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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씨가 키우는 누렁이의 힘찬 모습. 스포티지 2000년식 아맥스 그랜드모델, 사진만으로도 디젤의 파워가 느껴진다.>
joins.com 황순화 칼럼 1월 19일자.
-잊혀진 한국의 명차 스포티지
그 동안 자동차에 대해 너무 딱딱한 얘기만 해 오다 보니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기에 이번에는 화제를 좀 바꾸어 독자분들이 잘 알고 있는 스포티지의 개발 과정과 그 의의에 대해 잠시 돌아다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떨까 싶다. 먼저 이번 주제의 부제로 덧붙인 ‘잊혀진 한국의 명차’라는 표현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실 독자분들이 많을 것이라 여겨진다. 잊혀졌다는 거야 이미 단종된 구형 차종이면서 국내에서 그다지 힛트를 치지도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으나, 명차라는 말에는 의당 좀 거부감이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명차의 정의부터 사람에 따라 달라질 텐데, 여기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명차는 단순히 판매대수가 많거나 이름이 많이 알려진 차가 아니라 100년 이상 전개되어 온 세계 자동차산업의 역사 속에서 생산방식이나 제품 컨셉, 디자인 등의 측면에 새로운 패턴을 제시하여 수 많은 추종모델을 양산하고 자동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Trend-Setter를 의미한다. 20세기 초 세계 최초로 Conveyor 생산방식의 도입과 사양 단순화의 제품 컨셉으로 저가 혁명을 일으켜 자동차 대중화의 시대를 열었던 Ford의 Model T(자동차와 문화 III-I 미국편 참조), 차체는 작아도 넓은 실내와 실용성이 뛰어난 디자인에 완성도 높은 공기역학적 스타일을 접목시켜 소형차의 기본 패턴을 제시한 VW의 Beetle, 96년 Paris Motor Show에 출품되어 승용차와 Mini Van이 결합된 디자인으로 지금의 세계적인 RV와 Hybrid의 거센 물결을 일으킨 Renault의 Megane Scenic 등이 좋은 예가 되겠다.
위에서 거론된 명차만큼은 아니지만, 스포티지는 세계 최초의 On-Road, Off-Road 겸용의 승용형 SUV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Trend-Setter로 인정받고 있는 모델이다. 91년 Tokyo Motor Show에 당시 거의 無名의 자동차업체였던 기아자동차(사실 기아자동차가 선진국에서 열린 대규모 Motor Show에 참가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음)가 출품하여 세계 무대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스포티지는 순식간에 새로운 컨셉의 SUV에 목말라 하던 선진국 자동차업체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수많은 경쟁 차종들을 물리치고 Best 10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일본 자동차업체들의 관심은 대단했는데 필자는 그 당시 스포티지의 주위에 몰려 든 Toyota의 엔지니어들이 ‘와, SUV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열심히 관찰하고 메모하던 감격스러운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몇 년 뒤에 Toyota의 RAV 4, Honda의 CR-V가 출시되어 세계적인 힛트를 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모방과 개선’은 일본 문화의 핵심이니까.
