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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 어제 아버지를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시켜 드렸어요. 너무 마음이 괴롭고 힘듭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아버지를 집에서 오래 모셨는데 그래서 더 고통스럽습니다. 차라리 모시지 말 걸 그랬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서대문구에서 알리시아 드림

 

- 알리시아, 상심이 크겠어요. 네가지 이야기를 드리고싶어요.

1. 계절

우리가 봄이 되면 딸기가 나오기 시작하죠. 그 뒤에 참외가 나오고 복숭아가 나오고 수박 나오고 포도 나오고 사과 배 감 나오고 귤까지 나오면 한해가 갑니다. 사람의 인생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20년씩 끊어보세요. 20세까지 봄. 청춘이라는 말이 있죠. 그 단어에 봄춘자가 들어가요. 봄에 딸기가 나오듯 그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을 거에요. 동네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버지랑 캠핑도 가고 그리고 20세가 되면 여름이 시작되죠. 인생의 여름에는 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경험이 있을 거에요. 첫 연애도 해보고 이별도 당하고 처음 해외배낭여행도 가보고 설레고 행복했던 경험들이 있을 거에요. 그러다가 회사 면접도 보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초보아빠 엄마가 되어 힘들게 육아도 하고 키우는 보람도 느끼고 한여름처럼 뜨겁게 보내다가 보면 어느새 눈 떠보면 40이 되면 모든 면에서 가을이 되죠. 직업적인 면에서도 추수의 계절이니 베테랑이 되어 돈도 많이 벌게 되고 생각도 그만큼 원숙해집니다. 하지만 몸도 식고 생각도 식고 열정도 식어버리지요. 60세가 되면 겨울이 시작되지만 그 시기에도 나름의 행복한 과일들이 열려요. 손주들이 태어나고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도 많이 다니고. 아무튼 사람의 일생도 봄여름가을겨울에 제철 과일이 나듯이 시기마다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행복들로 채워져있어요. 그걸 다 누릴 순 없어요. 누구는 대학을 실패하고 누구는 결혼을 실패하고 누구는 자식이 없고, 하지만 빈틈은 있지만 완전히 꽝은 없어요. 알리시아 아버지도 각 시기마다 모든 행복을 다 맛보진 못했지만 행복했던 제철과일의 시기가 있었을 거에요. 지금은 겨울이죠. 겨울은 추운게 당연한 겁니다. 뜨거웠던 여름, 풍성했던 가을의 전성기를 추억하며 보내는 추운 시절입니다.

아버지에게 5년간 더 살 수 있게 해준다면 20대의 아버지로 5년을 살고싶을까요? 아니면 80대의 5년을 더 살고 싶을까요? 당연히 20대의 5년으로 더 살고 싶겠죠. 20대의 1년과 80대의 1년은 기간은 같아도 가치는 달라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가치가 점점 줄어들어요. 그래서 젊을때 봄여름에 더 많은 행복을 다양하게 누렸다면 노년에 삶의 연장(특히 침상에서 연장되는)은 그렇게 가치있는 시간이 아니에요. 아버지의 봄 여름 가을을 돌아보시고 행복했다면 그걸로 위안을 삼으세요.

2. 치환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괴로워하지말아요.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고 우리가 쓸 수 있는 자원, 에너지, 체력, 재력은 한정되어 있어요. 우리는 늙고 몸은 약해지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간과 재력과 에너지를 어디론가 열심히 옮기고 있어요. 마치 월급통장을 모아서 아파트를 사듯이. 통장은 비어도 아파트가 남아요. 통장을 우리 육신이라고 생각해보세요. 20대 30대 40대를 지나면서 자신의 인생의 자원(시간, 체력, 재력)을 투입하는 <무언가>가 존재할 거에요. 그게 자식일수도 있고 학위일 수도 있고, 책일수도 있고 병원이나 회사일수도 있어요. 자식같은 책 그런말 들어본적 있죠? 누군가 자기 청춘을 투자해서 책을 썼다면 그 책에 그 사람의 시간과 체력과 에너지가 이동한 거에요. 그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의 에너지가 담겨 있는 책은 남아 있죠. 사람이 죽으면 뼈가 남는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돈을 남기셨으면, 아, 내 아버지의 일부가 저 돈에 들어가 있구나! 아버지가 책을 남기셨으면, 아, 내 아버지의 영혼과 체력과 열정이 이 책에 남겨져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동의보감 보면 아, 허준선생님 몸뚱아리와 영혼이 여기 일부 남겨져 있구나. 권삼윤 책을 보면 아, 권삼윤 아저씨의 열정과 체력과 시간이 여기 녹아 있구나 생각하면 돼요.

