, 풍문? 왜 그런줄 아나? 동의보감에는 '비염'이라는 챕터가 없거든. 그래서 동의보감에 기재된 모든 카테고리의 내용을 암기하고 있어야한다.

 

결국 맨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동의보감을 10번 읽어라."

이 말은 진짜 10번 읽으라는 뜻이 아니다. 최소한 어디에 뭐가 어디 있는지 카테고리를 외워두라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외워야하느냐? 내 앞에 환자가 오면 진찰함과 동시에 동의보감을 딱 펴서 그 환자가 속한 카테고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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