스포티지가 얼마나 혁신적인 모델이었는지는 이미 공개된 차종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 93년과 95년 Tokyo Motor Show에도 연속 출품되어 계속해서 엄청난 인기를 끈 것으로도 입증된다. 95년 당시 현장 책임자로 있던 필자는 언제 일본에서 시판되느냐는 일본사람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언제 들어 오냐는 질문에 시장성을 검토 중이라는 의례적인 답변을 들은 한 일본 남자가 ‘91년, 93년에도 똑같은 대답을 들었는데 웬 검토만 그리 오래 하나?’ 하고 화를 내기까지 했으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스포티지의 어떤 점이 그토록 주목을 끌었을까? 우선 스포티지의 가장 큰 특징은 낮은 차체 높이에 있었다. 비록 그 당시 기술적 한계로 인해 강철 프레임 위에 차체를 얹는 ‘Body on Frame’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일직선의 프레임을 사용했던 당시 SUV들과는 달리 그림처럼 프레임의 중간부분을 아래로 꺾는 방식을 통해 충분한 실내 높이를 확보하면서 차체의 높이와 Seat의 높이(자동차업계 전문용어로는 Hip Point라고 함)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Seat의 높이가 낮아지면 승하차도 용이해지고 차체에 의한 흔들림이 줄어들어 승차감이 상당히 좋아진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자동차가 주행하면서 Hip Point가 (나)에 있을 때보다 (가)에 있을 때 앞뒤, 좌우의 진동 폭이 더 작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트럭을 베이스로 하면서 Off-Road 용도를 중시하여 Suspension, 특히 Rear Suspension이 여러 겹의 철판으로 만들어진 Leaf Spring으로 된 기존 SUV들과는 달리 스포티지는 On-Road용도의 승차감을 위해 당시 승용차에 많이 쓰이고 있던 리지드 액슬을 사용했다. 게다가 도시형 SUV다 보니 트렁크를 작게 하여 차체 길이도 줄이고 무게도 줄여 그 당시 기준으로는 작은 2,000cc 휘발유 엔진을 얹고도 충분히 기본적인 성능을 낼 수 있었다. 연비도 좋아진 것은 물론이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SUV 최초로 외관에 라운드 컨셉을 적용하여 승용차 감각의 부드러운 실루엣을 강조하면서도 SUV다운 강한 느낌도 잃지 않도록 배려한 점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특히 실내는 ‘Man Maximum & Machine Minimum’의 컨셉으로 엔진룸을 최소화하고 앞뒤 Overhang을 짧게 하여 차체는 작아도 어른 5명이 충분히 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였다. 실내 디자인도 각지고 기능적이었던 기존 SUV와는 달리 계기판이나 도어 트림, 시트, 내장재 등에서 일반 승용차의 느낌이 강조되고, 각종 편의장치들도 승용차와 별 다르지 않게 장착되어 운전석 옆 4륜 변환 레버만 제외하면 안에 앉아서는 승용차에 앉아 있는 것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오히려 승용차보다는 Seat가 높으니 멀리 잘 보여 운전하기가 쉬워지고, Rear Seat 높이를 Front Seat보다 높여 뒤에 앉아서도 앞쪽이 잘 보이도록 배려한 점등 RV다운 실용성이 더해져 인기를 끌었다. 그 당시 기존 SUV 컨셉의 Mitsubishi Pajero를 그대로 도입했던 현대자동차(그 당시는 현대정공)의 Galloper의 초기 모델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SantaFe같은 승용형RV가 거리에서 흔하게 보이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스포티지도 촌스럽고 트럭같은 느낌이 강하게 나지만, 그 당시로서는 앞에서 언급된 주요 특질들로 인해 스포티지는 승용형 SUV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그러면 후진국의 소규모 자동차업체에 불과했던 기아자동차는 어떻게 해서 스포티지 같은 앞선 컨셉의 자동차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미처 형성되지도 않은 시장을 향해 과감하게 대규모 생산에 돌입하게 되었을까? 그 해답의 Key는 바로 Ford와의 협력관계에 있었다. 80년대 초 Mazda가 북미 수출용으로 개발했다가 그 당시 미국 레이건 정부의 강요에 의한 일본차의 대미수출자율규제에 의해 수출을 못하게 된 121(국내명 Pride)을 기아자동차가 생산하여 북미시장에 Ford Festiva란 이름으로 OEM 공급하게 된 것을 계기로 Ford는 84년에 기아자동차의 주식 10%를 취득하게 된다. 양질의 저가 소형차의 생산기지로서 기아자동차의 장점을 인식하게 된 Ford는 Festiva에 이은 제2탄으로 북미 시장의 Mini Compact SUV 시장을 위한 새로운 컨셉의 SUV를 생각하게 되었고, 양사는 85년부터 UW-52라는 Project Code로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게 되었다. 