아버지의 동영상 10분짜리가 남아 있다면 그 영상을 촬영하는 시간 10분 동안에 아버지가 썼던 에너지, 열의, 체력, 자기 인생의 시간이 그 동영상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거에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남긴 물체 중에 가장 중요한건 알리시아 본인일 겁니다. 거울을 보세요. 아버지가 남긴 작품을 감상해요. 하자가 있고, 실수한 적도 많고, 맘에 안 드는 부분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가장 정성껏 만든 물건이 알리시아일 거에요.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7살 될때까지 아버지에게 어마어마한 행복감을 안겨줬을 거에요. 평생 효도는 7살 전에 다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3. 오늘 해야할 일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 전성기를 지나오면서 나름의 수많은 제철과일처럼 다양한 국면마다 행복감을 느꼈다면 다행이고, 이 세상에 뭐라도 하나 남기셨으면, 그 남긴 것들이 돈이든 자식이든, 추억이든 풍성하다면 95점짜리 아버지죠.물론 장수하고 천수를 누린다면 백점짜리겠지만 흔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90점인데 100점을 자꾸 바라지마세요. 90점도 훌륭합니다.

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실지, 내일 돌아가실지, 한달 뒤에 돌아가실지 그런건 의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니까 그런건 아예 신경도 쓰지마시고 다만, 오늘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다면 오늘 하시고, 내일 해야할 일은 내일 하세요. 하지 말아야할 일이 있다면 하지 마시고. 그게 다에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잖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됩니다.

 

4.슬픔의 정체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거에요. 장례식장에서 본인이 매우 슬프고 비통하다면 그것은 아버지가 알리시아 본인에게 아주 좋은 인연이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안 좋은 인연이 사망하면 슬프지 않아요. 어떤 장례식장에는 유족들이 전혀 슬퍼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친구 장례식장에 갔는데 너무너무 슬프고 가슴이 찢이진다면 그 친구가 나에게 좋은 인연이었던 겁니다. 인복의 크기만큼 슬픔이 비례해서 짠하고 나타납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많이 슬플수록 '아, 내가 아버지 만나서 많이 행복했구나. 내가 아버지복이 있는 사람이었구나..'라는 걸 인식하면 됩니다. 얼마나 큰 복인지는 장례식이 시작돼야 알 수 있어요.

사람의 감정은 바람이에요. 슬픔이 바람처럼 몰아쳐도, 나무가 부러질 것처럼 가지가 미친듯이 흔들려도 그 바람은 다 지나간다는 걸 잊지마세요. 바람을 이겨내려고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마세요. 괜히 가지만 부러집니다. 불면 부는대로 안 불면 안 부는대로 바람을 흘려보내주세요. 흔들면 흔들려주세요. 두 발로 뿌리를 꽉 박고 그래, 바람아 어서와라. 신나게 흔들고 지나가라고 하세요. 언젠가는 바람이 지나가고 잦아듭니다.

5. 감정의 증폭

인간의 감정은 리미트가 걸린 환경에서 증폭돼요. 백화점 마감세일할때 매대를 뒤적이는 내 손길이 조급해지는 것처럼.  본인 인생의 여름을 생각해보세요. 20대때 한창 친구들 만나고 바쁘고 연애하고 다닐때 부모님과 얼마나 자주 연락했나요? 1년에 몇번 고향에 내려갔나요? 그때는 1년에 두세번만 봐도 부모와 유대감이 단단하죠. 늘 곁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3시간 안에 얼굴 볼 수 있으니까. 영원히 부모님이 내 옆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런데 그런가요? 아니죠. 이제 영원히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조급해집니다. 갑자기 효심이 막 생겨나죠. 타임 리미트가 걸려 있으면 감정이 더 요동쳐요. 나의 착각이어죠. 마치 매일매일 영원히 해가 뜰 것처럼 부모님이 늘 내 곁에 계실 것 같은 착각을 한 거죠. 모든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부모와 헤어집니다. 누구는 1년만에 누구는 40년만에 누구는 70년만에 헤어지기도 하죠. 모든 헤어짐은 다 마음에 안 들어요. 얼마나 더 마음에 안 드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우리가 착각에서 벗어나 진실의 순간을 직면하게 되면 아쉽고 후회되고 불편하고 슬픕니다. 그런 마음이 당연한 겁니다.어느 순간 '아, 그때 그 식사가 건강했던 부모님과 먹었던 마지막 식사였구나.' 깨닫게 되는 때가 있을 겁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아쉽고 후회되고 미안하고 불편하고 슬픈.

6. 운명

우리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듯, 헤어질때도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헤어질지를 선택할 수 없어요. 그냥 주어진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걸 운명이라 부릅니다. 나의 선택지가 전혀 없는 상황. 그냥 주어진 메뉴 그대로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 피할 수 없는 상황. 알리시아의 아버지와 이런 방식으로 헤어지게된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세요.

알리시아와 아버님께 평온함이 찾아오길 기원합니다.<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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