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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과 1학년 겨울방학. 단대학생회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야, 내다. 잘 놀았제? 목소리 들으니까 잘 논 거 같구만. 그래. 다른 게 아니고 이번에 2박3일로 신입생 예비대학 하잖아. 그 때 니 올끼 제? 꼭 와야된데이."

"야아, 거기 안 가믄 안되나?"

"이기 무신 소리 하노? 니가 안 오믄 누가 오는데. 17일부터니까 꼭 와래이."

"야아, 난 좀 빼주라. 나 지금 책만드는 것도 벅차다."
(당시 필자는 학생회실의 자료들을 모아 '민족의학 바로읽기'라는 교양자료집을 편집하느라 진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그래, 잘 됐네. 머리도 식힐 겸 며칠 놀다 가면 되지. 그럼, 오는 걸로 안다."

별 수 없이 옷 몇가지를 주섬주섬 배낭에 샀다.
17일 아침 학생회실로 올라갔다.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 친구들과 잡담을 하고 있는데, 작년 학생회장 형이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전 학생회장 : "야! 신입생 애들 아직 안 왔제?"

필자 : "형이 이번에 프락치라면서요."

전 학생회장 : "그래, 군대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불태워야 않겠냐. 근데 내 이름은 뭘로 하기로 했는데?"

학생A : "아직 안 정했는데. 뭐가 좋을까?"

친구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학생B : "야, 김영삼으로 하자."

전 학생회장 : "김영삼?"

필자 : "아니, 김영삼은 너무 표나니까 그냥 김양배로 하자." (김양배는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의 이름.)

전 학생회장 : "오, 그래. 김양배, 양배로 하자. 근데 나이는? 요새 현역이 몇년생이지?"

학생C : "78년인데요. 형은 그냥 예비역으로 하죠."

전 학생회장 : "안돼! 그럼, 난 77년생 재수로 할께." (이 소리를 듣고 주변의 모든 학우들이 비난의 야유를 보냈다.)

학생D : "형, 근데 몇조 하실래요?"

전 학생회장 : "으응.. 난 무조건 여학생 많은 조로 넣어주라."

학생D : "전부 2명씩 골고루 넣었어요. 아무 조나 골라보세요."

전 학생회장 : "가만 있자. 음, 그래, 나 2조 할래. 여기가 낫겠다."

학생D : "형, 다른 조 골라보세요. 거긴 예비역이 있는데."

전 학생회장 : "우씨, 예비역 있음 안되지. 그럼, 나 8조 할래. 8조 조장 누구냐?"

으아아악!!!!

이럴수가. 필자가 바로 8조의 조장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내 조에 들어올 수가 있담! 말도 안돼! 에고, 난 망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으랴.

필자 : "헤헤, 형, 다른 조 하시죠? 8조 재미없어요."

전 학생회장 : "야, 나 8조 할래. 여기 봐. 이 조가 제일 괜찮잖아."

별 수 없이 나는 71년생짜리 전 학생회장을 77년생이라고 속여 우리 조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우째 이런 일이!) 아참, 여기서 잠시 '프락치'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겠다.

프락치라는 건 첩자를 의미하는 말인데, 몇 년 전부터 신입생 예비대학에 선배들을 신입생처럼 속여 잠입시킨 후 하루 정도 같이 놀게 하는 것이 전통(?)처럼 내려온 것이다.

필자의 조에 들어온 프락치는 아주 능글능글하게 나를 쳐다보며 존대 말을 했다.

"선배님, 저 버스 타고 가면 되나요?"

아, 못참겠다. 웃음이 곧 터질 것 같았다. 나보다 4살이나 많은 이 프락치는 신입생들 틈에 끼어 아주 천연덕스럽게 김밥을 먹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다. 에고, 내 팔자야.

숙소를 배정받고 조원들이 모두 방에 둘러앉았다. (난 최대한 프락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한명씩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모두 간단히 소개를 마치고 프락치의 차례가 돌아왔다.

"예, 전 77년생이구요. 김양배입니다. 재수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아~ 저 능글맞은 연기 좀 봐라. 으아악,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며 선배님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생 중 가장 슬펐던 기억을 떠올리며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해졌다. 이 놈의 프락치가 나에게 곤란한 질문만 하는 것이었다.

"선배님, 이번에도 수업 안하고 데모하나요?"

음.. (음...이 양반이...지가 학생회장 해놓고선...)

"선배님, 올해 여자들은 많습니까? 제가 여자에 좀 관심이 많아서요."

음... (어허, 안되겠는데...이거)

"선배님, 한의대에선 뭘 배우는데요?"

음.. (당신이 나보다 더 많이 배웠잖소!!)

프락치의 뜬금없는 질문에 사정없이 난타당한 필자는 급한 용무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에 어울림의 자리가 강당에서 있었다. 사회자가 게임을 하면서 신입생들과 놀았다.(마치 결혼식 피로연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끌끌~)

게임 중간에 프락치가 걸려서 벌칙을 받았다. 칵테일(?)을 마시는 것이었다. 간장, 멸치액젖, 소주 등이 들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다 섞고 나니 그 액체의 색깔만 보기만해도 구토가 나려고 했다. 으윽~

프락치는 약간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신분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원샷을 했다. 그리고 나서 자리로 들어오는데, 벌칙에 걸렸다.(으이구, 저 바보같은 프락치. 좀 잘하지..)
또 끌려나가서 아까 마신 거랑 비슷한 칵테일(?)를 또 한잔 받았다.

거무티티한 그 액체를 바라보던 프락치는 약간 고민을 하였다. 프락치는 눈빛으로 사회자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야, 내가 아무리 프락치이기로서니 내가 니 선배인데 이럴수 있냐!' 라고 말하는듯 했다.

하지만 냉정한 사회자는 실실 웃으면서 원샷을 요구하였고, 결국 몇 분 동안 갈등 하던 프락치는 모든 것을 실토했다.

"저 여러분한테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신입생이 아니거든요. 프락치입니다. 저는 작년에 학생회장을 했던 93학번 XXX라고 합니다. 원래 프락치를 따로 공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너무 벌칙을 많이 시켜서 제가 도저히 못참아서 이렇게 실토를 합니다. 예, 그럼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하략)"



프락치가 이렇게 실토를 하고 있을 때, 칵테일을 원샷시켰던 사회자는 옆에서 무릎꿇고 있었다.

그 때 그 프락치는 데모가 끝나고 군대에 잡혀가서 박격포 주특기를 받았고, 제대한 후 무사히 복학하여 학문의 길에 정진하고 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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