즉 스포티지의 앞선 상품 컨셉은 Ford에서 온 것이었다. 그 당시 가장 앞선 RV시장이었던 미국에서도 SUV는 각진 스타일과 큰 엔진을 단 대형차들이 대부분이었고, 목표로 하던 Mini Compact SUV 시장은 구닥다리 디자인의 Suzuki Samurai가 구식이기에 독특해진 스타일과 저가를 무기로 소량 팔리고 있는 정도의 미개척 분야였다.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시장에서 Mini Compact SUV가 폭발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게 90년대 중반부터이니 그 당시 Ford의 앞선 상품기획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기간의 기초 검토 후 성공을 자신한 Ford는 연간 15만대 생산규모에 10만대를 OEM으로 가져 가겠다고 제안하여 기아의 경영진을 한껏 들뜨게 했다(기아의 연간 총생산규모가 20만대가 채 안 되었을 때였으니 리스크도 없는 그 엄청난 성장기회에 기아 임직원들이 얼마나 흥분했을 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그러나 얼마 후 그 대가로 Ford는 기아자동차 주식의 50%를 요구하여 다국적 자본의 냉혹한 생리를 드러냈고 이는 당연히 기아자동차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곤란해진 Ford는 그 당시 기아자동차 소유로 나대지 상태에서 신공장 건설계획만 잡혀 있던 아산공장(지금의 화성공장)을 별도 법인화하여 그 곳에서 스포티지를 만들고 그 법인 주식을 50% 달라는 타협안을 냈지만 자존심 강한 기아자동차 경영진에 의해 그마저 거부당하고 말았다. 이에 기분이 상한 Ford는 UW-52 Project를 포기하고 떠나 버리게 되고 황당해진 기아자동차 경영진은 이 프로젝트의 계속 추진 여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우선 기초적인 검토를 보다 정밀하게 시행하는 것으로 시간을 좀 벌면서 長考 끝에 기아자동차 최고경영진이 내린 결정은 독자 개발의 추진이었다. 이렇듯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실패할 확률이 높고, 대규모 자금이 소요되기에 실패할 경우에는 회사의 경영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기아자동차 최고경영진이 무모하리만치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된 데는 기아자동차 내부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차량개발 전 과정에 대한 Know-How와 경험의 획득이었다. 현대자동차가 70년대 후반부터 미숙하나마 Mitsubishi의 Underbody를 들여 와 과감하게 독자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했음에 반해, 그룹의 규모가 작아 현대자동차처럼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없었던 기아자동차는 Mazda의 차종을 국내에서 라이센스 생산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자동차와 문화 V-III, 한국편 참조). 일본에서 완성된 설계도면을 사 와서 그대로 만들기만 한 것이다. 그래도 Brisa를 만들어 국내 승용시장의 선두를 지키고 있던 기아자동차는 81년 정부의 강제적인 중화학공업 합리화조치에 의해 다시 87년에 Pride를 만들어 내기까지 자동차의 한 라이프 싸이클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역사에 있어 중요한 80년대에 독자모델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기아자동차는 다시 Mazda의 차종을 받아서 만드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으나, Pride의 성공으로 충분한 자금을 축적하게 되자 다시 독자모델의 개발에 나서게 된다. 당연히 그 당시 기술제휴선인 Mazda의 323 Underbody를 가져와 현대자동차처럼 Upperbody만의 독자모델을 만들어 Pride의 윗 세그멘트인 준중형 시장에 진입하려 하였으나, 기아자동차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했던 Mazda는 Underbody의 제공을 거부하였고 기아자동차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나중에 기아자동차가 Sephia의 Underbody 독자개발에 성공하게 되자 놀란 Mazda는 323 Underbody를 쓰라고 오히려 제의를 해 왔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우선 능력이 있고 봐야 된다). 이 때 Ford가 나타나 UW-52를 얘기하며 차량개발의 초기부터 생산, 판매까지 전 부문에 걸친 Blue Print를 떡 하니 제시한 것이었다.
