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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 2학년 중간고사때, 학교에서 심포지엄이 하나 있었는데, 이 글은 그 때 들었던 강의 중의 하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학교에는 중간기말시험을 치기전에 준비기간이라는 게 며칠 있어서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수업이 휴강됐다. 그 준비기간에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초청인사 중에는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일본 동경대 의학부 정종철 교수.

정종철. 일본의 한의학 연구자이며 재일교포 3세로 한국어는 못하지만, 제일교포 출신으로 동경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학생들의 기대를 사기에 충분했다. (생각해보니 그날 방송국에서도 왔었던 것 같다.)

평소에 학점에 대한 내공을 쌓지 않았던 필자는 중간고사를 '준비'해야만 하는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종철 교수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행사장을 찾았다.

작달막한 키에 벗겨진 머리, 쭈글쭈글한 이마에 굵은 뿔테 안경, 고스톱 잘 치는 우리동네 목욕탕집 아저씨 같은 인상. 그는 무선마이크를 잡고 교탁 옆에 서서 일본어로 발표를 시작하였다. (물론 하나도 못 알아 듣는다 --;;; 교수님이 통역을 해주었다.)

"저는 일본의 최근 한의학 연구동향에 대해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자랑이나 자만이 아니라 일본 한의학계의 현상을 말씀드리는 것이며, 한국의 한의학이 일본을 추월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재일교포 3세로서 한국에서의 오늘 이 강연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일본 한방의 비밀 얘기를 많이 들려주고 싶습니다."

뒤이어 그래프가 잔뜩 그려진 슬라이드가 한장씩 넘어가면서 정교수의 발표는 계속 이어졌다.

"일본에서 쓰는 한약의 약 95퍼센트가 추출물 즉, EX제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한의사는 없습니다. 의료체계를 보면 약국에서 한약을 판매할 수 있고, 침구사제도가 있습니다. 침구사는 약 20-30만명이 있 으며, 그 중 약 4-5만이 생계를 위해 침구사를 하고 있습니다. 약국에서 한약을 판매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처럼 약사가 임의로 처방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약사는 오로지 약을 판매만 합니다.

의사는 약 22만명이며 45세 미만이 대단히 많습니다. 약 10년 후면 한국처럼 포화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한방약의 사용빈도를 보면 70년 대에는 약 20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으나 93년도에는 80퍼센트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지난 20년만에 폭증한 것입니다. 저는 66년부터 한방약을 연구했으며 작년으로 한약을 연구한 지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

수많은 슬라이드들이 계속 넘어갔다.

"1966년에는 한방약을 연구하고 진료하는 사람이 400명 정도 였고 의사수는 10만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사 22만명 중 약 80퍼센트가 한방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방약 사용법 수준은 한국에 비해 낮습니다. 146종만 국민보험에 적용되고, 처음엔 5종 정도였습니다. 한.양약 병용투여가 90퍼센트 정도로 거의 모두 한약과 양 약을 동시에 투여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런 투약방식이 좋지 않다고 봅니다.……

젊은 의사들이 한방약을 더 많이 쓰며 나이든 의사는 쓰지 않습니다. 초보의사는 서양의학을 기반으로 사용하지만, 6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의사들은 전적으로 한방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진단을 합니다. 질환별로 의사가 전문화되어서 많이 쓰는 한약으로는 소시호탕이 24%, 갈근탕이 15%로 한국과 비슷합니다. 질환별로는 간관련 질환에 많이 쓰고요 부인과 의사들도 많이 씁니다. 부인과에서 한방약을 쓰지 않으면 환자가 오지 않습니다. 반드시 환자에게 한방약을 줘야 환자들이 안심을 합니다. …… 이 정도로 모두 마치고요. 질문을 받겠습니다."

"어떻게 하시다가 한의학을 연구하시게 되었습니까?"

"첫째는 환자가 한약을 원하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내가 직접 한약을 복용해보고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통역을 하고 계시던 우리과 생화학교수님이 거들었다.
"하하, 저도 정교수님처럼 직접 먹어보고 효험을 봐서 한의대에 오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일본에선 한의대가 없고 또 의대에서도 한의학을 정규과목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정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미래의 교육 체계는 무엇입니까?"

"예, 일본에선 대학에서 한의학을 정식으로 가르치는 곳은 없지만, 개업한 의사들이 모여서 대단히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저희 동경대 의대도 예과 과정에 한의학과목을 개설하는 것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일본과 달리 한의과대학이 있고 한의사라는 제도적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한의학 발전의 조건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한의학의 발전이 더디다는 것은 각성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충격적인 지적이다. 우리는 늘 우리나라의 한의학 정책이 양방에 비해 소외되어있다고 불평하지 않았던가. 허나 곰곰히 따져보면 우리나라만큼 한의사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돼있고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중 한명이 손을 들었다.
"아까 일본에서 한약과 양약을 같이 투여한다고 하셨는데 무슨 이론적 근거가 있습니까?"

정교수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단지 환자가 그렇게 주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대다수의 환자들은 양약과 한약을 모두 받아가지만 집에 가서는 양약을 모두 버리고 한약만을 먹습니다. 양약은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심하기 때문입니다. 의료라는 것은 그 민족이 갖고 있는 하나의 문화입니다."

'의료는 문화이다.' 나 역시 동감하고 있던 바, 그때 내가 들고 다이어리에 이런 말이 적혀있었던 것 같다.

'의료의 대상은 질병자체에 있지 않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간에게 있다. 질병자체의 치유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결합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로 의료이다.'

음,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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