가뭄에 단비 만난 듯 달려든 기아자동차의 엔지니어들은 Ford와 UW-52를 상세 검토하면서 드디어 차량개발은 어떤 순서에 의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고, 각 단계별로 설계, 실험, 구매, 판매 등 각 부문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Check해 가야 하는 지를 습득하게 되었다. 상세 검토 완료 후 완성된 Road Map을 들고 실전에 신나게 막 들어가려 할 때, Ford가 앞서 얘기한 이유로 갑자기 떠나 버리니(Ford는 항상 갑자기 떠난다. 지난 번 대우자동차 입찰 때도 그랬다. 이런 Ford의 기업문화에 대해서 나중에 한 번 살펴 보자) 기아자동차로서는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깊은 정글 속 보물상자에 다다를 수 있는 지도 한 장만 달랑 손에 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힘들게 얻은 차량 개발의 Road Map의 실전 검증을 위해 기아자동차는 스포티지의 개발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홀로 목표를 향해 떠나는 프로도같지 않은가? 프로도에게 도와 주는 하인이 있었다면 기아자동차에게는 미국과 유럽의 엔지니어링 용역업체들이 있었다). 실제 스포티지의 개발 과정을 통해 수많은 시행 착오를 겪은 뒤 검증된 길을 따라 그 후 기아자동차의 독자모델이자 국내 최초의 Underbody 국산화 차종인 Sephia가 개발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독자모델 보유에 대한 기아자동차의 강렬한 소망이었다. 앞에서 얘기되었듯이 80년대 후반까지 Mazda의 차종들을 도입해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기아자동차는 Mazda와의 계약에 의해 MDV(Mazda-Designed Vehicle)의 수출을 엄격히 제한 받고 있었다. 그 당시 현대자동차 Pony의 북미수출 성공에 의해 급속히 확대되었던 선진국 수출시장은 국내 자동차업체들에게는 매출확대와 기술 축적을 위해 놓칠 수 없는 기회였고, 기아자동차는 MDV의 Kia Brand 수출을 위해 수도 없이 Mazda와 협상을 벌였지만(말이 협상이지 사실 상 애원이었다. 기술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Pride의 Ford OEM 수출 이외에는 일부 MDV 화물트럭의 소량 수출의 선별적 허용과 수출에 따른 Mazda의 기회비용의 보상(같은 자동차를 파니 기아자동차가 파는 만큼 Mazda가 못 팔게 되어 피해를 본다는 논리임)이라는 치욕을 당했을 뿐이었다. 당시 기아자동차의 실무 대리로서 이 같은 협상에 참여했던 필자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때 생각을 하니 다시 열이 치받혀 오른다. 이 참에 개발만 해놓으면 최초의 KDV(Kia-Designed Vehicle)로서 독자모델을 갖게 되는 것이니 열 받고 다급했던 당시 기아자동차 최고경영진은 스포티지 개발에 과감하게 나서게 된 것이다. 라이벌이었던 현대자동차가(회사 규모의 차이가 이미 벌어져 있었기에 라이벌이라고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양사의 최고경영진은 그랬다) 독자 브랜드로 북미시장에서 힛트를 치는 걸 바라보기만 하던 기아자동차로서는 Ford가 북미 시장에서 충분히 팔 수 있는 차라고 했으니 얼른 개발해서 북미시장에서 현대자동차 못지 않은 힛트를 치고 싶다는 경쟁심리도 물론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엔지니어 특유의 자존심을 들 수 있겠다. 최근 들어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이후에는 그 색깔이 많이 엷어졌지만, 기아자동차는 경영진의 대부분이 엔지니어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마케팅 보다는 생산, 자동차의 편의성이나 세련됨 보다는 성능과 안전, 수익을 위한 시장요구에의 순응 보다는 제대로 된 차를 만들어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고집이 강한 회사였다. 일본업체로 보면 Nissan이나 Mazda와 색깔이 비슷하다. 대개 엔지니어들은 남들이 못하고 있는 새로운 것을 남보다 앞서 만들어 내는 것에 만족을 느끼곤 한다. 그렇다 보니 순수한 엔지니어들의 집합체인 기아자동차가 스포티지의 개발에 대해 두려움보다는 열정과 도전의식을 느껴 ‘어렵지만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한 번 해 보자!’ 라는 분위기가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이런 분위기가 있었기에 그 후 기아자동차는 Elan이라는 무모한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하게 된다.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상세하게 하기로 하자). 하긴 無에서 有를 창조하고자 하는 이러한 도전 정신을 우리의 선배분들이 갖고 있지 않았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자동차 강국으로 자리매김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스포티지가 어려운 산고 끝에 훌륭하게 태어나 미국에서 호평을 받고 Mini Compact SUV 시장의 잠재력이 확인되자, 90년대 중반 Ford가 기아자동차에 다시 OEM 공급을 제의해 왔다. 생산능력도 모자라고 여러 거래조건이 맞지 않아 기아자동차가 거절하자 다급해진 Ford는 Mazda와 공동개발에 들어가 비슷한 Specification의 SUV를 만들어 시판하게 되는데, 이게 국내에서도 팔리고 있는 Escape다. 이렇듯 실력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같은 세계 자동차산업 속에서 선배분들의 뜨거운 열정이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을 한걸음씩 발전시켜 온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개발이 된 스포티지의 판매는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해외시장에서는 성공, 내수시장에서는 실패였다. 해외, 특히 북미시장에서의 성공은 Ford가 예측한대로 Mini Compact SUV의 시장잠재력이 컸음에 힘입은 바 컸다. 스포티지는 상품력도 뛰어나고 시장을 선도하고 들어갔기에, 북미시장 진출 후 작년에 단종하기까지 근 10년간 낮은 Brand Image나 빈약한 딜러망에도 불구하고 Model Change 한 번 없이 연간 4~5만대씩 꾸준하게 팔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면 국내에서는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한마디로 자동차 사회의 발달 단계에 있어 선진 시장만큼 성숙되지 못한 국내 자동차문화와 스포티지의 언밸런스 때문이었다. 90년대 들어 현대자동차에서 Galloper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국내 SUV 시장은 세계 어느 시장이나 초기 단계에 다 그러하듯이 트럭 베이스로 만들어져 크고 각진 스타일에 기능과 실용 위주의 모델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강렬한 개성을 지닌 근육질 남성의 터프한 매력을 느끼고 싶어서, 아니 느끼게 하고 싶어서 주로 남자들이 SUV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 시기에 등장한 작고 곱상한 도시의 남성 이미지를 지닌 스포티지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선택이었다. 억지로 터프한 느낌을 내고자 외관 색깔도 어두운 색으로만 칠하고 범퍼 가드도 붙여 보고 했지만 스타일만 더 어색해질 뿐이었다. 차체 사이즈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에 대응하여 뒷부분을 30cm늘린 스포티지 그랜드도 나오고 외관 색깔에 흰색도 추가하여 이미지 변신을 추구하였으나 사는 사람은 고사하고 파는 사람도 컨셉이 헝클어진 뒤라 별 효과가 없었다(판매 초기에 商用부문에 팔 차가 별로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상용판매부가 스포티지의 판매를 담당한 것이 중대한 실수였다고 생각된다. 차라리 그 당시 상황에는 맞지 않았다 할 지라도 처음부터 도시형 On-Road 이미지로 밀고 나갔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혹자는 시판 초기 제조상의 실수로 스포티지의 뒷바퀴가 주행 중에 빠진 사건이 판매위축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하나, 그 이전에 선진국 문화에 맞도록 만들어진 스포티지와 미성숙된 국내 자동차문화와의 괴리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물론 휘발유 엔진을 달고 나간 선진 시장과는 달리 디젤이 주종이던 국내 시장에 맞는 디젤 엔진이 없어 당시 Besta에 얹던 디젤엔진을 쓰다 보니 소음과 진동도 심하고 파워도 떨어졌지만, 그 당시 경쟁차종들에 얹혀 있던 디젤엔진들도 다 구형으로 거기서 거기였는지라 엔진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난산을 거듭하여 태어난 명차 스포티지는 이제 자연수명을 다하고 단종되었다. 후속차종으로 개발되던 모델은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후 변형되어 Sorento라는 다른 이름을 달고 판매되고 있다. 자식을 잘 낳아 놓으면 뭐 하나. 계속해서 부모가 잘 가꾸고 다듬어야 성공하지. 회사의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차종을 갖고 있던 기아자동차는 모자란 개발여력을 우선 승용차 부문에 치중하느라 사실상 스포티지를 오랜 기간 동안 방치하고 말았다. 스포티지는 돌보아 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혼자 고군분투 하다가 끝내 박수 하나 쳐주는 사람 없이 쓸쓸하게 세계 자동차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고 있다. 쓸데 없는 공상이기는 하나 스포티지 출시 후 4~5년 뒤인 90년대 후반 정도에 그 당시 트렌드에 맞도록 Full Model Change를 한 번 했었더라면, 그 때는 국내 시장도 승용형 SUV를 받아 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숙되어 있을 때라 스포티지가 정말로 확실한 명차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올 가을에 기아자동차에서 출시 예정인 Avante Base의 5인승 SUV(개발코드명 KM)이 스포티지의 이름을 승계한다는 소문이 있어 명가의 전통이 어떻게 이어질지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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